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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이 | 2009/02/19 15:38

일출(2009)

by 여울이 | 2009/02/13 10:12 | 트랙백 | 덧글(0)

하숙-순정 소설입니다~


하숙.
난 방송작가가 꿈인 스물 아홉살 꿈 많은 노총각이다.
내가 은행일을 때려 치우고 작가학원을 등록한 지 백일이 지났다.
아직 나에게 빛이 보이지는 않지만 창작활동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하루가 힘들지만 무료하지는 않다.
4년 동안 은행에서 일하고 짤리는 대가로 받은 1300만원, 그리고 그 동안 모은 돈 700만원.
이 돈으로 내가 꿈 꿀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이년이다.
이년 안에 내 꿈을 이룰 수 없다면, 나는 다시 직장을 구해야 하고 예전처럼
내 시간은 어디에 있는지 하늘도 못 본채 이름없는 어느 회사에 몸을 받쳐야 한다.
학원비 30만원이 달이 바뀔때마다 나간다.
하숙비가 또 35만원씩 꼬박 나간다.
한 달에 버는 돈 없이 100만원 가까이 내 통장에서 빠져 나가고 있다.
난 하숙을 한다.
둘이서 쓰는 방을 구하려고 생각을 했었지만 아무래도 창작활동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독방을 쓴다. 두 평 가까운 독방이다.
아직 난 구성작가 단계이다.
언제쯤 버젓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제는 새벽까지 에이포지 열장 가까이 되는 작은 글을 썼다.
오늘 내가 잠에서 깨었을때 아침 해가 유난히 밝다.
또 늦잠을 잔 모양이다.
오늘 아침은 짤없이 백수와 같이 밥을 먹어야 겠구나.
오늘은 또 무슨 소릴 지껄이는 지 내 두고 볼 것이다.
"쾅. 쾅!"
참 방문 노크하는 소리 대단하다.
저런 걸 딸이라고 낳은 하숙집 아줌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하숙집 아줌마 한갑이 내년 인 오십대 후반의 아줌마다.
딸만 둘을 가진 과부시다.
큰 딸과 작은 딸의 나이 차가 9살이나 난다.
큰 딸과 작은 딸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십년 전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큰 딸은 시집을 갔다.
먼 나라로. 바깥 분도 사 년전에 한갑 잔치를 하고 몇 개월 뒤
심장 질환으로 삶을 달리 하셨다고 들었다.
하숙 치는 일은 그때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친척도 없고 피붙이라고는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작은 딸이 전부다.
그런데 하숙집 아줌마 요즘 고혈압으로 고통을 받고 계시다.
간혹 병원을 가시면 이 집 딸이 밥을 해주는데 그러면 하숙생들은 대부분
중국집에 전화를 하거나 다이어트 한다는 핑계를 대곤 한다.
"백수씨. 밥 안 먹어요?"
"일어 났어요."
제발 문은 열지는 말기를... 나 이집 딸에게 못 볼 꼴 많이 당했다.
팬티만 입고 있는데 그녀가 문을 연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처음엔 좀 놀라는 척을 하더니 요즘은 그냥 멀뚱한 표정으로 한 참을 쳐다 본다.
난 지금 반바지 같은 드렁크 팬티를 입고 있다.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이불위에 앉아 있는데 그녀가 또 문을 열었다.
왜 잠그는 장치가 고장이 난겨.
"그 문 좀 홱 열지 말아요."
"빨리 나오면 이런 일 없잖아요. 다들 먹고 학교 갔는데 백수씨만 남았어요. 빨리 나와요."
그녀는 날 항상 백수라 부른다.
백수인 것이 사실이라서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자기도 백수이면서...
집에서 추리닝을 껴 입고는 방을 나갔다.
널찍한 주방의 식탁엔 아침에 학생들이 먹고 간 반찬 그릇들이 어지러히 놓여있다.
저걸 먹기가 그렇다. 난 저걸 먹지 않는다.
우리 하숙집 백수 아가씨가 마음에 드는 한가지가 내 상을 따로 차려 준다는 것이다.
물론 날 위한 것은 아니다.
자길 위해서 차린 밥상에 난 밥하고 숟가락을 챙겨가지고 눈치보며 아침식사를 한다.
그녀는 아주 고고한 척 하는게 취미인 여자다.
하숙집 아줌마와도 같이 먹을 때가 많은데 요즘 아줌마는 아침상을
차리고 난 후에 바로 병원을 가신다.
병세가 안 좋아 지시지만 아직 혼자서 병원을 찾으실 정도는 되신다.
오늘 아침도 아줌마는 보이시질 않는다.
"백수씨 좀 일찍 일어나서 학생들하고 같이 좀 식사해요."
아직 치우지 않은 큰 식탁의 아래서 작은 밥상을 떡하니 차려놓고,
그 앞에 양반처럼 앉아서는 나를 꼬아 보는 눈빛이 무섭다.
"그 백수씨, 백수씨 그러지 말아요. 자기는 백수 아닌감?"
"뭐에요? 난 대기 발령자에요. 백수씨하고는 차원이 틀려요. 밥 먹기 싫어요?"
돈내고 먹는 밥인데 참 생색을 낸다. 말은 좋다 대기 발령자.
그렇다 그녀는 대기 발령자다. 임용 고시까지 떡하니 합격한 대기 발령자다.
올해로 삼년째 무소식인 대기 발령자다.
하기야 요즘 생물 선생을 찾는 학교가 몇이나 될까?
내년에는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교직원 정년이 단축됐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말이다.
그릇에다 밥을 퍼 가지고 그녀 앞에 앉았다.
밥숟갈은 펐으나 아직 반찬에 손을 못대고 있다.
그녀가 젓가락질을 하고 난 다음에야 반찬에 손을 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뭘 고민하냐? 아무거나 먹지.'
밥상에 있는 반찬이래야 아침에 학생들 먹고 간 반찬 가지수 보다 훨씬 적은데 참 고민도 많이한다.
숲속에 혼자 살면 일곱 난장이를 분명히 찾아 다닐 것 같은 모습이다.
드디어 달래 무침에 손이 갔다.
"잘 먹겠습니다."
그녀는 밥 먹는 속도가 상당히 늦다.
음미하면서 먹기 때문이다. 나야 뭐 배고픈데 그런게 어딨냐?
계속 음미하쇼. 햄 조각은 내 차지다.
그녀는 칼로리가 많은 음식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으... 크르륵."
트림이 나왔다.
아직 공기의 밥을 반도 못 먹은 그녀 앞에서 대단히 큰 실수를 했다.
표정이 심상찮다.
"백수씨? 여자친구 없죠?"
"그래요 없어요."
"여자하고 밥 먹을땐 말이죠. 먹는 속도를 맞추어 줘야 하구요.
또 트림 같은 건 되도록이면 어디 가는 척 일어서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이에요.
저러니 백수에다가 솔로지. 쯔쯧."
참내. 우리집에선 내가 참 귀한 자식인데, 트림을 하던 배를 긁던 아무말 않던데...
집 나와서 설움 참 많이 받는다.
'야이 이뇬아. 나에게 너하고 나이 같은 여동생이 있다.
내 동생이었으면 넌 벌써 맞아 죽었다. 씨.'
"잘 먹었습니다."
"늦게 일어났으니까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씻어 놓고 가세요."
"학생들 그릇도 아직 안 씻었잖아요?"
괜히 따져 보는 것이지요. 항상 제 밥그릇은 제가 씻지요. 괜히 게기는 겁니다.
"이제 늦잠 자면 밥 없어요!"
"왜 나만 갖고 그러세요?"
"우리집 하숙 친 이후로 백수는 동엽씨가 처음이에요."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무이에요?"
"딴 이유가 필요해요? 그럼 만들죠 뭐."
"됐어요. 내가 아예 학생들 먹은 것 까지 다 설거지 할게요."
"그러세요. 그럼 난 음악을 들으며 커피나 한 잔 할까? 커피 한잔 할래요?"
"싫어요."
다소 쌀쌀하게 답을 했으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달래무침 한 줄기를
입에 넣고는 눈을 감고 음미하 듯 입을 야물거린다.
'하숙집을 확 옮겨 버릴까?'
그러나 학원에서 늦게 들어와도 밥을 차려 주는 하숙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오늘 집에 있을 거에요? 나영씨."
"우리 그이 찾으러 가야죠."
"그이가 있기는 있어요?"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백마 타고 올거에요."
하숙집 그녀는 공주다. 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공주다.
그녀는 꼭 오후가 되면 외출을 한다.마로니에 공원을 거닐다 오거나,
혼자 영화를 보고 오기도 하고 대형 서점을 찾아 책도 보고 온다.
요즘은 엄마따라 병원을 가서 대기실에서 고혹하게 앉아 있다가 오기도 한다.
오후에는 집에 있기를 싫어했다.
학생들이 하나 둘 하숙집에 돌아 오면 그녀는 외출을 준비한다.
그것이 일률적이지는 않았는데 이번 달 들어서면서 그녀는 항상
내가 학원을 갈 무렵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저녁상을 차릴 때면 돌아 오는 그녀가 요즘 어디를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경북궁 다니고 있나?
그녀에게는 아픈 추억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년이 지나던 해에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었다.
간혹 그 사람 얘기를 하는데 그리운 표정을 쉽게 읽을 수가 있었다.
무었 때문에 헤어졌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대충 짐작하기로 집안 사정때문인 것 같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사를 그녀가 모신다.
그녀는 시집을 가더라도 그러길 원하고 있다.
그녀가 사귀던 사람은 증손이다.
집안에 제사가 일년에 5개나 되는 장손 집안의 세형제 중 장남이라 알고 있다.
그것 때문에 다툼이 자주 있었다는 것을 그녀에게서 들어 알고 있다.
한시가 넘었다. 학원 갈 준비를 해야겠다.
어제 쓴 스토리가 강사님 마음에 들어야 할텐데... 내가 쓴 글이 아직 구성면에서
많이 서툴다고 말씀하시는 강사님이 오늘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주었으면 좋겠다.
방송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강사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니 그렇게 맘에 들지를 않는다. 너무 조급해 하지는 말자.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왔다.
그녀가 식탁에 책을 놓고 앉아 머리핀을 입에 물고는 머리를 올리고 있다.
그녀의 모습 중 가장 섹시한 모습이다.
눈동자를 들고 나를 쳐다 본다.
입술의 핀을 떼고는 묻는다.
"오늘은 언제 들어 올거에요?"
"알 수 없죠. 왜요?"
"또 밥 따로 차려요?"
"그래주면 좋죠. 아마 늦을 거에요."
"늦더라도 집에서 먹어요. 백수가 밖에서 밥 사먹는다고 돈 쓰면 그건 위선이에요."
구박이나 하지나 말지. 말은 저렇게 해도 밥 안 먹었다고 그러면 엄청 구박을 하지요.
"어머님은 안 돌아 오셨어요?"
"시장 봐 온대요."
"몸도 안 좋으신대 시장은 나영씨가 좀 봐오고 그래요."
"엄마가 좋다고 하시는 일이에요. 백수씨가 상관할 일이 아니죠."
"머리 다듬는게 어디 나갈 모양이네요?"
"저도 학원을 등록했답니다."
"학원에 취직 했어요?"
"배우러 다니는 거에요."
"잘 해 보슈."
그녀는 머리에 핀을 꼽고 있다.
오늘 엄청 깨졌다.
강사가 나보고 아직 멀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기죽지는 않을 것이다.
각오를 한 것이기에, 하면 된다,라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학원에서 알게 된 사람과 학원을 나오며 근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오늘 강사에게 모욕적으로 깨진 세명이 모여서 술을 마셨다.
나보다 나이가 두살 많은 아저씨와 나보다 한 살이 적은 아가씨하고 마셨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듯 아가씨와 아저씨는 마주 보며 술을 홀짝 거렸다.
아저씨가 아가씨에게 시비를 건 말을 내 뱉었다.
"요즘 드라마들 잘나가는 여자! 그 여자 방송작가들이 다 망쳐났어."
"어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가씨가 불만이 있어 보였다.
"맨날 삼각관계에다가 불륜에다가 남자 앞에서 질질 짜는 여자들 모습이나 그리지 암.
너도 그럴거면 때려 치우고 시집이나 가."
"뭐에요? 남자 작가들도 그러는 사람 많아요. 그리고
작가들 보고 그렇게 쓰라고 하는 연출자는 남자에요."
이것들이 나는 쳐다 보지도 않고 저네들끼리만 얘기를 하고 있다.
졸라 열 받는다.
"주부층이 주된 시청자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여자가
여자를 잘 안다고 인기 끄는 작가들이 여잔인 것은 어쩔 수 없죠 뭐."
나는 잘 모르면서 끼어 들어 봤지요. 전혀 나에게 관심을 안 두는군.
그럼 니가 써 새꺄. 쓰지도 못하는게 말은 잘한다.
"그게 아니라니까. 파워 좋은 여자 작가가 연출자를 맘데로 바꾸는 세태여.
발전이 없어. 맨날 그게 그거야. 여자들 머리에서 나오는게 빤하지 뭐."
"뭐에요? 여자가 뭐 어때서요?"
"내가 말이야. 방송 드라마 작가가 된다면 굵직한 남성 드라마를 쓰고 싶어.
그리고 연출자에게 다 맡길거야. 이래라 저래라 안한단 말여."
"써요. 누가 말려요? 시청율이 일퍼센트 넘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뭐 방송으로 나가지도 않겠지만..."
"뭐여? 니가 오늘 씹혀도 나보다 열배는 더 씹혔어. 실력도 없는게..."
아저씨하고 아가씨하고 말이 오고 감이 심장치 않다.
아직 구성 작가 단계인 것들이 유명한 작가 이름 다 들먹여 가며 서로 씹고 있다.
둘이 사귀는 것 같기도 하다.
서로 다투는 듯한 모습이지만 꼭 건배를 하고 술잔을 비운다.
잘해봐라. 년하고 놈아. 나 간다.
난 얼매 안 마셨으니까 너네가 계산해라.
"어디가? 계산은 같이 해야지."
참내 갈려니까 관심을 주네.
"화장실 좀 가려구요. 얘기하고 계세요."
지하철 역의 화장실에서 소변을 봤다.
'으으... 시원하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다 되어 갔다.
밥을 사먹자니 먹을 만한 데가 없고 들어가서 밥 내놔,라는 소리는 하기가 어렵겠고...
굶자. 패스를 끊어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사람들 모습이 밥을 굶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하숙집으로 들어 갔다.
신발이 하나, 둘, 셋, 넷. 아직 한 놈 안들어 왔구나. 꼴등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 하숙집 그녀가 식탁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식탁의 밥상은 이미 치워져 설거지 까지 다 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영씨!"
"네."
"들어가서 자세요. 여기서 뭐 하는 거에요?"
"인제 들어 왔어요?"
"네."
"밥은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차려 주게요?"
"안 먹었죠? 잘됐다. 이것좀 봐 주시겠어요?"
"뭔데요?"
"찌게요. 밥 줄테니까 한 번 먹어봐요."
식탁에 앉았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고 밥까지 놓았다.
반찬은 달래무침과 김치하고 시금치 뿐이었다.
고기 반찬은 학생들이 다 먹었나 보다.
찌개가 놓여졌다. 팔팔 끊는 찌개 냄새가 참 좋다.
"나 밥차려 주려고 여기 있었던 거에요?"
잘못하면 감격 할 뻔 했다.
난 진짜 그녀가 오늘 나에게 밥을 차려주려고 식탁에서 찌개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녀를 사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냥 '네.'라고 답해 주었으면 말이다.
"착가하지 마시구요. 오늘 학원에서 배운데로 만들긴 했는데
차마 학생들에게는 못 주겠더라구요. 한 번 먹어 보세요."
"요리 학원 다녀요?"
"네. 엄마가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 것 같아서요."
찌개 맛이 그런데로 좋았지만 오만쌍을 다 찡그리고 그녀를 쳐다 봤다.
"이게 찌개에요? 내가 눈감고 발로 끓여도 이것보다는 잘 끓이겠어요."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을 줄 알았던 그녀가 날 말없이 쳐다 본다.
너무 자존심을 건드린게 아닌가 싶다.
밥숟갈 한번 밖에 안 떠 먹었는데, 그녀가 찌개 그릇을 들고 가버린다.
그리고 싱크대 한쪽에 부어 버렸다. 아까웠다.
저럴 줄 알았으면 다 먹고 말하는건데, 잘못했다.
밥 숟갈을 들고 그녀를 쳐다 보았다.
"밥 다 드시고 치워놓고 들어가세요. 난 자러가야 겠다."
나를 못마땅한 듯 혀를 한 번 차고는 그녀는 자기 방으로 들어 갔다.
다음에도 저런 걸 부탁하면 다 먹고 하고 싶은 말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고는
달래 한 줄기. 시금치 한 줄기. 김치 한 조각으로 밥 한공기를 비워야 했다.
그래도 밥을 먹었으니 다행이다.
내가 밥을 다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오늘 마지막 녀석이 들어 왔다.
"형이 설거지 해요?"
"그렇게 됐다. 넌 밥 먹었냐?"
"아니요."
"찌개 없어. 그냥 굶어라."
"그럴거에요."
짜식이 아주 당연한 듯이 대답을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 갔다.
요즘 하숙생들 정이 없어 보인다.
나때는 늦게 들어와도 아줌마한테 인사도 하고 '또 밥 주세요'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하고 했는데... 삭막하다.
그래도 이 하숙집은 주방이 실내에 있고 주인과 같이 살기 때문에 좀 낫다.
아예 여관식으로 지어 가지고 자유만 추구하고 대인관계는 무시한 하숙집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옆방에 누가 사는지 한 학기가 지나도 모르는 하숙집에는 사람의 정이 없어지고 있다.
싱크대에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찌개의 냄새가 좋다.
내 방에는 가구가 없다. 그래도 비싼게 많이 있다.
25인치 티비, VTR, 그리고 컴퓨터, 음악을 듣기 위한 미니 콤포넌트.
티비와 비디오는 극본 구성을 위해 자료를 시청하기 위해 필요하였고,
컴퓨터는 글을 쓰기 위해 필요했다.
가구가 없는 이유는 옷도 별로 없고 이불은 그냥 펴놓으면 된다.
옷은 컴퓨터 위에도 놓을 수 있고 티비 위에도 놓을 수 있다.
빨리 내 방 문의 잠금 장치를 고쳐야 겠다.
내가 방으로 들어 왔을 때 벗어 놓은 옷은 헹거에 걸려 있었고
이불도 개어져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다.
하숙집 아줌마 아니면 그녀의 소행인데 그녀가 그랬다면 쪽팔리기 때문이다.
명색이 그래도 여자인데 나만의 공간을 보여주기가 부끄럽다.
밤이 깊어 나는 머리를 쥐어 박으며 졸음을 쫓고 글을 쓴다.
오늘 강사가 씹은 부분을 곰곰히 들여다 보았다.
씨, 나는 괜찮은 거 같은데. 이러다가 각본은 언제 써 보나, 앞날이 걱정 된다.
느는게 담배요. 커피다. 담배 한 갑으로 하루를 버티는 게 힘이 든다.
커피 믹스 한 박스는 일주일을 못 버틴다.
괜히 작가 한다고 집 나와 가지고 일찍 죽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심히 걱정이 된다.
대충 글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래도 또 엄청 깨질 것 같다.
모르겠다. 배째라 그래.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가 넘었다.
자야겠다.
내일도 그녀가 방문을 홱 열어 버리면 내 대 들것이다.
쫓겨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눈을 떴다.
그녀가 내 방문을 두들기기 전에 일어 났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다. 그녀가 내 꿈속에 나타났었다.
묘한 기분이다. 솔직히 기분이 야릇한게 좋다.
"쾅! 쾅! 백수씨 밥 먹어요."
에이. 꿈에서 봤던 그녀의 좋던 기분 다 깨졌다.
빨리 추리닝이라도 하나 걸쳐야지. 추리닝은 어디 간겨.
"잠깐만요."
"왜 안나오는 거에요? 어머나!"
그녀가 문을 또 홱 열었다.
'너 솔직히 아침마다 내 이런 꼴 보고 싶은거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추리닝을 찾다가 오늘처럼 이렇게 처참하게 내 빤스만 입은 꼴을 들킨 것은 첨이다.
다른 날은 그래도 이불 속에 있었거나 이불을 보듬고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완전히 쇼윈도의 마네킨처럼 뻔히 서서 보여 줬다.
"그 문 좀 홱 열지 말라니까요."
"노크 했잖아요."
내 나중에 복수 할 겁니다. 두고 보자.
내 벗은 모습이 보고 싶은지 계속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쫓아 내고는
추리닝 대신으로 바지하나 걸치고 나왔다.
오늘도 식탁 옆에 작은 밥상을 놓고는 그녀는 공주처럼 앉아 있었다.
내 밥그릇이 놓여져 있는 걸로 봐서 굶기지는 않을 모양이다.
왠일로 내 밥을 퍼 놓았을까. 식탁 위도 치워져 있었다.
"어머님은 오늘도 병원 가셨어요?"
밥상 앞에 앉아서 아까 팬티차림 들킨게 어색해서 물었다.
"네."
그녀는 나를 보지 않고 파릇한 냉이 무침에 젓가락을 갖다 대며 답한다.
북어국이다. 내 밥그릇 옆에 북어국이 있다.
내가 어제 술 마신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 같이 좀 다니고 그래요."
"백수씨 때문에 못 따라 갔잖아요."
"그럼 아침에 좀 깨워요."
"일어날 자신 있어요?"
"없어요. 그건 그렇다치고 잠금장치 좀 고쳐줘요."
"잠옷 없어요?"
말을 말자. 내가 고치던지 해야지. 북어국이 시원하다.
그녀는 또 고고한 척 먹은 밥을 손으로 가린 입을 야물거린다.
그녀가 국을 한 술 떠 먹고는 묻는다.
"북어국 괜찮아요? 내가 끓였거든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고개를 한 쪽으로 약간 젖힌 채 날 보고 있다.
밥이 아직 남았으나 국그릇을 들고 남아 있던 국을 벌컥 다 마셔버렸다.
"내가 이만기하고 씨름하면서 끓여도 이것보다는 잘 끓이겠다."
그렇게 말하고 상을 잡았다. 상 엎어 버릴까봐서.
그녀가 국을 한 숟갈 떠서 먹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아무말 없이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가 먹던 달래랑 냉이를 같이 먹으며 남아 있던 밥을 비웠다.
"설거지 할 거죠?"
"늦게 일어 났으니까 해야 겠죠 뭐."
"잘 아시네요."
놔 두세요 오늘은 제가 할게요, 이 말을 언제쯤 그녀가 할까?
그 말 하면 내 진짜 감격한다.
"설거지 다하고 빨래도 좀 걷어 오세요."
돌아가시겠다 진짜.
내가 하숙을 하는 건지, 그녀 집에서 밥 얻어 먹는 대가로 식모살이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집 말고는 밤에 밥 얻어 먹을 만한 하숙집이 없을 것 같다.
자취를 하면 굶어 죽을 것 같고, 설거지를 다하고 옥상으로 갔다.
학생들 빨래는 셀프다.
우리 하숙집 욕실에는 커다란 세탁기가 있다.
학생들 옷은 각자 빨아서 자기 방 앞에 있는 테라스에서 말린다.
옥상에는 그녀와 아줌마의 빨래들만 있다. 몇 번 내가 빨래를 걷어 다 준적이 있다.
그녀의 속 옷이 걸릴 만도 했지만 아직 그런 기회를 접해 본 적은 없다.
하기야 공주가 아무곳에나 그런 걸 내 걸리 없다.
앗! 오늘은 속 옷이 있다.
참으로 낯익은 추리닝 옆에 걸린 또한 참 낯익은 칼라 사각팬티와 허연 난닝구. 혈압이 땡긴다.
"이봐요. 나영씨."
"왜요?"
급하게 돌아 와 붉은 얼굴로 그녀에게 소리쳤지만 그녀는 참 담담한 표정이다.
언제 커피를 끓였는지 찻잔을 식탁에 놓고는 가계부를 펼치려다 나에게 아주 뻔뻔한 얼굴을 돌렸다.
빤스를 손에 쥐고는 보여 주었다.
"이거 나영씨가 빨은 거에요?"
"지금 성희롱 하는 거에요?"
"네?"
"세탁기가 빨았어요. 내가 미쳤다고 그걸 빨아요."
"그럼 빤스가 날개가 있어서 빨래 줄에 가 걸렸어요?"
"내가 가져다가 세탁기에 넣었어요.
어떻게 속 옷을 돌돌 말아 비디오 장식장에다 넣어 놓을 수 있어요? "
저렇게 대담하게 나오니 할 말이 없네요. 왜 내 옷을 빨았대요.
"제 방에 왜 들어 온 거에요?"
"비디오 보러요. 그 재밌는 비디오 있으면 혼자 보지 말고 같이 좀 봐요."
"비디오 봤어요? 제 방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거에요?"
"이 하숙집의 주인 딸로서 전 모든 방에 들어 갈 수 있는 특권이 있어요. 모르셨나요?"
"잠금 장치 고쳐줘요. 빨리."
"직접 고쳐요. 동엽씨가 고장 낸 거잖아요."
"앞으로 제 방에 있는 물건 손대지 마세요."
"치. 기껏 빨아 줬더니... 나도 이제 아니꼬와서 그 방 안들어간다."
왜 불쌍한 표정 지으면서 날 보는데요.
그녀가 아주 귀여운 눈망울을 슬프게 위장하고 날 쳐다 보고 있다.
그 모습을 외면한 채 빨래를 들고 아무말 없이 내 방으로 들어 왔다.
내 이불은 또 언제 개어 논겨. 밖의 그녀가 괜히 떠 올랐다.
꿈 속의 그녀의 느낌은 좋았던 기억도 생각이 났다.
그녀가 내가 없을 때 내 방에 들어 와 비디오를 보곤 한다.
혼자 있는 하숙집이 심심하기도 하겠다.
그녀가 안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뭐.
"밖에 나영씨 있어요?"
개어 놓은 이불위에 앉아서 밖의 그녀를 불렀다.
"왜 부르는데요."
"딴 거 손대지 말고 그럼 비디오만 봐요. 알았어요?"
"알았어요."
괜히 말했다.
고맙다는 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에그 학원 갈 시간까지 이렇게 이불에 기대어 잠이나 자자.
잠이 들었다고 생각 될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쾅! 쾅! 나 지금 나갈거든요. 혹시 엄마 오면 내가 장 봐가지고 온다고 전해 주세요."
안에서 내가 뭘 하는지 전혀 생각 안하고 단지 저렇게 쾅쾅,대고는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는 그녀가 참 대견스럽다.
나는 저렇게 뻔뻔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잠 다 깨 버렸다. 씨.
그래도 그녀는 착한 여잡니다. 어머님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녀는 어머님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공주고 나를 아주 하찮게 대하지만 착한 여자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녀는 살림도 잘 할 거 같아요.
우리 하숙집에 그녀 좋아하는 놈 들 많지요.
애인 없는 놈들은 다 그녀를 좋아 하고 있지요. 단지 연상이라는 게 흠이지만.
그녀가 밥은 참 잘하는데 요리 실력이 없어요.
요즘 아줌마가 몸이 안 좋은 관계로 그녀가 밥을 차리는 경우가 많아요.
하숙생들이 반찬을 외면하긴 하지만 불평은 안 하더라구요.
모두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나도 그녀를 좋아 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이상형을 들어 보면 나하고는 전혀 맞지를 않더군요.
포기를 했지요.
그리고 아웅다웅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머님 오셨어요."
"응. 총각 혼자 집에 있었어?"
"네."
학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하숙집 아줌마가 돌아 오셨다.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시다. 아줌마는 고혈압 때문에 심장 질환이 많으시다.
요즘은 나다니시는 것도 힘이 드시는지 얼굴에 땀이 고이셨다.
그녀가 발령이 나면 하숙치기가 힘들 것 같다.
내년에도 그녀가 발령이 안 났으면 좋겠다.
"나영씨가 시장 봐 온다고 하던데요."
"그래. 총각 일 봐."
아줌마는 힘없는 모습으로 방으로 들어 가셨다.
내가 괜히 걱정이 된다.
오늘도 깨졌다. 강사새끼가 씹는게 취미인가 보다.
드라마 보면서 좀 배우랜다.
요즘 드라마 어떤게 인기인지 보면서 경향을 파악하라며 날 졸라 씹었다.
'씨바. 이 학원 아니면 갈 데 없는 줄 알어?' 생각해 보니 갈데가 없다.
등록금 낸 것도 아까웠다.
아직 구성작가인데 드라마 봐서 뭐하나...
드라마 작가되기 힘들다.
작가로 등록된 사람은 700여명인데 제대로 활동하는 사람은 20명 안팍이라고 들었다.
지금 심정은 이년안에 700명 안이라도 들어갔으면 좋겠다싶다.
한번 씹힐 때마다 미래의 하루 하나가 걱정으로 변한다.
하숙 -3

오늘은 학원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매일 하숙집에 늦게 들어가는 것이 미안했다.
학원에서 알게 된 그 총각, 처녀가 날 붙잡았지만 일단 외면을 했다.
일단 그들이 술 마시자는 유혹은 이겨냈다.
그러나 집으로 오는 길에서 맡은 돼지 갈비의 냄새의 유혹은 이겨 낼 수가 없었다.
지갑에 돼지 갈비 몇 인분은 사먹을 돈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학원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으나 저녁때는 훨씬 지났다.
에라 모르겠다.
냄새가 나는 식당으로 들어 갔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도란도란 모여서 술 한잔에 이야기 하는 모습이 분위기 있어 보였다.
"아줌마. 여기 돼지 갈비 2인분하고 밥 주세요."
2인분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먹다가 일인분을 추가 시켰다.
다 먹고 나니 배가 상당히 불렀다.
기분이 좋다.
날씨도 따뜻하고 배도 부르고 난 행복한 놈이다.
"다녀왔습니다."
하숙집에 도착하니 열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냥 내 방으로 들어 가도 되겠지만 그래도 기분으로 주인 아줌마 방에 노크를 하고 내가 왔음을 알렸다.
"그래."
아줌마의 목소리는 그렇게 힘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집안에 제법 익숙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내 방으로 들어 갔다.
옷을 갈아 입고 내 앞날을 위한 비디오나 한 편 볼 생각으로 앉았다.
"똑. 똑."
"누구세요?"
"저에요. 나영이."
"왠일로 쾅쾅,이 아니고 똑똑,이에요? 무슨 일인데요?"
들어 오라는 말은 안했는데 우리 하숙집 그녀는 문을 홱 열고는 모습을 드러 내었습니다.
귀여운 소녀같이 웃는 그녀의 미소는 제법 사랑스런 모습이다.
"밥 안 먹었죠?"
"예?"
밥 먹었다고 말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미소 지으며 특별히,라는 말 때문에 차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조용히 식탁으로 와요. 내 오늘 특별히 맛있는거 해 놨거든요. 나도 아직 저녁 안 먹었어요."
무슨 특별한 걸 해 놓았을까. 식탁으로 나갔을 때 그녀는 밥 두 공기를 퍼 놓고 있었다.
한 공기가 다른 한 공기에 비해 유난히 많다.
"무슨 특별히 맛있는 것을 맛있는 것을 해 놓았는데요?"
적은 밥이 담긴 그릇쪽에 앉았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앉은 쪽의 밥그릇을 다른 쪽의 밥이 많이 담긴 그릇으로 바꿨다.
과연 저걸 먹을 수가 있을까 싶다.
그냥 밥 먹었다고 말할까도 생각을 했는데 기껏 차려주는 밥을 거절했다가 정작 배가 고플때 못 얻어 먹을까바 참았다.
"오늘 기분으로 고기를 좀 샀죠. 돼지고기라서 좀 그렇지만 학원에서 얻어온 양념을 잘 재웠어요."
그녀가 가스렌지에서 들고 온 냄비 속에는 갈비찜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배가 불러서 행복했던 기분이 갑자기 사그러 들었다.
"이거 혹시 나만 주는 거에요?"
"그렇긴 한데 착각은 하지 마세요.
그냥 백수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누가 그러길래 주는 거니까요.
감격해 하는 것 정도는 봐 줄수 있어요. 맛있게 드세요."
내 앞에 앉은 그녀를 쳐다 보았다.
날 무끄러미 쳐다 보는게 얄밉게 느껴졌다.
아주 지능적으로 날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 먹고 뭐해요?"
"시간이 늦었는데 이거 먹으면 살 안쪄요?"
"나요? 그래요 나 조금만 먹을테니까 동엽씨 많이 먹어요. 치사하다 진짜."
먹기 싫어 한 말인데 반응이 잘 못 왔다.
지금 내 배는 아주 풍만한 상태다.
여기서 더 먹었다간 풍만함에 지쳐 터져버릴 것도 같았다.
밥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삼키기가 어려웠다.
도저히 먹을 자신이 들지 않았다.
"나영씨."
"왜요?"
맞은 편에서 밥을 조금 떠서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그녀가 날 쳐다 보는 모습이 현재까지는 밝다.
"나 지금 돼지 고기 먹으면 안되는데요."
"왜요?"
그녀의 표정에 조금 의외라는 듯한 감정과 조금 기분이 나쁘다라는 감정이 섞여 들어있다.
"몸살 감기가 온 것 같거든요."
"괜찮아요. 그럴수록 많이 먹어야 돼요. 백수가 아프기 까지 하면 안되지요."
그놈의 백수라는 말은 꼭 들어 가는구나.
오늘 왜 내가 집에 오면서 밥을 사먹어 가지고 이런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지금까지 늦게 들어 왔다고 밥을 차려 주지 않은 적이 없겄만 왜 그랬을까?
그녀의 미소가 솔직히 좋다. 깨기가 싫었다. 꾸역 꾸역 먹었다.
"맛있어요?"
솔직히 맛있는지 없는지 상관이 없다.
그냥 다른 기분좋았던 때를 생각하며 억지로 먹고 있으니까.
"네."
"다음에 내가 양념해서 한 번 만들어 줄테니까 오늘 이 맛 잘 기억해 두었다가 비교해 주세요."
"네."
이 놈의 밥그릇은 도대체 얼만큼의 밥을 담고 있는 것일까?
진짜 힘겹다.
그래도 내가 이 밥을 비워 가고 있는 것은 내가 착하기 때문일까?
포기를 했다고 생각한 그녀에게 아직 관심을 많이 두고 있기 때문일까?
밥을 다 먹었다. 하지만 아직 고기는 남아 있다.
그녀도 밥공기를 비웠다.
고기를 나보고 다 먹으라 할 것 같다.
그녀가 그 말을 할까봐 두려웠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냥 내가 설거지를 할테니까 동엽씨는 들어가서 쉬세요."
"예. 그럼 전 이만."
움직이기가 버겁다.
과하면 체한다. 이말을 실감했다.
내가 베스트 작가가 되어서 돈을 왕창 벌어도 과하지 않게 어려운 백수들 도와주고 해야 겠다.
체하지 않게 말이다. 방으로 가지 않고 화장실로 가서 아까 식당에서 먹은 고기까지 토해 냈다.
그녀가 토하는 소릴 들을까봐 조심스럽게 토해 냈다.
토하면서 생각해 보니 그녀가 나한테 참 잘해 주는 것도 같다.
왜 나만 고기를 해 준겨?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녀가 치운 식탁에 앉아 가계부를 적고 있다.
날 보지 않는다.
굳이 말을 건네기가 그렇다.
그냥 방문을 열었다.
"동엽씨?"
"네?"
뭐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괜히 놀랐다.
그녀가 해 준 음식을 토해 냈다는 것이 나에게 약간은 죄책감을 주었나 보다.
"부탁하나 해도 되죠?"
"네."
아직도 날 쳐다 보지 않는다.
뭔가를 적으며 부탁을 말하는 그녀는 공주는 아니더라고 상류층의 자세가 되어 있다.
"들어 줄 거에요?"
"뭔데요?"
"다음주 화요일날은 목욕도 좀 하시고 열한시 안에 집에 오세요."
내가 목욕 잘 안하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늦게 들어와도 열한시를 넘겨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게 부탁이에요?"
"그때 다시 부탁할게요. 하여간 그 부탁할 것의 전제 조건이니까 꼭 그래 주세요."
"알았어요."
다음주 화요일이면 사일이 남았다.
부탁하면서 전제 조건을 다는 그녀를 존경스럽게 한 번 쳐다 보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토하고 나니까 속이 쓰리다.
글 구상을 위해서 비디오를 보다가 그냥 잤다.
속이 쓰리긴 했지만 잠에는 장사가 없다.
햇살이 좋은 것이 꿈 꾸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시계를 보았다. 12시에 가까웁다. 목이 뻐근하다.
내 꿈을 꾸기에는 늦은 시간인가?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고 몸도 피곤하다.
오늘은 10시간을 넘게 잤다.
뭐여, 왜 안 깨운걸까?
생각해 보니까 우리 하숙집 그녀가 날 이 시간까지 자게 놔 둔 적이 있었나 싶다.
어그적 밖으로 나왔다.
깨끗이 닦여진 식탁.
그리고 그 옆에 밥 보자기로 씌워져 있는 그녀의 밥상.
"나영씨!"
그냥 아침에 그녀 모습이 안 보이는 것이 허전했나 보다.
별로 찾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 번 불러 보았다.
"나영씨! 이 나영. 야이 나영아. 나영이 어디 갔냐?"
하숙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나 밥 굶는겨? 그건 아니었다. 그
녀의 밥상에는 밥이 예쁘게 차려져 있었다. 참 예뻤다.
내 밥이 아닌 것도 같았으나 분명 거기에 있는 쪽지로 봐서 내 밥이 틀림 없었다.
그녀는 하숙생들 밥을 차려 주고 난 다음 어머님과 병원을 갔다.
왜 날 깨우지 않았을까?
내가 밤 늦게 까지 글쓰고 하는 것을 알고서 그랬을까?
그랬다면 참 고마운 여자다.
'국은 냄비에 있으니 데워 드세요.'
작은 것에도 세심한 면이 있다.
괜찮은 여자네.
그러나 맨날 백수라 놀리는데... 하여간 잘 먹겠슴다.
거의 매일 그녀의 눈치를 보던 이 밥상에서 나 혼자 밥을 먹을려니 참 편했다.
다리 쭉 펴고, 배까지 긁어 가며 또한 트림도 맘 놓고 할 수 있었다.
그 좋구먼... 그래도 그녀가 있으면 하는 맘도 있다.
하숙 - 4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하숙집 아줌마가 돌아 오셨다.
그러나 그녀는 없었다.
"어머님 오셨어요?"
"응. 신군이 설거지를 하는구먼."
"아침에 안 좋으셨어요?"
"그건 아닌데. 그냥 요 며칠 소화가 안된다고 말했더니 영이가 부득이 아침에 같이 가자고 해서. 별 거 아니야."
"어머님, 빨리 좋아 지셔야 할텐데요."
"그래. 영이 저걸 봐서라도 그래야 할텐데 계속 안 좋네. 그 설거지 내가 할테니까 신군은 들어가."
"아닙니다. 제가 할게요. 들어 가 쉬세요."
하숙집 아줌마의 이마에 땀이 고였다.
그녀는 어디 간겨?
모시고 갔으면 또 모시고 와야 되는 거 아닌가?
좀 헛갈린다 말이야.
어제 글 작업을 못했던 관계로 오늘 오후는 책 보면서 구상 연습을 해야했다.
책에다 줄 긋는다고 뭐구상하는 것이 달라 질 것은 없었지만 미래를 위해 작문 연습도 틈틈히 해 놓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신 경숙이라는 소설가도 작가와 전혀 별 관계없는 어느 전문대를 나와서 떨어지는 문체를 많은 책들을 베껴 쓰가며 다듬어 갔다고 했다.
나도 뭐 언제 글을 써 봤냐.
줄 그어 가며 베워야지.
에이 씨. 줄 긋는 것은 좋은데 왜 담배가 없는겨.
상관 없는 불만인가? 하여간 불만 있다.
먼지 낀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그 햇 빛 속에 번지는 담배 연기, 풋풋히 썩어 가는 곰팡이 냄새가 나는 어느 골방에서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이 멋있는 작가의 입에 물린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 꽁초.
그리고 명작을 쓴다.
근데 이놈의 하숙방 창은 맨날 누가 닦는겨?
깨끗하다. 그리고 내가 방을 지저분하게 쓰지만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는다.
턱수염? 어제 면도 했는데 턱수염은 무슨... 코 털이 좀 삐져 나와 있을래나?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담배가 떨어졌다.
추리닝 차림으로 우리 하숙집 어떤 놈의 농구화를 꼽쳐 신으며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따스하다.
내 얼굴이 부시시 할 것이고 머리 모양새가 그리 단정하지 않을텐데... 그리고 이 시간에 내 나이 또래가 추리닝 입고 담배 사러 가면 짤없이 백수라고 생각 할 것이다.
뭐 백수를 백수라 생각하는데 뭐라 그럴 수 있나.
담배 파는 수퍼가 좀 멀리 있었다.
담배 한 갑을 샀다.
기분으로 그 앞에서 한 대 폈다.
음 그래 이맛이야.
집으로 천천한 걸음으로 하늘도 한 번 보고 퇴교하는 초등학생들에게 인사도 해 주며 걷고 있는데 누가 날 불렀다.
"백수씨."
아무리 내 지금 모습이 백수처럼 보여도 그렇게 대 놓고 말하면 기분 졸라 나쁘지.
실 내 주위를 살폈다.
지나가던 초딩이 날 멀뚱히 쳐다 봤다.
"내 이름이 백수야."
씩 웃어 주고는 뒤 돌아 봤다.
아주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 하숙집 그녀를 보았다.
햇살 아래 그 모습이 화사하다.
바람에 산들거리는 주름 치마사이로 하얀 다리가 참 곱다.
저 공주가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아는 체 하기가 그랬을 터인데 아주 반갑게 날 아는 체 했다.
물론 이유가 있었겠지. 그녀는 장을 봐 왔다.
양 손에 뭘 많이 들었다.
분명 저걸 나에게 맡기려고 날 불렀을 것이다.
확 도망을 가 버릴까? 낼 아침부터, 아니다 당장 오늘 밤부터 밥이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로 갔다.
그래 내 들어 줄 것을 당연히 생각했나 보다.
아예 짐을 내려 놓고 날 기다리며 한 발자국도 앞으로 오지 않는 그녀는 진찌 존경스러운 상류층 사람이다.
"들어 드려요?"
"으음."
단지 그녀의 입을 열지도 않고 내는 그 소리와 고개 숙임으로 나는 그 무거운 것을 들어 주어야만 했다.
이 여자 힘이 장산겨? 이걸 어떻게 들고 왔남?
그녀를 아래 위로 꼬아 봤다. 옆에서 빈 손으로 걷는 그녀가 웃는다.
그렇게 자주 웃지 마요. 정 붙으니까.
"그 백수란 소리 안 할수 없어요?"
"동엽씨 백수 맞잖아요."
이 뇬이 진짜.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웃는 얼굴이라서 참았다.
놀리는 웃는 얼굴이 아니라 그냥 좀 사랑스런 웃는 얼굴이라 참았다.
그래 이렇게 걷는 것이 기분 좋다.
니도 백수니까 날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
학원에서는 또 꿈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하는 강사와 씨름하며 오늘 하루 분량의 과정을 끝 마쳤다.
책을 많이 읽어라고 했다.
나보고 특히 그랬다.
나보고 고등학교 때 국어 점수를 물어 보았다.
그냥 답을 안했다.
말하면 분명 놀릴 것 같아서 말이다.
내일은 주말이라고 또 술 먹으러 가자고 그 년,놈들이 꼬셨으나 그냥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 내일은 주말이다.
뭐 하나? 확 우리 하숙집 그녀를 꼬셔다가 영화나 보러 갈까?
같이 가 주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비디오나 봐야지 뭐.
하숙 -5
주말이라서 좋은 것은 오후가 좀 여유롭다는 것이지 뭐 별 다른 느낌은 없다.
왜? 난 백수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왠일로 일찍 일어나 학생들과 밥을 같이 먹었다.
학생들은 별 신경을 안 썼는데 하숙집 그녀가 날 의아한 눈빛으로 자꾸 쳐다 보았다.
내게 국을 떠 주면서 이상한 말까지 했다.
"사람이 변하면 몸에 안 좋다던데..."
"누나. 저도 국 좀 더 주세요."
내 옆에서 밥 먹던 녀석이 국을 더 달랬다.
그녀가 밥 이외의 음식 중에서 그런데로 맛있게 하는 것이 있다면 우거지 국.
그래 아침에 먹는 우거지 국은 속을 개운하게 한다.
"니가 퍼 먹어."
저거 하숙집 경영하는 집 딸 맞냐?
그래도 내 옆의 녀석은 싫은 표정 짓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녀석이 먹던 국 그릇을 가져간다.
그렇게 긴 머리는 아니지만 싸구려 핀이지만 단정히 꼿고 또한 싸구려 주름 치마에 단추 달린 스웨터가 참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아침을 준비 한 그녀가 녀석들에게는 예쁜 누나임에 틀림없다.
그래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국을 퍼는 그녀의 뒷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녀가 국을 떠와 내 옆 녀석에게 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말을 거는거야.
"백수씨, 세수는 했어요."
씨바 취소다.
나 혼자 있을 때 백수 소리 하는 거 참을 수 있다 이거야.
그러나 이렇게 청중이 많은데서 꼭 아픈데를 긁어야 한단 말인가.
"안했어요."
먹던 밥을 뺏어 가는게 어딨냐. 진짜 저거...'너 씨 울 동생이었으면 벌써 맞아 죽었다.'
"세수하고 와요."
"나도 세수 안 했는데."
내 옆에 있던 그 녀석이 말했다.
"넌 빨리 밥 먹고 니 방 가."
차별 대우 심하다. 학생은 세수 안해도 밥 먹을 수 있고, 백수는 꼭 세수를 해야 밥을 주는겨?
밥 먹기 위해서 세수를 했다.
코피가 흘렀다.
뭐 힘든 거 하는 것도 아닌데 코피가 흘렀다.
코피를 물로 씻으며 거울을 봤다. 나이 든 모습.
막막한 그림자가 끼어 든 내 얼굴은 그렇게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벌써 덤성 치솟은 턱수염들.
아직 코에는 피가 멈추지 않았지만 씩 웃었다.
그래 웃자. 지금 내 신세가 조금 처량해 보일 지는 모르지만 난 꿈을 꾸고 있다.
세월이 흐른 뒤 뒤돌아 봤을 때 웃을 수 있도록 이 생활을 꾸미자.
코 끝에 있는 피를 닦고 피가 흐르지 않자 욕실을 나왔다.
다시 식탁으로 갔다.
내 옆의 녀석은 밥을 다 먹고 자기 방으로 가 버렸다.
식탁에는 한 명만이 남아 있었다.
내 자리에는 그녀가 뺏어 갔던 밥 그릇이 다시 놓여 있었다.
밥솥 앞에서 밥을 퍼고 있는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내 자리에 앉았다.
국이 참 시원하다.
얼라리요?
"왜 내 옆에 앉아요?"
"내 맘이에요."
그녀가 퍼고 있던 밥은 자기 밥이었다.
그 밥그릇과 국그릇을 들고 와서는 내 옆에 앉았다.
"나영씨 밥 늦게 먹잖아요."
"우리 하숙집에 밥 늦게 먹는 사람이 있어서 그랬어요."
"이번엔 백수가 아니라 사람이네요?"
"내가 옆에 앉은게 불만이에요?"
"불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영광이지요. 암 공주랑 같이 먹는데..."
"그럼 나에게 감사하는 맘으로 맛있게 먹어요."
그래 그녀에게 농담이 통할리 없지.
마마 맛있게 드시오.
모르겠다.
내 옆에 그녀가 앉으니까 조심스러워 지기는 하지만 기분은 좋다.
"커억."
앗 실수다.
나도 모르게 트림이 나왔다.
그녀가 날 째려 보았다.
겁난다.
"저러니까 여자 친구가 없지."
그녀는 아주 고풍스럽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다.
"잘 먹었습니다. 내가 설거지 좀 도와줘요?"
"됐어요. 내가 할테니 동엽씬 쉬세요."
어이구. 내 이름을 그래도 알긴 아네.
아침에 밥을 먹으니까 속 쓰린게 없어서 좋다.
오전에 방에서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비디오를 봤다.
구상 연습으로 보는 비디오라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졸았다. 벽에 기대어 베개를 껴앉고 졸았다.
"쾅! 쾅!"
그녀구나 싶다.
"왜요?"
"커피 타 줄테니까 비디오 같이 봐요."
"커피 벌써 타왔죠?"
그녀가 뭐 물어 보고 커피 탈 그런 사람이 아니다.
뻔히 커피 들고 와서 노크하는 것이 틀림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 그렇게 두손에 뭘 들었으니까 문을 바로 홱 못 열었지.
"문 좀 열어 줘요."
그녀는 커피 두잔을 가지고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이제 뭐 별 신경 안 쓴다.
"뭐 봐요?"
"몰라요. 재미 디따 없어요."
"다시 돌려서 봐요."
거절하면 또 뭐라 그러겠지.
반도 더 본 비디오 테잎 다시 앞으로 돌렸다.
"커피 들어요."
"그래요. 잘 마실게요."
주말의 여유로움과 커피라... 싫지는 않다.
커피 먹으면 누가 잠 안 온다고 했을까?
처음 볼 때도 수면제 같았던 비디오. 잠이 쏟아 졌다.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있다.
졸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또렷한 눈동자로 비디오를 감상하고 있다.
저게 재밌을까? 다시 졸았다.
"동엽씨?"
자다가 그녀가 부르길래 깼다.
"어깨에 머리 좀 치워 주실래요?"
옴마나! 내가 졸다가 그녀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계속 티비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
고개를 바로 세우고 다시 졸았다.
"그렇게 잠이 와요?"
좋은 꿈 꿀수도 있었는데 또 그녀가 깨웠다.
눈을 떠 보니 아까와 반대편으로 머리를 숙인채 침까지 조금 흘리며 졸고 있던 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참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다 봤어요?"
"네."
"잼 있던가요?"
"볼 만 하던데요."
"상류층 영환가 보네요."
"네?"
"아닙니다."
"흠. 잘 봤어요. 점심 안 먹어요?"
"하숙집에서 점심은 안 주잖아요. 나 잘래요."
"라면이라도 먹을래요?"
"허! 참."
"왜 웃어요?"
"그냥요."
그래 웃음이 나온다.
왜 웃음이 나왔냐 하면은 자꾸 저런식으로 나에게 친한 척 해 주다가 내가 자길 좋아하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저럴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사랑스럽다.
라면까지 먹으니까 잠이 더 온다.
그래 자자.
내일은 외출을 해 볼까? 무슨 일로? 목욕이나 할까?
그녀가 부탁한 일도 있고 그래 내일은 목욕이나 가자.
하숙 ㅡ6

새벽에 아무도 몰래 하숙집을 빠져 나왔다.
일찍 자니까 일찍 일어나진다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다.
새벽 어둠이 물러 가고 있다. 일요일 이른 아침의 분위기는 여유로움이랄까?
뚜렷하지 사람들의 영상에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이 보인다.
"어허!"
에헤라 좋다. 물이 깨끗하다.
목욕탕 내의 사람들이 아직 많지 않다.
발가 벗은 채 삶의 표정이 잘 나타나지 않는 대중탕 내의 사회는 아주 평등하다.
물안개 쌓인 이 곳에는 말이 많이 없어졌다.
평등하지만 아주 개인적이다.
때를 다 밀고 등 밀어 줄 사람을 찾았지만 없다.
이 곳도 평등하지 않았다.
저 배 나온 허연 아저씨는 때밀이가 등을 밀어주었다.
그리고 안마까지 해 주었다.
사우나실에서 땀 빼면서 깔려 있던 수건에 등 붙여 밀고, 으...
냉탕에서 개 헤엄 한 번 치고 나왔다. 시원하다.
목욕탕을 나왔다.
밝은 아침 공기, 어허! 개운하다.
내 삶도 이렇게 개운해졌으면 좋겠다.
일요일 아침도 사람들의 걸음 걸이는 빠르다.
선명하게 드러난 사람들의 영상에는 오늘이 일요일이지만 여전히 바쁘다는 것이 보인다.
그래도 나는 천천히 걸었다.
우리 하숙집이다.
꿈이 있고 미소가 스미는 곳이다.
밥 짓는 냄새가 여기서 맡을 정도다.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하숙집 그녀 혼자서 만들고 있다.
아줌마가 많이 편찮으신가? 아니면 그녀가 혼자 하겠다고 우긴 것일까?
하여간 익는 밥 냄새가 곱다.
"어휴, 아침 일찍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 백수가..."
또 그녀가 시비를 건다.
냄비에 국 끓인 찬들을 넣고 있던 그녀가 빼꼼이 내가 들어 옴을 보더니 말을 걸었다.
"그 아침에 좋은 말로 인사 좀 해 주면 어디 덧나요? 헛갈리게 말이야."
그녀가 씩 웃었다.
"그래. 어디 갔다 왔어요? 머리가 젖었네."
"수영하고 왔지요."
"그래요? 저기 새로 생긴 수영장 갔다 왔어요?"
"뭐 거기서만 수영할 수 있나?"
"나도 수영이나 배울까? 언제 한 번 같이 갈래요?"
허허. 같이 갈래요? 요즘 들어 그녀가 같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내가 만만한가? 아니면 좋은 건가?
정말 그녀 데리고 수영이나 하러 갈까?
그렇지만 오늘 내가 갔다온 곳은 여자가 못 가는 곳인데...
"밥이나 해요. 나 목욕하고 왔어요. 남탕 갈 자신 있으면 같이 가고."
그녀가 날 빤히 쳐다 보며 말을 못하고 있다. 이겼다 하하.
학생일때가 좋다.
오늘 아침 식탁에서 학생들의 모습에는 새벽에 본 영상이 들어 있었다.
졸린 눈을 뜨지 못하고 하품을 하며 식탁으로 나온 녀석도 있었으나 삶에 찌든 모습은 아니다.
그래 이 하숙집에 찌든 모습은 없다. 나도 답답함은 있으나 아직 삶에 찌들지 않았다.
음악을 틀어 놓고 긍정적으로 앞 날을 생각 해 보았다.
그래 해 보자.
짧은 글 하나를 지어 볼 생각이다.
아자! 아이 캔 두 잇.
"쾅! 쾅!"
앗, 방해자다.
우쒸, 글 좀 써 보려고 다짐을 했는데 방해자가 나타났다.
"뭐해요?"
"글 씁니다."
"바빠요?"
"글 씁니다."
"약속 같은 거 없죠?"
"글 씁니다."
"나랑 같이 어디 좀 갈 수 있어요?"
"글 씁니다."
"맛있는 거 사 줄게요."
"어디 가는데요?"
아, 글 써야 하는데. 요즘 식욕이 당겨서 탈이다.
"시장 가는데."
"어제 장 봐 왔잖요."
"반찬 사러 가는 거 아니에요. 뭐 살게 좀 많아요."
"그래서 내 짐꾼 되어 달라구요."
"으응."
한 번쯤 그냥 빈말이라도 나하고 같이 걷는 게 좋아서, 아니면 그냥 같이 가고 싶다,라는 대답 해 주면 어디 덧 날까?
"뭐 사줄건데요?"
"뭐 먹고 싶은데요?"
"스테이크요."
"현철아!"
"걔는 왜 불러요?"
"차라리 걔 데리고 가려구요."
"그럼. 슈퍼 슈프림 피자요."
"현철아!"
씨바. 진짜 그녀석하고 가라고 그래 버릴까 보다.
"알았어, 순대요."
"좋아요. 내 특별히 찹쌀 순대 사 줄게요."
집에서 입는 추리닝 말고 밖에서 입어도 좀 덜 쪽팔리는 패션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 다녀 올게요."
"내가 말한데로 잘 보고 사와야 돼. 아무래도 불안하네. 같이 가자니까."
"염려 마세요. 짐꾼도 있는데요 뭘."
그녀가 엄마에게 인사하는 걸 들었다.
짐꾼? 백수보다는 낫네.
"신군이 같이 가려나 보네."
하숙집 아줌마가 방에서 나오셨다. 잘 몰랐는데 손을 좀 떠신다.
"네."
"그럼 잘 다녀 오게나."
하하. 그녀가 내 옆에서 걷는다.
허리까지는 분명 아가씬데 무릎 밑에까지 흘러 내린 주름 치마는 아줌마 복장 같다.
뭘 보나 이사람아.
"왜 웃어요?"
"치마 하나 사 드려요?"
"동엽씨가 왜 내 치마를 사줘요?"
"맨날 그 치마잖아요."
"이게 편해요. 그리고 나 백수에게 치마 받아 입을 정도까지 옷 없질 않으니까 염려 마세요."
괜히 말했다. 무안하다.
말 없이 걸었다.
나중에 짐이 무거워도 들어 주지 말까 보다.
"삐쳤어요?"
"백수는 안 삐칩니다."
"삐쳤구나?"
"삐쳤으면?"
"장난으로 치마 사 준다고 한 것 아닌가?"
"아무리 장난으로 말했다고 그렇게 답하면 서운하죠."
"그럼 미안해요."
저 상류층 여자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장 볼게 무거운가 보다.
일요일 점심때가 못 된 이른 시간이지만 시장은 활기가 있었다.
재래 시장은 그 만의 맛이 있다.
저거 보면 알기나 할까? 내 보기에는 똑 같거만 그녀가 뒤적거린다.
"그게 뭐에요?"
"냉이도 몰라요?"
"그럼 그 옆에 것은 뭐에요?"
"고사리잖아요."
그녀가 풀 종류를 제법 많이 샀다.
저걸로만 반찬을 만든다면 내 단식 투쟁할 것이다.
어물전으로 갔다.
그래 생선도 사야지.
그녀가 제법 큰 생선을 들고 한참을 들여다 본다.
진짜 뭐 보면 알고 저러나, 의심이 간다.
"그건 뭐에요?"
"도미잖아요. 동엽씨 아는 거 뭐 있어요?"
그녀가 상당히 비싼 도미를 한마리 떡하니 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죽은 물고기들을 샀다.
내가 들고 있는 짐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건어물전으로 가서 문어 다리도 사고, 돌아 다니면서 깨끗한 과일과 대추도 샀다.
"제사 지내요?"
"으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누구 제사요?"
"우리 아빠요."
"언젠데요?"
"모레요."
아 그렇구나.
그건 그렇다 치고 밥 때가 훨씬 지났다.
배는 고프고 들고 있는 것은 점점 무거워 졌다.
"다 샀어요?"
"거의. 대충 오늘 살 것은 다 샀어요."
"잘 됐다. 배고파 죽겠어요."
"저기 김밥하고 순대하고 파는데 있어요."
아, 집하고 반대 방향이다.
그래도 먹고 나면 힘이 좀 생기겠지.
그녀는 부피는 크지만 졸라 가벼운 풀이 들은 봉지만 들고 있다.
그렇게 빨리 걸으면 내가 잘 따라 갈것 같냐?
순대랑 김밥이 꿀 맛 같다.
나 꿀 별로 안좋아 하는데...
맛있다는 소리지.
그녀가 좋은 미소로 나를 쳐다 본다.
"동엽씨?"
"왜요."
"화요일날 일찍 와 줄수 있죠?"
"그런다 그랬잖아요."
"제사 때 남자가 없으니까 영 허전하더라구요."
"하숙집 애들 많잖아요."
"걔들은 동엽씨랑은 좀 틀려요."
"뭐가요?"
"하여간, 내가 제사 지내는 동안 옆에 좀 서 있어 주세요. 엄마도 동엽씨가 옆에 서 있으면 마음이 편할 것도 같거든요."
"알았어요. 뭐 힘든 일도 아닌데."
"고마워요."
그녀가 나를 보며 조금 안스런 미소를 짓고 있다.
눈빛이 참 맘에 든다.
이 집 김밥 참 맛있다.
아까 미소로 보아 내가 들고 있는 짐 하나 정도는 자기가 들어 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녀는 풀 봉지만 들고 걷고 있다.
거기다가 빨리 갔으면 하는데 가다 말고 양복점 앞에 떡 서버렸다.
"동엽씨 잠깐 따라 들어 와 봐요."
내 짐이 지금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나 할까? 멋있는 옷들이 참 많다.
나도 양복이 있다.
봄, 가을 양복 한 벌, 겨울 양 복 한 벌. 최소한 단벌 신사는 아니다.
그래도 옷들을 보니까 괜히 하나 쯤 더 있었음 하는 생각이 든다.
근데 여긴 왜 들어 온겨?
그녀가 넥타이 진열대 앞에 서 있다.
넥타이들을 찬찬히 고르고 있다.
"동엽씨 이리 와 봐요."
짤래 짤래 그녀 앞으로 갔다.
그녀가 넥타이 하나를 고르더니 내 목에 갖다 댄다.
양 손에 뭘 들고 있는 나는 두 손을 움직일 수 없다.
멀쭘히 그녀가 하는 짓을 쳐다만 봤다.
"이 색깔이 우리 아빠가 젤 좋아하던 색깔이에요. 동엽씨는 어때요?"
"좋네요."
"그래요?"
"아저씨 이거 얼마에요?"
그렇게 빨리 가버리면 또 쫓아 가기 힘들지.
손가락이 끊어 질 듯 하다.
그녀는 뭐가 좋은지 얼굴이 참 밝다.
난 죽겠는데...
하숙 7편

하숙집에선 주인 아줌마와 그녀가 아까 사가지고 온 생선들을 다듬고 있다. 치마를 모으고 앉아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성스럽게 생선을 다듬는 그녀의 모습이 참 여자답다. 괜시리 그녀가 좋아지네. 그렇지만 그녀와 난 신분이 다르다는 걸 상기하자. 상처 받기 싫으면 말이다.
오후가 깊어 간다. 별로 하는 일도 없지만 일요일 오후는 가슴이 아프다. 지는 해가 참 서글프게 느껴진다. 그래서 일요일 오후는 외롭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외롭다.
티비에서는 프로야구 중계를 하고 있다. 엘쥐하고 오비하고 하고 있다. 나는 당연히 엘쥐 팬이지...(왜? 이 글 쓰는 놈이 엘쥐 팬이기 때문이다. 이 글 읽는 사람중에 혹시 오비팬이 있는 줄 안다. 이제부터 오비를 좀 씹겠다.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음. 하기야 지금은 두산으로 바꼈지 참.) 대전에 있던 촌놈들이 괜히 서울로 올라와 가지고 참내. 유니폼 봐. 졸라 컨추리 하네. 일요일 오후에 이렇게 나만의 공간에서 프로야구 보는 것도 괜찮다.
그래 여유를 찾자. 니가 그렇게 안타를 쳐버리면 내가 속상하지. 여유 좀 찾자는데... 상황이 심각하다. 점점 승부는 오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똑, 똑."
"누구세요?"
"이집 주인 딸인데요."
딸이라야 자기 하나면서 노크 할 때마다 자신을 칭하는 용어가 참 다양하다.
"왜요?"
"좀 쉬려구요."
"쉬는데 왜 내방을 노크하는데..."
그녀가 들어 왔다. 마치 자기 방이라도 되는 양, 들어 오라는 소리를 아직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들어 왔다.
"티비 보는구나. 진짜 불쌍하다."
"뭐가요?"
"일요일날 외출하는 꼴을 못 봤어. 오늘은 날씨도 참 좋은데..."
왜 앉아요? 편히 혼자서 야구 좀 보겠다는데...
"생선 절이는 것은 다 했어요?"
"네."
"어머님은요?"
"방에 들어가셨어요."
"여긴 왜 왔는데요?"
"심심해서요."
내가 심심풀이 너츠냐? 또 비디오를 보러 왔나 싶다. 비디오 그거 얼마나 한다고, 하나 사지.
"심심하면 남자 친구랑 데이트나 하지."
"헤어졌다고 했잖아요. 어머, 이젠 이런 말도 쉽게 나오네."
"쉽게 나오면 안되나요?"
그녀가 바로 나갈 것 같지가 않다. 치마를 훔치며 자세를 편하게 하는 폼으로 봐서 여기서 꽤나 놀다 갈 것 같다. 싫지는 않지만 난 글을 쓰지 않을 때, 생각이 없을 때는 혼자 있고 싶다. 그냥 아무것에도 의미를 주지 않고 지나는 시간을 옆에서 멍하니 구경하고 싶다. 혼자서 생각이 없을 때는 편하다. 아직 내 미래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생각이 없을 때가 편하다. 그런데 자꾸 하숙집 그녀가 방해를 한다.
"이런말 쉽게 나온다는 것은 그사람이 잊혀지고 있다는 것인데... 잊혀 지는 건 서러운 것이에요."
"아직 그래도 생각이 나나 보네요. 그런 말 하는 거 보면."
"어, 야구 하네. 야 오비경기다."
그래 내 말은 그렇게 씹어라. 티비와 내 모습을 차근히 번갈아 돌려 본다. 무슨 듣기 안좋은 말을 할 것 같다. 오늘도 아픈 곳 찔러 봐라. 아침에 시장도 같이 봐 주었는데 놀리면 가만 안 있을겨.
"예, 야구 좋아해요?"
"그럼요. 보아하니 엘쥐 팬일 것 같네요."
"네? 보아하니 엘쥐 팬이라니요?"
"백수들이 엘쥐를 좀 좋아하더라구요. 전 깔끔한 이미지의 오비를 좋아하지요."
또 놀렸다. 두 살이나 어린게 말끝마다 백수라 놀리며 맞먹는 것을 넘어서 아예 아랫사람으로 날 취급한다. 하기야 아랫사람으로 취급한 것이 어제 오늘 일이냐. 참을까?
"그래요? 남자한테 차인 여자들은 오비를 좋아하더군요."
"오비 선수들은 다 잘생겼으니까 좋아 할 수도 있겠죠. 주위에 남자한테 차인 여자들이 오비를 좋아하던가요?"
뭐여? 지 예기 하는데... 그래 난 그녀가 상류층 신분임을 간과했었구나. 그녀를 멀뚱히 쳐다 봤다.
"나영씨 기분 안 나뻐요?"
"뭐가요?"
"차였다는 말 애써 했는데..."
"나 얘기였어요? 그 사람과 나는 서로 맞지 않는게 있어서 헤어진 것이지 누가 차고 차이고 한 것이 아니에요. 굳이 누가 찼냐고 따지면 내가 그를 찬 것이겠지요. 그 사람 아직 날 못 잊고 있을걸요. 호호, 그럴거에요. 아, 날 놀리려고 한 말이구나."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은 들어 올 때처럼 밝지가 못하다. 계속 공격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냥 그런 그녀의 표정에 기분이 나쁘다. 씨.
"야호. 오비가 또 점수를 뽑았다."
오비 새끼들 뭐 이긴 거 거의 결정 났는데 또 점수를 뽑고 그러냐. 징한 놈들. 요 몇년 새 계속 시즌 초반에는 우승후보로 꼽히다가 끝에는 쌍방울 보다도 못하는 새끼들. 그래 얼마나 이기고 싶었겠냐. 어제, 그제 엘쥐한테 연패 한 거 내 알지. 근데 하필은 그녀가 있는데서 저러냐.
"안가요?"
"어딜요?"
"나영씨 방에요."
"야구 아직 안 끝났잖아요."
야구는 정규 방송 관계로 중계가 중단 되었다. 점수는 아홉점 차이였다. 그녀의 실실 웃는 모습이 참 얄밉다.
"오늘 저녁 반찬은 뭐에요?"
"뭐 먹고 싶은데요?"
"예? 지금 시간이 몇신데 아직 반찬 결정도 안했단 말입니까?"
"물어 보도 못하남. 그럼 나중에 봅시다. 나는 밥하러 갑니다. 오비가 점수 뽑는 거 더 봤어야 하는데..."
그녀가 일어서 내 모습을 보며 비웃고 나갔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그냥 아프다.
일요일 밤은 월요일 새벽으로 변했다. 조용하고 어두운 방안에서 책을 펴 놓고 컴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날리는 담배 연기 속으로 내 외롬과 고민을 날려버렸음 좋겠다. 커서는 아까부터 계속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 생각이 아플 땐 그리운 것이 떠 오른다. 외롬과 고민 속으로 더 깊이 빠져 들수도 있었으나 그리운 것을 떠 올리면 내 아픈 생각을 비켜 가게 해준다.
괜히 미소가 맺혔다. 뭐여? 왜 하숙집 그녀가 생각이 났는데 미소가 맺힌겨. 어라, 그녀가 자는 모습이 또 궁금하네. 혼자 있는 것 같은 밤에는 많은 것들이 내 생각을 스쳐 간다. 그녀와 함께 사는 집인데 그녀가 그리울리 만무하다. 스쳐가는 것이라 생각하자.
깜박 졸았다. 컴퓨터 모니터에 '나는 인기작가다.'라는 문구의 3D 글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스크린 세이버다. 그래 난 인기 작가가 되어야 한다.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자. 시계는 새벽 네시를 먹고 있다. 자야 겠구먼. 그래 내일의 인기 작가를 위해서 오늘은 이만 자자.
"쾅! 쾅!"
"왜요?"
"밥 먹어요. 나 오늘도 시장가야 돼요."
"안 먹을래요."
"굶으면 백수씨만 손핼텐데. 빨리 나와서 먹어요."
시계는 아홉시를 갓 넘겼다. 졸라 이른 시간이다. 추리닝을 껴 입고 나갔다. 아직 학교로 가지 않은 현철이란 녀석과 주인 아줌마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내 밥도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내 밥 옆의 밥은 그녀 것이겠지.
"어머님 잘 주무셨어요?"
"응 그래. 어여와 밥 먹어."
"네."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주인 아줌마가 그녀와 나란히 앉은 나를 보시며 옅은 웃음을 지으신다.
"오늘은 병원 안 가셔도 되요?"
"안가도 되는데 얘가 가라고 그러네."
아줌마가 그녀를 쳐다 보시며 답을 했다. 아줌마의 모습이 내가 이 하숙집을 처음 왔을 때의 모습보다 확연히 초췌하시다. 남이라면 남일텐데 괜히 걱정스럽다.
"어머님 혼자 가실거에요?"
"혼자가도 돼. 얘가 오늘은 바쁠거야."
"빨리 나으세요. 그래야 우리도 맛있는 반찬 얻어 먹지요."
일찍 일어 난 것이 억울해서 그녀에게 시비를 걸었다. 아무말 없이 밥 잘먹고 있던 그녀가 나 대신 맞은 편에 있던 현철일 쏘아 보며 말했다.
"맛 없냐?"
현철인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예전의 어머님이 주시던 국이랑 반찬 보다는 맛이 없잖아 임마.
"동엽씨 밥 먹기 싫어요?"
"안먹는다고 했잖아요. 괜히 깨워 가지고서리."
밥그릇하고 국그릇을 손으로 잡고 답을 했다. 일단 일어났으니까 밥은 먹어야겠기에... 아줌마의 모습에서 재밌다는 표정이 비추어졌다. 괜히 아줌마를 보며 웃어 주었다.
"그래, 나영이 하고 친하게 지내 주어서 고마워."
이런게 친한 것인가? 내 옆의 그녀의 표정이 정다워 보인다. 이렇게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괜찮다.
하숙집 그녀는 시장을 가고 없었다. 점심때가 지나서 아줌마가 병원 가실 채비를 하셨다. 아침을 좀 일찍 먹었더니 배가 고프다. 나가서 밥이나 먹을까,하고 방을 나왔다가 아줌마가 병원 가시는 걸 보았다. 걸음 걸이는 괜찮았으나 떠시는 손이 불아해 보였다. 학원을 좀 일찍 가지 뭐.
"어머님 병원 가시는 길이죠?"
"응."
"저랑 같이 가시죠. 어짜피 저도 학원 가야 하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려."
옷을 갈아 입고 학원 갈 준비도 마치고 방을 나왔다. 아줌마가 현관 앞에 앉아 계셨다.
"제가 병원까지 같이 가도 되겠지요?"
"허허, 괜찮겠어? 혼자 가도 되는데..."
아줌마의 걸음 걸이는 나보다 많이도 느렸다. 보조 마추기가 힘들었으나 내가 옆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 보다는 좋다라는 느낌의 아줌마가 지으시는 미소 때문에 싫지는 않았다.
"자네 같은 아들하나 있었음 참 좋겠다."
"아들 같은 따님이 계시잖아요."
"내 딸이 아들같아 보였나?"
"예?"
"하기야 좀 섬 머슴애같이 보이는 면도 있긴 하지."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따님이 아들 하나 쯤은 충분히 대신할 수 있는. 저같은 사내 보다는 훨씬 낫다는 그런 말이죠."
"말은 고마운데 자내를 너무 낮추지는 말게. 자네 놀고 있다고 어떨 때 보면 많이 기가 죽어 보여."
"그렇게 보였어요?"
"흠."
대답을 안 하시고 그냥 웃으신다. 딸도 내 말을 자주 씹는데, 내 나이가 저런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아직 어린가?
"병원에서는 많이 좋아지신다고 하던가요?"
"나 말인가? 내 나이가 뭐 좋아지고 그러지는 못하겠지. 그냥 더 안나빠지라고 다니는 거야. 영이 시집은 보내고 죽어야 될텐데."
"좋아지실 거에요. 그리고 나영씨야 뭐 곧 시집을 가겠지요."
"그래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가야 될텐데."
"좋은 사람 만날거에요."
"자네도 괜찮을 거 같은데."
"하하. 전 백순데요."
"기죽지 말라니까."
늦 봄의 따스한 햇살이 하숙집 아줌마의 이마에 내리고 있다. 나에게는 나지 않는 땀이 그 이마에는 많이도 맺혀 그 나리는 햇살을 먹고 있었다. 하하,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신다. 같이 걷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모습 너머로 그녀가 떠올려 졌다. 으이쒸, 또 미소가 맺혔잖여.
하숙 ㅡ8편.
아주머니를 병원에 데려 드리고 나는 학원으로 달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 즐겁다.
오늘 학원에서 별 다른 것을 배운 것은 없다. 단지 강사가 수필이든, 각본이든, 소설이든 아무 곳이나 공모하는데가 있으면 글을 써서 공모를 해 보라고 했다. 그 정도 실력 되면 내가 왜 학원을 다니남? 각본은 아직 쓸 줄도 모르는데... 각본 제대로 쓰는 것은 언제 갈쳐 줄겨?
공모해서 입상이라도 하게 되면 자기 캐리어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며, 또는 공모를 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면 그 만큼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에 글 실력이 부쩍 는다고 공모 같은 것에도 관심을 두라고 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때는 한 번 써 보지,라고 생각하며 흘려 들었다.
"신군!"
학원을 파하고 집으로 가려는데 그 아무래도 사귀는 것 같은 년,놈 중 놈이 나를 불렀다. 뭐 또 술 마시자고 꼬시려는 것이겠지.
"왜요?"
"내일 술 한잔 하자고."
"왜 내일 술 마실 걸 지금 말해요?"
"자네가 매일 일찍 집에 가 버리니까 그렇지."
"내일 무슨 일 있어요?"
"쟤 생일이래."
그 놈이 좀 떨어져 이쪽을 보고 있는 그 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요? 근데 왜 나하고 술을 마셔요? 저 아가씨하고 같이 마시지."
"너도 같이 마시자고. 다같이 아직 처량한 신세인데, 즐거운 날 한명이라도 더 있는게 좋잖아."
"그래요. 내일 봐요."
"선물도 사 와."
"나 쟤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내가 좋아하니까."
참내, 나 너도 별 안 좋아해. 이렇게 말하려다 참았다. 그래도 학원에서 친하게 된 몇 안되는 사람인데, 그리고 조금 힘든 삶에서 맞은 생일인데, 축하는 해죠야겠다. 뭘 사주지? 돈도 없는데... 그 둘이가 날 보며 웃어 주고 갔다. 웃어 주니까 좋네.
"내일 봅시다."
"그래요. 잘 가세요."
내 인사를 받아 주고는 그녀와 그 놈이 사라져 간다.
하숙 집안 냄새가 좀 그렇다. 생선 냄새 때문이리라. 거실 겸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참 오랫동안 그녀를 못봤다. 아침 먹고 그 후로는 계속 못 봤으니까. 그냥 들어 가려다가 아웅다웅해도 그녀 얼굴 한 번 보려고 내가 왔음을 알렸다. 맞다, 밥도 먹어야 된다.
"저 왔습니다."
내 기대대로 그녀가 자기 방에서 나왔다. 자다 일어 난 모습이다. 학생들 저녁 차려 주고 나서부터 잤었나 보다.
"이제 왔어요?"
"예."
기지게를 켜며 그녀가 하품을 한다. 긴 주름 치마에 조금 헝컬어진 머리 모양, 별로 상류층 사람 같지가 않다.
"밥 먹어야죠."
"차려 주시게요?"
"언제 안 차려 준 적 있어요? 저도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나중에 봅시다."
"그럽시다."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나왔다. 물론 집에 들어 왔으니까 씻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가 저녁에 학생들이 먹었던 찌개가 남은 큰 냄비가 아닌 작은 냄비에서 찌개를 떠 왔다. 감격하지 않는다. 예전부터 저랬으니까. 반찬들 몇 가지와 밥 그릇을 놓고는 그녀가 앉았다. 그녀가 지금 내 맞은 편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다가 그녀를 뚜러지게 보았다. 뭔가 보였다. 복수할 기회다.
"안 먹고 뭐해요?"
"좋은 말 할때 빨리 세수 하고 와요."
"예?"
"눈꼽 있어요."
그녀가 세수하러 갔다. 안 간다고 그랬으면 더 놀릴 수 있었는데 아무말 없이 세수하러 갔다. 난 그녀가 올 때까지 밥숟갈을 뜨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녀가 물기 있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 말씀 하셨다.
"이제 먹읍시다."
아무리 저렇게 입고 있어도 상류층 인사가 맞는거 같다. 앞으로 그녀의 외모를 보고 자신감 갖고 그러지 말자.
"오늘도 찌개 나영씨가 끓였어요?"
"왜 맛이 없어요?"
"아니요. 생각보다 맛이 있어서요."
"내가 끓인 것 맞아요."
생각해 보니 내가 오늘 점심을 안 먹었다. 그래서 좀 맛있게 느껴졌었나 보다. 물론 또 국그릇을 두손으로 감싸고 말했지.
"내 부탁 안 잊었죠?"
"예. 몇 시까지 오면 되요?"
"열 한시 이전에만 들어 오세요."
"제가 그렇게 늦게 들어 온 적이 잦았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요."
"알았어요."
허 참, 내일 학원 그녀의 생일이라고 했었는데 어쩐다. 뭐 11시까지 들어 오는 건데 뭐.
"양복은 있죠?"
"당연히 있지요."
"와이셔츠는 있어요?"
"당연히... 움, 참 있긴 있는데 내일 세탁소 갖다 주어야 겠다. 구겨졌걸랑요."
말 하면서 밥을 먹으니까 밥맛을 잘 모르겠다. 그녀야 어짜피 조금씩 품위 찾아 가며 먹으니까 말을 하던 상관이 없는데, 나야 한 웅큼씩 퍼서 먹으니까 말을 하게 되면 상당히 불안하다.
"그거 나중에 저 주세요. 다려 줄테니까."
"다림질 할 줄 알아요?"
그녀의 표정이 몹시 불만인 듯 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고마워요."
"예?"
또 내 말을 씹은 것인겨? 그녀는 꼭 불리하면 내 말을 씹는 것 같다.
"오늘 엄마 병원에 데려다 주었다면서요."
"아닌데요. 그냥 가는 길에 같이 동행했을 뿐인데요."
"나중에 셔츠 꼭 내 놓으세요."
"알았어요. 참 여자들은 생일 선물로 뭐 받으면 좋아해요?"
"어? 내 생일 다가 오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괜히 물었다. 모른 척 하는 것이 낫다.
"뭐 받고 싶어요?"
"음. 담에 가르쳐 드리죠. 내일 아빠 제산데 내 생일 선물 얘기하고 그러고 싶지 않네요."
"그러세요. 그래도 여자들은 뭐 받으면 좋아할까요?"
"그때 치마 하나 사 줄까요,라고 물었었잖아요. 그것도 괜찮겠네요."
니만 여자냐? 그녀가 입고 다니는 저런 치마를 학원 그녀가 좋아할까? 그래도 학원 그녀 때문에 하숙집 그녀의 기분을 좋게 했나 보다. 설거지 하면서 즐거운 음가락을 흥얼 거린다. 회사 퇴직하고 나서는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와이셔츠. 내 옷서랍을 열어 보니 세 벌이 나왔다. 왜 서글픈 웃음이 나오냐. 개어진 채로 오랫동안 있었던 탓인지 주름이 많이 가 있었다. 하얀 색으로 하나를 꺼내 이제 설거지를 끝 마친 그녀에게 갖다 주었다.
"제사 때는 하얀 색이 낫겠죠?"
"그래요. 뭐 와이셔츠가 색깔별로 있어요?"
"내가 작년에는 백수가 아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때가 그리워요?"
"생각 안 납니다. 하여간 잘 다려 주세요. 그거 꽤 비싸게 샀던 걸로 기억하니까."
"내일 드릴게요."
"그러세요."
또 혼자 된 밤은 새벽으로 이름을 바꾼다.
아. 어느 먼지 낀 골방의 백열등 아래서 밥상을 펴고 초췌한 모습으로 폐병까지 걸려 가면서, 폐병은 빼자. 하여간 그렇게 글을 써야 하는데, 나는 깨끗한 하숙방에서 인버터 스텐드를 켜놓고 초췌하기는커녕 회사 다닐 때 보다 훨씬 더 살이 찐 모습으로 책에 밑줄이나 긋고 있다.
담배 한 가피를 물었다. 어두운 방안에 그 불빛이 참 유혹적이다. 빨간 그 불빛. 주위를 밝게 하지는 못하지만 담배 불은 자신을 태우면서 참 붉다. 꿈으로 미래를 유혹하자. 새벽이 깊으니께 별 말이 다 떠오르네.
"쾅! 쾅!"
오늘은 늦잠인가 보다. 방 문 두들기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해님이 창 끝에 걸려 있다.
"일어 났어요."
밖으로 나왔다. 부침개 굽는 냄새가 참 좋다. 식탁 옆에 내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 그릇 하나.
"나영씨는 밥 먹었어요?"
"네.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 애들하고 같이 먹었어요."
"어머님은 병원 가셨어요?"
"네. 오늘은 오후에 저하고 같이 할 일이 많아서 일찍 가셨어요."
"제사 음식 만들려고 그러나 보네요."
"네."
대충 씻고 와서 밥상 앞에 앉았다. 냄새가 좋다. 그녀가 보지 못했던 전기 프라이팬을 식탁위에 꺼내 놓고 지금 부침개를 굽고 있다. 내 밥상 위에는 멀건 국과 풀들과 햄 조가리다. 고향에 계신 어무이, 나도 부침개 먹고 싶어요. 밥 숟갈을 들고 천천히 밥 공기를 비워 나가는 중이다. 냄새가 자꾸 나를 유혹한다. 아... 그 모습을 보았는지 그녀가 물었다.
"부침개 만든 것 좀 줄까요?"
"아니에요. 제사 음식인데 제가 먼저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요? 그럼 빨리 식사 하세요."
쩝, 아침이라 그런지 햄 조가리가 맛이 없다. 고향에 계신 어무이, 진짜 부침개 먹고 싶어요.
"줄 때 먹어요."
"괜찮다니까요."
아침부터 밥을 왜 이리 많이 준겨. 쩝. 입에 밥만 넣고 하숙집 그녀를 쳐다보며 어그적 씹었다.
"나영씨."
"왜요? 하나 드릴까요?"
"예."
맛있었다. 그녀가 만들었지만 맛있었다. 아니다 그녀가 만들어서 더 맛있었다고 해두자.
하숙집 실내은 제사 음식 차리는 모녀의 모습으로 아름답기도 하고 서글퍼기도 했다.먹는 걸 보지 못하는 지아비의 상을 차리는 아낙의 모습이 애처롭다. 그래도 냄새가 너무 곱다.
"다녀 오겠습니다."
"일찍 와요."
그러지요. 부침개 얻어 먹기 위해서라도 꼭 일찍 오지요. 그렇지만 오늘 하필이면 약속이 잡혀 있는 날이다. 학원을 가다가 여성 토털 패션점에 들렸다.
"뭐 보러 오셨나요?"
"치마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요?"
"그거 꼭 알아야 되나요?"
괜한 질문을 했다. 근데 저 점원도 좀 띨빵하다. 내가 뭘 고르지도 않았는데 그걸 먼저 물어 보는 것이 영 초보처럼 보였다.
"골라 보세요."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하숙집 그녀가 입으면 참 잘 어울리겠다 싶은 치마를 발견했다. 가격표를 봤다. 으아. 무슨 이런 천 조각이 이렇게 비싸다냐. 참 난 지금 그녀의 치마를 사러 온 것이 아니다. 우리 학원 그녀에게 치마는 도저히 선물 못하겠다. 치마 값이 다들 장난이 아니었다. 한 쪽에 진열되어 있던 작은 스카프를 하나 샀다. 이것도 어디여. 계산을 하고 토털 패션점을 나왔다. 근데 아까 본 치마를 우리 하숙집 그녀에게 선물 했으면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내일 통장에서 돈을 좀 뽑지 뭐...
햇빛이 점점 더워 지고 있다. 오후 속으로 한 사내가 뛰어 가고 있다. 그 사내는 나지요. 하하.
하숙 ㅡ 9편.

오늘 학원에서는 무슨 알지도 못하는 작가가 와서 강의를 했다. 그래도 작가라는 소리 때문에 유심히 들었다. 음,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구나, 근데 지금도 어려운 거 같아 보였다. 모양새가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잘나지는 않았다.
학원을 파하고 어두워지는 거리를 그 년,놈과 같이 걸었다. 학원 그녀의 모습이 오늘 많이 행복해 보인다. 그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세상이 아름답기 때문에 짓는 모습이리라. 태어난 날을 축하 한다는 것은 세상에 나온 것이 축복 받을 일이라는 것이겠지. 그래 세상은 살아 볼만 한 것이다. 근데 지가 태어난 날도 아니면서 놈도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둘이 사귀는 것 맞구만. 잘하면 작가 부부 나오겠네.
술 먹으러 가자면서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그 둘이가 들어 갔다. 첨부터 술 마시는 것이 부담 스러웠나?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어쭈 그래 니 둘이는 나란히 앉는다 말이지. 혼자 않은 내가 좀 초라하다.
"주영씨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둘이서 아주 잘 논다. 놈이 선물이랍시고 그녀에게 뭔 박스를 하나 떡하니 꺼내 놓는다.
"뜯어 봐도 돼죠?"
"그럼요. 하하."
"어머 내가 갖고 싶어 하던 향수에요."
저새끼 분명 향수라고는 샤넬 no5 밖에는 모르는 것 같다. 향수는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녀가 아주 그윽한 표정으로 향수를 뿌려 맡아 본다. 괜히 한 번 물어 봤다.
"그거 얼마 짜리에요?"
놈이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좀 쪼잔한 것 같다. 그냥 웃지요,라는 것도 모르냐.
"응. 십만원."
저 조그만 향수가 제법 비싸네.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저도 선물 하나 샀어요. 나에게도 관심 좀 가져줘요."
"그래요. 동엽씨도 감사."
"선물 주었으니까 밥은 공짜겠지요?"
"종석씨가 사준다고 했으니까 맛있는거 드세요."
그녀가 대답을 하면서 내 선물도 뜯었다. 놈이 나를 보는 눈초리가 심상찮다. 그래서 졸라 비싼 거 시키기로 결심했다.
"어머. 스카프가 참 예쁘네요. 감사해요."
"아저씨. 여기 티본 스테이크 둘하구요. 돈까스 하나 주세요."
놈이 아주 비겁한 표정으로 주문을 했다. 쪼잔한 놈아 사내가 돈까스가 뭐냐. 여자 사귈려면 돈이 많이 깨지는 거 이제 알았냐?
"전 미듐으로 해주시구요. 동엽씨는요?"
"전 팍 익혀 주세요. 그리고 밥으로..."
참 오랜만에 스테이크를 먹어 봤다. 우리집 그녀에게도 치마하나 떡 사주고 스테이크나 얻어 먹어 볼까? 하하.
놈은 진짜 쪼잔한 새끼였다. 그 주영씨를 먼저 밖으로 내 보내고 날 슬며시 불렀다.
"만원만 내."
"정말 너무 하네요. 여자한테는 십만원짜리 향수도 사주면서."
"야. 난 남자하고는 뽀뽀 안해. 나 돈 없어 진짜. 만원으로 스테이크 먹었으면 땡 잡은 거 아녀?"
"구천원 밖에 없는데요."
녀석의 의도를 알았다. 내 끝까지 감시하리라. 내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어야지.
밖은 어두워 있었다. 화려한 조명등 아래로 그것이 즐거운 듯 년,놈이 팔짱까지 끼면서 걸어 가고 있다. 좋아 보이기도 했다. 서로 감싸 주면 좋지 뭐. 그래도 오늘 둘이 뽀뽀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오늘 하숙집 제사다. 나보고 일찍 오라고 했었는데... 그냥 집에 가 버릴까? 하숙집까지 여기서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을 소비한다 치더라도 한 시간 이상 어울릴 수 있겠다. 그래 놀다 가지 뭐.
그들이 이상한 술집으로 들어 갔다. 바도 있고 테이블도 있는 호프집인지 칵테일 집인지 헛갈리는 좀 있어 보이는 술집이었다. 놈이 오늘 상당히 무리 하는 것 같다. 내가 돈 낼 것 같냐?
으 좋다. 너네들은 호프 마셔라. 난 칵테일이다. 벌써 두잔을 비웠다. 그 좋네.
"생일을 축하합니다..."
놈이 그녀의 생일을 위해서 웨이터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신청했었다. 그녀가 즐거워 한다.
"아저씨. 이번엔 올드 패션드 한 잔 주세요. 주영씨 덕에 오늘 칵테일 많이 마셔보네요."
놈이 또 비겁한 표정을 지었다. 날 데리고 온게 잘 못이여. 어라. 그녀도 이제는 나를 안 좋은 표정으로 보고 있다.
어. 좋다. 이 칵테일도 맛이 괜찮다. 둘은 매일 보면서 무슨 할 말이 저렇게 많을까. 문득 시계를 봤다. 열시가 넘었다. 앗!
하숙집 그녀가 생각이 났다. 오늘 제산데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급히 일어 섰다.
"왜 먼저 가려고?"
그녀를 쳐다 봤다. 홍조를 띤 모습에 옅은 미소가 베인 표정이 아무래도 놈이 키스하자고 하면 해 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 해라. 나는 가야 겠소이다. 하숙집 그녀가 떠 올려지니까 무진장 집으로 가고 싶다.
술기운에 그들이 지금까지 먹었던 술 값 다 계산 해버리고 나왔다. 그래 둘이 즐거운 시간 가지는데 내가 방해를 해서야 되겠냐? 내 오늘 기분 좀 냈다. 내가 계산 한 줄이나 알까? 내가 나가는데 놈이 날 배웅하는 척 따라 나왔다. 아주 비겁한 표정으로 말이다.
"고마워. 둘이면 다소 초라할 것도 같았는데 네가 있어 주어서 좋았다."
어라. 표정과는 다르게 아주 의외의 반응이다. 내가 계산 한 것을 알았을까? 모를텐데...
"다음엔 둘이만 만나요. 보니까 이제 충분히 친해 진 것 같은데."
"그래. 하하. 잘 가."
시간이 촉박하다. 내 입에서 술 냄새가 나겠지? 큰일이다. 그녀에게 잘 못 보이면 밥도 없는데... 밥만 먹고 집에 오는 건데 잘못했다. 그녀에게 밉보이기는 싫은데...
동네에 와서 캔커피를 하나 샀다.
"아저씨 저한테서 술 냄새 나요?"
수퍼 아저씨께 물었다.
"그렇게 술냄새가 많이 나지는 않는데 냄새가 참 고약하다."
"이게 칵테일 냄새에요."
아무래도 냄새를 그녀가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까스로 하숙집 앞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열 한시까지 십여분의 여유가 있었다.
"헉 헉!"
술먹고 뛰니까 참 힘들다. 술냄새가 나면 그녀가 실망 하겠지? 하숙집을 돌아 한적한 곳에서 그 아까운 칵테일 억지로 토해 냈다. 스테이크까지 나왔다. 힘이 쫙 빠졌다. 허허. 왜 내가 그녀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할까? 모르겠다. 밥 얻어 먹을려면 어쩔 수 없다. 커피를 한 잔 들이키고 입을 씻어 내었다. 어허라. 긴 한숨 한 번 쉬고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다녀 왔습니다."
그녀가 암말 않고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그리고 시계를 본다. 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네."
"좀 씻어세요."
"그럼요. 집에 들어 왔으니까 당연히 씻어야죠."
뛰어 왔던 탓인지, 그녀의 다소 쌀쌀한 표정에 겁이 난 것 때문인지 내 이마에 땀이 많이 고였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고 그녀는 다 만든 음식들을 챙기며 하숙집 아줌마의 방에다 대고 말했다.
"엄마. 이제 차려요."
다행히 술 냄새는 맡질 못했나 보다.
욕실로 가다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제삿상 차리는 모습을 보았다. 좀 미안했다. 모녀의 모습에서 괜히 미안함이 들었다. 일찍 들어와서 상차리는 것도 도와주고 하는 건데...
"쾅!"
"누구세요?"
어라 이것들이 있으면서 내다 보지도 않는다 말여?
"옆방 형인데 좀 나와."
"왜요?"
"이 하숙집 제사상 차리는데 좀 도와 주고 해라."
"아까 상 차리는 거 도와 줄려고 했는데 아직 시간이 안되었다고 했단 말이에요. 병풍내리는 것 하고 다른 거 많이 도와 드렸어요."
으이씨 또 미안해 지네.
"그래. 고맙다."
"형이 왜 고마운데요?"
그래 왜 내가 고맙다고 말을 했을까? 여기저기 씻고 머리까지 감고 내 방으로 돌아 왔다. 현철이라는 애와 아까 내가 불러 낸 애 덕분인지 제삿상이 재빠르게 제모습을 찾아 가고 있었다. 문을 활짝 연 하숙집 아줌마의 방안에 여덟자 병풍이 드리워져 있고 그 앞에 제사상이 차려져 있다.
방에 들어와 머리 손질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차분한 노크 소리였다.
"누구세요?"
"저에요. 와이셔츠 다려 났으니까 입으세요."
들어 올 줄 알았는데 그 말만 남기고 그녀의 다음 반응은 없었다. 문을 열어 보니 깨끗하게 다려진 와이셔츠가 방 문앞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제 그녀가 샀던 넥타이도 함께 있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넥타이를 집어 들며 멀뚱히 그녀가 들어간 방을 쳐다 보았다. 우리 하숙집 그녀가 너무나 고와서 오늘 밤이 서글프다.
까만 정장을 입고 방을 나왔다. 넥타이가 나에게도 잘 어울리나 보다. 그녀가 하얀 한복을 입고 서 있었다. 나에게로 와서 넥타이를 좀더 바르게 매만져 주었다. 단정히 매만진 머리 모양으로 그녀가 참 이쁘다.
"고마워요."
"뭘요?"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고맙다고 했다. 내가 술마시고 온 걸 알까. 또 좀 미안했다.
방에서 지금 그녀가 제사상을 마주하고 절을 하고 있다. 나는 그냥 옆에 서 있을 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방 한쪽 편에서 제사상을 보며 그저 앉아 있을 뿐이고, 아까 제사상 차리는 것을 도와 주었던 두 녀석은 방 밖에서 선채로 안을 들여다 볼 뿐이었다. 사람은 많은데 절을 하는 이는 여자인 그녀 하나 뿐이다. 왠지 분위기가 초라했다. 그녀가 시집을 가면 허! 과연 저 제사상은 누가 차리며 또 누가 절을 할 것인가?
그녀가 제사상에 술잔을 올리는 것을 도왔다. 내가 술을 따라 주었다. 그녀의 모습이 엄숙하면서 슬프다. 옆에 앉아 그 모습을 보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모습도 슬프다.
그녀가 또 절을 한다. 그리고 앉았다. 한 참 앉았다가 밥을 내 놓고 숭늉을 올렸다. 그리고 또 한참을 앉았다. 나는 그저 그 모습을 보며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일어 섰다. 그리고 다시 절을 올렸다. 내가 대충 안다. 이 절이 오늘 제사의 마지막 절인 것을... 멀쭘히 옆에 서있다가 그냥 나도 따라 절을 해 버렸다. 뭐 하숙집 아줌마 보고 어머님이라 부르는데 못할 것도 없다. 여자랑 아무 상관없는 남자랑 같이 절을 하는 것이 제사에서 많이 실례라는 것을 알지만 그녀의 모습이 왜 그렇게 많이 안타까왔을까. 그냥 같이 해 버렸다. 내가 잘 못한 것일까? 그녀가 절을 하고 일어 서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하면 안되는 거에요?"
"네?"
"내가 절한게 잘못한 거냐구요."
"아니에요. 고마워요."
뭘 또 고맙냐. 아까 제사상 차려 주었던 두 녀석들이 지금까지 자지 않고 저기 서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제삿상의 음식 때문이었다. 제사 끝나고 그녀가
"너희들도 들어와 먹고 싶은 거 좀 먹어."
이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참 많이도 쌓여 있던 부침개들을 한웅큼 접시에 담아다가 단지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차리는 거 못 도와 드렸으니까, 치우는 것은 도와 드릴께요."
"그러세요. 그럼 옷 갈아 입고 오세요."
"참. 이 넥타이 저 가져도 되는 거에요?"
"우리 집에 남자 넥타이 매는 사람 있나요."
"저 있잖아요."
"그래요. 가지세요."
그녀가 웃었다. 그래 웃는 모습이 참 잘 어울리는 그녀다.
하숙 10편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절 두번 한 것이 힘이 들었을까? 뛰어 온 것 때문에 힘이 들었을까? 하여간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이 들고 싶었다.
잠자리에 드는데 떠 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바로 우리 하숙집 그녀다. 오늘 그녀의 모습이 조금 슬퍼 보였고 또한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버지께 절 올리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감동도 있었다. 그녀가 준 넥타이가 마음 속 좋은 의미가 되었다. 확 그냥 좋아 해버릴까 보다.
다른 날 보다 일찍 잠이 들었었지만 일어 난 시간은 평상시와 별 다를게 없었다. 오늘도 그녀의 노크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밥 먹어요."
"몇 시에요?"
눈을 뜨지 못하고 일어나 정신이 없는 상태서 물었다. 10시라고 했다. 허허, 이 정도 시간에 그래도 아침을 꼬박 차려 주는 하숙집이 과연 몇이나 될까? 예전부터 쭉 생각해 온 것이지만 하숙집 하나는 잘 고른 것 같다.
그녀는 학생들이 아침을 먹고 난 식기들을 모두 설거지 한 다음 날 깨웠다. 식탁 위가 깨끗한데 그녀는 오랜만에 작은 밥상 위에 아침을 차려 놓았다. 밥 그릇이 두개인 것으로 보아 오늘 그녀와 마주 보며 아침을 먹겠다. 기분 좋다 뭐. 그녀는 가스 렌지 위에 국을 데우며 서 있었다.
제사 상에 놓였던 부침개들이랑 생선들이 밥 상위에 올라 와 있다. 어제 제사상 음식들이 오늘 학생들 아침 식탁위에 놓여 졌다면 저런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었을 텐데 신기하다. 천천히 걸어 상 앞에 앉았다. 아직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잘 잤어요?
"그럼요."
"어머님은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반찬 몇가지 만들고 국을 끓이시고는 조금 전에 다시 잠이 들었어요."
"오늘은 병원 안 가셔도 돼요?"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시겠데요. 의사가 매일 올 필요는 없다고 했나 봐요."
"좋아지시나 보네요."
"흠."
옅은 미소로 답하고 그녀가 국을 떠 가지고 와 상 앞에 앉았다.
"제사 음식을 많이 한 것 같지는 않던데."
"왜요?"
"아침에 학생들 반찬은 따로 했어요?"
"네. 제사 음식 싫어요?"
"아니요. 귀한 음식들인데 싫기는요."
"학생들한테 제사 음식 줄 수 있나요."
"그럼 저는요?"
"늦잠 잤잖아요. 그리고 동엽씬 절도 했구요."
"하하, 나영씨 아버님 제산데 제가 절한 것이 좀 걸리네요."
"괜찮아요. 여자 혼자 절한 것 보다는 낫죠 뭐. 근데 어떻게 절 할 생각을 했어요?"
"그냥요."
"그냥? 그럼 기분 나쁘죠."
"그럼 아버님께 절 올리는 나영씨 모습이 고와서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눈을 제법 크게 뜨고 날 한 번 쳐다 보더니 밥 숟가락을 들었다.
"그랬어요? 혼자 절하는 내가 가엽게 보여서 절했다고 했으면 기분 상했을텐데 내 모습이 곱다고 그래서 기분이 참 좋네요. 이왕 기분 좋게 해준거 한마디만 더 해 주세요."
"뭘요?"
"그냥 축하해, 한마디만 해 주세요."
"왜요?"
"그냥요."
"그럼. 축하해요 나영씨."
"감사."
그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수저를 들었다. 나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그녀가 절 하는 모습이 솔직히 좀 가엽게 보이긴 했다. 우리 집안은 명절 날 큰댁에 가면 절하는 남자만도 일곱명이다. 여자는 차례상 차려진 방에 들어 오지도 못하는데. 제사라고 시집 안 간 딸 자식 혼자서 절 올리는 모습이 어떻게 가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내가 먼저 밥을 다 먹었다. 국도 다 마셔 버렸고, 그녀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속도대로 조금씩 똑똑하게 씹어가며 식사를 하고 있다. 지금 일어 서면 뭐라 그러겠지. 그래 상 들고 갈 때까지 그녀 앞에 앉아 있자. 드디어 그녀가 밥을 다 먹었다.
상을 들고 그 긴 주름치마를 사박거리며 싱크대 앞으로 가는 그녀의 뒷 모습이 아까 그녀가 한 말 때문에 좀 가엽다. 그녀가 설거지를 하며 물 묻은 손으로 화장기 없는 얼굴에 내려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그녀는 분명 예쁘다. 교사가 되었더라면 아침에 곱게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고선 학생들 속으로 매일 외출을 하겠지. 저 정도면 분명 그녈 좋아하는 순진한 학생, 짖굿은 학생 참 많을 것 같다. 아무래도 치마하나 사줘야 겠다. 그런데 저렇게 수수해 보이니까 내가 그나마 말이라도 막 하지, 화장하고 좋은 옷 입고 하면 말 대꾸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왕 맘 먹은 거 사줘 버리지 뭐.
"나영씨!"
"왜요."
"허리가 어떻게 되요?"
"그건 왜 묻는데요."
"치마하나 사게요."
"예?"
"허리 사이즈를 알아야 치마 사 줄거 아네요."
"정말 내 생일 선물 사 주려고요?"
"예? 저번부터 무슨 생일 얘기에요? 나영씨 생일이 언제 인데요?"
"오늘이요."
그녀가 설거지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랜다. 무슨 아버지 제사 다음날 생일이냐.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는 저 여자 생일 축하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 같다. 오늘 미역국 끓인 게 다인 것 같았다.
괜히 신경 쓰이네.
아까 그래서 축하해,라는 말 해 달라고 했던 거였구나. 지금까지 봐왔던 그녀라면 '오늘 내 생일인데 뭐 없냐?' 이럴 줄 알았는데 의외다.
"진짜 생일이에요?"
"네."
"생일이면 뭐 약속 잡힌 거 있어요?"
"아니요."
"그냥 평상시처럼 지나칠 거에요?"
"그래야겠죠 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는 그냥 내 생일 없는 셈 쳤어요. 아빠 제사 다음 날 딸 생일이라는게 좀 웃기죠?"
"좀 웃기네요. 나영 씨 생일날 가족 전부가 많이 울었던 적이 있었겠어요. 쩝."
왜 오늘따라 그녀가 자꾸 안되어 보이냐. 막 잘해 주고 싶어 진다. 그녀는 그냥 웃다가 다시 싱크대로 고개를 돌렸다.
"허리가 얼마냐니까요? 내 봐둔게 하나 있단 말이에요."
"됐어요. 말이라도 고맙네요."
"진짜 사 줄게요."
"근데 왜 하필 치마에요?"
"치마 싫어요?"
"싫진 않지만. 동엽씨 수준으로 사 온 것을 입을 수 있을런지 좀 의문이 드네요."
"예? 백수라고 보는 수준도 떨어 질거라 생각지 마세요. 섭하네."
"그래요? 예전엔 24사이즈가 맞았는데 요즘 좀 찐 것 같아서..."
뭐여. 지 허리 사이즈도 모른단 말여? 그건 그렇고 내게만 맘에 든 것을 사왔다가 그녀가 맘에 안들어 안 입는다면 괜히 돈 낭비만 하는 거잖아. 그녀하고 외출이나 해 볼까? 시장 같이 갈때도 기분 괜찮았잖어.
"같이 갑시다."
"어딜요."
"치마 사러."
11편.
혹시나 그녀가 나하고 같이 나가기를 꺼려 하지나 않을까 조금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아주 당연한 듯 대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기분 좋아 해야 할까? 기분 나빠 할까? 고민이 되었다.
"그래 갑시다."
아까 그녀의 생일인 것을 모른채 축하해,라는 말을 했을때 지었던 미소는 어디로 간 것일까.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다. 좀 기쁜 표정 지어 주면 어디가 덧나냐.
"언제 갈까요?"
"엄마 주무시니까 지금 가면 좋겠는데."
"그럼 준비하고 나오세요."
"그러죠. 나는 안 입으면 안 입었지. 싸구려는 싫은데."
"알았어요. 근데 그 주름 치마는 싸구려 아닌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이건 집에서 입는거잖아요. 그리고 이것도 싸구려는 아니에요."
머리도 감고 면도도 하고 학원 갈때 보다는 좀 나은 모습으로 나를 꾸몄다. 그래 하숙집 그녀도 여자다. 데이트 하는 기분으로 설레며 외출복으로 갈아 입었다. 지금 나가면 학원 가기전에 다시 집으로 들어 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학원 갈 준비까지 겸해서 했다.
내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왔을 때 그녀가 젖은 머리를 말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아까 그녀의 모습과 변한 것이라고는 물기 묻은 머리칼과 세수한 얼굴 뿐이다.
"벌써 나갈 준비 다 한 거에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남자들은 외출할 때 편하군요. 좀 기다려요."
그녀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십분 가까이 지났건만 나올 생각을 안한다. 치마 하나 사러 가는데 무슨 시간을 저렇게 오래 끄냐.
"나영씨!"
"조금만 기다려요."
방안에선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드라이기 작동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 머리도 안 말렸나? 바깥 날씨가 좋아서 젖은 머리칼 하고 나가도 될 법 하다. 그냥 나오지.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은 지금까지 기다린 것 만큼 더 기다리라는 소리였다.
에구. 그녀가 보통 외출할 때 저렇게 오래 시간을 끌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자기 생일이라고 그러나. 상당히 짜증나게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가 나왔다.
"이제 가요."
"네? 네..."
갑자기 기가 죽었다. 그녀가 진짜 공주가 되어서 나왔다. 내가 이 집에 하숙하기 시작한 후로 사개월 동안 보아 온 모습 중에 가장 예쁜 모습이다. 여자는 진짜 꾸미기 나름인가 보다. 그녀가 이것 보다는 좋은 걸로 사 달라,라고 암시하는 좋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 큰일이다.
"안 가요?"
"예? 그래 갑시다."
정오를 갓 넘긴 초 여름의 날씨의 늦봄 색깔은 화려했다. 옆에 공주가 걷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콘크리트가 대부분인 이동네에서 간혹 비치는 초록빛이 내리는 햇살처럼 곱다. 오늘 햇살은 초록빛이다. 저번 시장 갈때의 기분과는 짐짓 다르다.
"평상시에도 그렇게 꾸미고 있으면 좋겠네요."
"그래요? 예뻐 보여요?"
"예."
"이렇게 꾸미려면 얼마나 귀찮고 불편한 줄은 줄은 모르죠?"
"그래도."
"안돼요. 안 그래도 나 좋아하는 사람들 많아서 걱정인데."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이번에는 그래도 드러낼 만 하다. 내 모습이 지금 어떨까 괜히 신경이 쓰인다.
"봐 둔 거 있다면서요?"
"네."
"어디 가는데요?"
"다왔어요. 저기 옷 집 보이죠?"
"꽤 괜찮은 메이커네요. 근데 백수가 돈이 어딨다고..."
"나 작년까지 백수 아니었다고 했잖아요. 자꾸 백수 그러지 마요."
"진짜 저기서 사 주려구요?"
"으흠."
그녀가 같이 있으니까 어제 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게 그 토털 패션점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제 보다 점원이 한 명 더 많다. 어제 나에게는 저렇게 꾸벅 절 하지는 않았는데 그녀와 같이 들어 선 오늘은 좀 무안하게 점원 둘이서 절을 했다.
나는 좀 무안한 듯이 들어 갔지만 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들어섰다. 역쉬.
"뭘 찾으세요?"
오늘은 점원이 제법 질문다운 질문을 했다. 그냥 그녀 옆에서 손바닥을 펼쳐 보인 채 그러니까 내가 고르겠다,라는 식의 답변을 한 다음 어제 본 그 치마가 걸린 곳으로 갔다.
"이쪽이 올해 신상품들이에요."
그녀가 날 쳐다 보며 물었다.
"어떤거에요? 봐 두었다는 것이."
치마들이 걸린 곳을 뒤져서 어제 봐 둔 치마를 찾았다.
"이건데요."
"의외네요. 동엽씨가 고른 것 치곤 상당히 괜찮네요. 색깔이 참 곱다."
그녀가 내가 고른 치마를 만지작 거리며 살펴 본다. 가격표를 보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눈동자를 돌린다.
"왜요?"
"좀 비싸지 않나요?"
"싸구려는 안 입는다면서요."
"고맙긴 한데 무리하지 않나 해서요."
"괜찮아요. 한 번 입어봐요."
"네? 이건 투피스 용 스커트인데. 나 지금 원피스 입고 있잖아요."
그녀의 옷차림을 보니까 저 치마를 입을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데 그러면 위가 허전하겠다 싶다.
"이 스컷에 맞는 브라우스랑 자켓을 같이 드려 볼까요?"
우리 옆에 있던 점원이 말했다.
"아니 뭐. 동엽씨 그냥 다른 거 사줘요."
그럴까? 근데 저 치마가 참 곱긴하다. 그녀가 입었음 하는 맘이 막 생긴다. 이왕 사주기로 했는데... 같이 입어 보고 치마만 사주면 되지 뭐.
"줘 보세요. 입어 봐요. 뭐 어때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그녀가 피식 한 번 웃고는 점원에게 자기 치수를 말했다. 그리고 점원이 가지고 온 옷가지들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 갔다.
"카드 되죠?"
"그럼요."
그녀가 옷을 갈아 입는 동안 지갑을 훔쳐 봤다. 현금이 충분히 있을 리 없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 그녀가 아까보다 더 큰 나라 공주가 되어서 나왔다.
"정말 잘 어울리네요."
잘 어울리긴 한데. 점원아 그렇게 팔고 싶은 티를 내면 안되지.
"동엽씨 괜찮아 보여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졸라 이쁘요.그러고 싶었지만 뒷 일을 생각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치마만 팔죠?"
"네."
그녀가 거울을 보며 옷 맵시를 살피는 동안 점원에게 속삭이 듯 물어 보았다.
"애인인 것 같은데 이왕이면 같이 사 드리세요. 어떻게 저렇게 입혀 놓고 치마만 사줄 수 있어요? 나 같으면 그러지 않겠다."
니가 사주냐? 그렇지만 점원 말이 맞긴 하다. 하지만 또 애인 사이는 아니다. 또 하지만 그녀가 입었던 옷을 딴 사람이 사가게 하기도 그렇다.
"다 얼만데요?"
"속닥 속닥."
씨이. 뭐 그리 비싸요. 바가지 아녀? 그렇게 외치고 싶을 정도로 가격이 많이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나를 보고 섰다. 웃는 표정이 입고 있는 옷이 상당히 맘에 들어하는 것 같다.
"맘에 들어요?"
"네."
미소 지으며 그녀의 표정이 참 보기 좋다. 아까 뭐 치마 하나 값이 너무 비싸지 않나,할 때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 지금 입고 있는 것 중에 하나라도 뺏으면 상당히 열 받을 것 같다.
"그럼 그걸로 사죠 뭐. 인제 갈아 입어요."
그녀가 옷을 갈아 입는 동안 계산을 했다. 아하. 학원비를 뺀 내 한달 생활비가 기분따라 날아 갔다.
그녀가 다시 나왔다. 입었던 옷을 반듯하게 감싸고 나왔다. 그녀를 보며 씩 웃어 주었다.
"애인이 기분파시네요. 오늘 무슨 날인가 보죠?"
점원이 그녀에게 옷을 받으면서 물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고 했다.
"애인 사이 아니에요."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칫.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녀가 계산대로 오면서 내게 살며시 말을 건넸었다.
"나영씨가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한 것 뿐이에요."
"내가 언제 그런말 하려고 했나요? 하여간 고마워요."
점원이 종이 가방에 그녀의 옷을 넣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걸 왜 다 넣어요?"
"이거 남자분이 다 계산했어요."
그녀가 약간 감격스러운 듯 한 표정을 짓더니 삭막한 말을 했다.
"미쳤어요?"
"왜요."
"너무 부담스럽잖아요."
"백수라서요?"
이 말은 괜히 했다 싶다. 점원이 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그녀도 일단 말하던 걸 멈추고 점원이 주는 옷가방을 받았다. 그리고 이상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일단 밖으로 나갔다.
"동엽씨 아무에게나 이렇게 돈을 막 써요?"
그녀가 나오자 마자 한 소리다. 사주고 이런 소릴 들어야 하나 참 의문이 든다. 언제 내가 아무 여자에게나 이런 거 사주는 거 봤냐고 묻고 싶다. 나도 왜 그걸 다 샀는지 많이 헷갈리니까 자꾸 그러지 마요.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합니까?"
"치마 하나만 해도 좀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는데."
"자꾸 그러지 마요. 사주고 싶으니까 사주었지."
"근데 내가 이런 거 받을 정도로 동엽씨에게 의미가 되는 존재인가요?"
그건 좀 그렇다. 단지 하숙집 딸과 거기 사는 하숙생 사일 뿐인데 내가 좀 무리를 하긴 했다. 아무래도 내 맘 속에 잘 알지 못하는 무언가 있는 것 같다.
"그거 받아서 싫어요? 뭐가 그리 궁금합니까? 그냥 좋으면 되지요."
12편
내가 사준 선물이 부담스럽다고 말했으면서 그 옷가방을 좋은 표정으로 들고 그녀가 내 옆에서 걷고 있다. 저번에 시장 봤던 것은 나보고 다 들게 했으면서 그 옷가방을 나보고 들어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목적지도 없이 걸었다.
해는 정점을 지나서 내 오른쪽 어깨 너머로 지고 있다. 그냥 이렇게 걷는 기분은 생각지 못한 즐거움이었다. 아직 학원 갈 시간이 제법 남아 있다. 그녀와 좀 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학원 갈 시간 다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길을 걸으면서 조용히 묻는다. 지금 헤어진다면 한 시간 가까이 나 혼자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이 여자가 내 마음을 몰라주고 집에 갈 것 같은 의미의 말을 던졌다. 날씨도 좋고, 마음따라 그녀가 예쁘고 그녀따라 마음도 예쁜데 그냥 같이 마냥 걷고 싶은데 그녀는 집에 갈 모양이다.
"왜요? 들어 가려구요?"
"네?"
"아직 조금 여유가 있는데 나영씨 집에 가고 싶으면 가요."
"애인 없는 이유가 참 많구나."
"뭐요?"
"학원이 여기서 멀어요?"
"넉넉하게 한 시간 잡으면 충분하죠."
"학원 몇시부터 시작하는데요?"
"네시부터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여덟시까지 계속 하는거에요?"
"네? 끝나는 시간은 어떻게 아세요?"
"동엽씨 보통 빨리 오면 아홉시 가까이 되어서 오잖아요. 계산하면 쉽게 나오네 뭐."
"중간에 한시간 시간이 비어요. 듣는게 두개라서."
"네시면 집에 오면 다섯시... 그리 늦진 않겠다."
"뭘 계산하는거에요?"
"선물을 받았으니 식사 대접 정도는 해야죠. 여기서는 아무래도 불안할테니까 동엽씨 학원 근처에서 먹어요."
"나 배 안고픈데요."
"제가 고파요."
누가 자기 공주 아니라 할까봐 자기 맘데로 날 학원 앞으로 한시간도 넘게 빨리 가게 만들었다. 그 괜찮습니다. 지가 가자고 그러는데 굳이 말릴 필요가 있겠나. 갑시다 그럼..
그녀와 같이 지하철을 탔다. 비좁지는 않으나 앉을 자리가 없는 지하철내에서 그녀와 문앞에 섰다. 지하철 안에 뭐 그렇게 구경할 게 있다고 그녀는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 모습. 사람들의 모습은 대부분 무표정이다. 나에게 시선을 잘 주지는 않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 무표정의 사람들 보다는 훨씬 밝아 보인다. 창에 비치는 내 모습도 오늘은 표정이 있다. 그녀를 쳐다 볼때면 맺히는 미소가 보기 좋다.
학원 앞으로 왔다. 생각보다 동네가 흐름하죠? 여기서 공주가 식사할 만한 식당을 찾기가 어려울 거다. 나는 배가 솔직히 고프지 않다.
"저기 보이는 학원이에요?"
"네. 생각보다 작죠?"
"그렇네요."
내 묻는 성의를 봐서라도 괜찮아 보인다 그러면 어디가 덧날까? 괜히 내 처지가 초라해 보일까봐 그녀에게 저 학원에 다니는 나를 변명했다.
"내 실력이 쌓이면 방송국에서 모집하는 방송 아카데미에 도전해 볼 거에요. 거기서 정식으로 작가 수업을 받을 겁니다."
"열심히 하세요."
"네. 그건 그렇고 밥 사줄거에요?"
"근데 여기 별로 먹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네요."
그래 그말 나올 줄 알았다.
"저 배 안고파요."
"밥 먹기 싫어요?"
"지금은요."
"그럼 조금 이야기나 하다가 가야 겠네요."
"그러세요."
"그래도 비싼 선물 받았는데 미안하네요."
"괜찮아요."
"어디 이야기 할 만한 장소 있어요?"
"예? 어디를 말하는거에요?"
"커피숖이라던지 아니면 다른 이야기 하기 좋은 곳?"
"여기는 주점들이나 포장마차같이 술 마시는 곳이 주류라."
집에서도 이야기 자주 하는데 꼭 인위적인 이야기 할 장소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하늘 해 묻은 색깔이 좋았다. 햇살아래 있는 그녀의 모양새도 좋았다. 굳이 커피숖 같은 곳에 이 시간의 몸을 맡기기가 싫다. 이렇게 같이 외출을 했는데 그냥 오후의 하늘속에 구름이 흐르면 그 아래서 그녀와 자연스런 이야기나 했으면 좋겠다. 학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이 흐른다. 그리고 강 가에는 앉을 곳이 많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괜찮을 듯 싶었다.
"어디 아는 데 없어요?"
"강가에 갈래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강가에요?"
"그냥 강둑에 앉아서 강 건너 서울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시간 별로 없잖아요."
"뭐 그리 오래 있겠어요."
"그래 갑시다."
강가는 하나의 큰 공원이었다. 저기 멀리 여의도가 보인다. 육삼 빌딩의 색깔이 많이 금빛을 띠고 있다. 오후가 짙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강바람이 참으로 시원하다. 곳곳에 심어놓은 유채꽃들은 남보다 늦게 핀 것들을 제외하고는 그냥 파란 줄기와 잎들로만 치장되어져 있다.
팔은 왜 벌리냐? 그녀가 내 옆에서 걷다가 꼭 배우처럼 바람을 맞으며 팔을 벌렸다. 거기서 한 바퀴 돌아보면 진짜 영화 장면 같겠다. 진짜 돌려고 했다. 돌려다 들고 있던 옷가방이 날려 내 얼굴을 때렸다. 그러지 않았다면 한바퀴 돌았을 것이다.
"어머 미안해요. 안 아파요?"
"안 아파요. 대신 좀 쪽팔리네요."
좀 무안할 거다.
걸었다. 학원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제법 걸었다. 걷다 보니까 작은 가게가 있는 간이 건물이 보였다..
"저기서 아이스크림이나 사서 강둑에 앉아 볼까요?"
신났구만. 가게를 보며 달려가는 그녀를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오늘 잘 데리고 나온 것 같다. 생일날인데 집에 있었으면 솔직히 좀 속이 상했겠지. 게다가 누구 하나 자기 생일이라고 축하 한마디 없었으면 더 그랬겠다 싶다.
작은 파도가 찰싹 찰싹 때리는 강둑은 앉기에 좋았을 뿐더러 깨끗했다. 지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이야기가 오고 가기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고 고개를 멀리 하면 건너 편에 우리 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작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옆에 제법 밀착해서 앉았다. 뭐 내 방에서도 그러는데 확트인 여기서 좀 붙어 앉는다고 이상할 게 있겠냐.
"드세요."
포장지를 뜯어낸 메롱바를 그녀가 건넸다.
"콘은 없었어요?"
"있었는데."
"난 콘이 더 맛있던데."
"주는데로 먹어요."
분위기도 모르는 여자다. 영화 같은데 봐라. 연인끼리 강둑에 앉아서 콘 먹는 거는 봤어도 메롱바 먹는 꼴은 한번도 못봤다. 하기야 뭐 니하고 내하고 연인사이는 아니지.
오고 가는 이야기는 예전에 한 번쯤 했음직한 얘기였지만 강이 흐른 만큼 시간도 흘려 보냈다. 해가 멀리 보이는 육삼 빌딩 꼭대기에 걸렸을 정도로 기울었다. 시계를 봤다. 네시 사십분. 뭐여?
"나영씨?"
"왜요?"
"나 학원 갈 시간 지났걸랑요."
"어머, 그래요? 몇신데요?"
"네시 사십분이요."
그녀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정말 그렇네. 나 애들 저녁 차려야 되는데."
"지금 가서 차릴 수 있을래나? 어머님이 차릴까요?"
"그럴거에요. 그러면 안되는데..."
내가 학원 못 간 것은 안중에도 없구먼.
"지금 급히 가서 차리면 일곱시면 애들 저녁 먹일 수 있겠네요."
"아니에요. 제가 없으면 분명 엄마가 차릴거에요. 엄마 혈압이 불안정해서 힘든 일 하면 안된다 말이에요. 어디 전화 할 때 없어요?"
"저기 아까 가게 옆에 공중 전화 있던데..."
그녀가 일어서 공중전화를 찾아 떠났다. 옷가방은 끝까지 손수 사수하는 구만.
나도 일어서 그녀에게로 갔다. 오후가 깊어 가면서 가게 옆의 고수부지에는 사람들이 제법 모여 들어 있었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전화기에다 대고 뭐라 말하고 있는 그녀에게로 다가 갔다.
"엄마 절대 식사준비 하지 마세요. 지금 집에 누구 없어요?"
"..."
"그럼 현철이 좀 바꿔 주세요."
"..."
"응. 현철이니? 누난데. 오늘 일이 있어 저녁을 못 차렸다. 미안해."
"..."
"나는 일이 없니? 쪼그만한게 뭘 그리 묻냐? 하여튼 오늘 저녁은 중국집에서 시켜 먹어라. 애들 보고 그렇게 말해줘."
"..."
"그래, 내일은 맛있는 거 해줄게. 고마워."
그녀가 전화를 끊고 나를 쳐다 본다.
"저녁 그냥 포기한거에요?"
"여기 왜 왔어요?"
"안가요?"
"동엽씨 학원 갈 시간 지났고 또 중간에 한시간 빈다면서요. 내가 가면 동엽씬 뭐해요?"
저게 날 배려하는 말일까? 아니면 자기 놀려고 아예 날 학원 못가게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까 앉았던 자리로 도로 돌아갔다. 가면서 그녀가 어떤 꼬맹이가 산책시킬려고 데리고 나온 개새끼를 보더니 그 앞에 앉아 그 개새끼를 쓰다듬었다. 꼬맹이는 한 일곱 여덟살 남짓 되어 보였다.
"강아지 한 번 안아 봐도 되니?"
"네 그러세요."
그녀가 강아지를 안아 나를 보며 웃는다. 허허.
"개 이름이 뭐니?"
참 친한척 한다.
"아임에프요."
꼬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 우습다. 아임에프 된지 육개월여만에 개새끼 이름에도 아임에프가 등장할 줄이야.
"호호!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니?"
"울 집에 노는 삼촌이 있는데 그 삼촌이 그렇게 지어 주었어요. 울 삼촌이 저 아저씨 하고 닮았어요."
야이 씨. 왜 가만 있는 날 끼워 넣냐?
"그래? 삼촌이 잘 생겼니?"
그녀가 나를 돌아다 보며 재밌다는 듯 호호 거렸다.
"아니요. 나는 잘생겨 보이는데 울 할머니가 맨날 삼촌보고 못난놈, 못난놈 그러시는 걸 보면 못생겼나봐요."
"동엽씨 들었죠?"
뭐여.
"개가 무슨 종류니? 털이 참 복슬하다."
"포메라이언인데요. 가끔씩 마루 닦을때 걸레로도 써요."
새끼 똑똑하네. 나는 발음하기도 어렵겄만...
"호호."
"누나 참 예쁘네요. 우리 아임에프가 참 좋아 했겠다."
꼬맹이 녀석이 상당히 끼가 있어 보였다. 나중에 여자 여럿 울릴 것 같다. 내 나이 곧 서른이지만 그런 말 잘 못하는데...
"안녕."
그녀가 꼬맹이에게 인사를 하고 뒤에 서서 개새끼를 한 마리를 놓고 이야기 하던 어떤 여자와 꼬맹이를 쳐다 보고만 있던 나에게로 돌아 섰다.
"개가 좋아요?"
"아니요. 꼬마가 귀여워 보여서 그랬던 거에요."
그렇게만 답하고 그녀가 강둑으로 갔다. 어짜피 다음 수업 들을 때까지는 그녀와 있어야 하는 거 아까 못했던 이야기나 계속 하자. 그녀가 먼저 가 앉아 있는 옆으로 가서 앉았다.
하늘 한쪽은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혼자라면 참 초라하게 느끼게 할 것 같은 바람이 분다. 물결 소리가 그 바람소리 보다 크게 들린다.
"노을이 예쁘죠?."
그녀가 한참이나 출렁이는 강물을 보며 아무말이 없자, 따로 할 말이 없어서 노을 얘기를 했다.
"물속에도 맺혔네요."
갑자기 얘가 왜 분위기를 가라 앉히며 말하냐?
"물결이 살이 많이 쪘네요."
나도 글공부 하는 사람으로서 이정도 비유야...
"흠. 저 물살이 조금 더 살이 쪄 둥글면 꼭 무덤 같겠다 그죠?"
"네?"
왜 비유를 그런 곳에다 하냐.
"우리 아버지는 무덤이 없어요."
"그건 무슨 말..."
"급하게 돌아가셔서 묫자리 써놓은 거 없어서, 묫자리 돌 볼 아들하나 없어서 우리 아버지 그냥 화장시켜드렸어요. 그리고 저 한강 상류에 흘려 보냈어요."
어제 참 그녀 아버님 제사였지. 돌아 가신지 제법 되었는데 아직 저러는 걸 보면...
13편
그녀가 꺼낸 말로 난 오랫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밝지 않고 노을에 기대어 무언가에 잠겨 있는 듯 하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배워 본 적도 없고 괜한 말로 분위기 더 가라 앉힐까봐 아무 말도 못하겠다. 노을이 땅 아래로 사라 질 때까지 그녀의 옆에 앉아 만 있었다.
"지금 몇 시에요?"
그녀가 주위가 어두워 지자 입을 열었다.
"일곱시 십분이 좀 넘었네요."
시계를 보며 답을 해준 나는 깜짝 놀랐다. 학원 두번째 수강도 포기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가요."
아까와는 달리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당한 것 같기도 하고 홀린 것 같기도 하다.
"어디를 가는데요? 나는 이제 학원 못가요. 집에 가면 같이 갑시다."
"이제 배 고파요?"
"조금."
그래서 난 그녀와 밥을 먹으러 갔다.
학원 반대 방향으로 강을 따라 쭉 내려 와서 좋은 집들이 많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오늘 걷는 것도 참 많이 한다. 걸으면서 이렇게 시간이 잘 가는 것은 그녀가 옆에서 걷고 있기 때문일까?
버젓한 식당 참 안 보였다. 저녁으로 패스트 푸드점에서 햄버거랑 치킨튀김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기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 주어야 했다. 그 패스트 푸드점 이층 한쪽에서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지만 그래도 들렸나 보다. 옆에 앉아 있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처녀들이 날 보며 비웃었다. 내 노래는 무시하고 우리쪽을 쳐다 보는 그 처녀들에게 답례 해주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공주 같았다. 내 모습은 시종이었겠지 뭐.
근데 왜 내가 그녀의 부탁을 받고 그대로 해 주었을까. 아까 강을 보며 숙인 그녀의 모습이 슬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웃음을 띠우게 만들었으니 쪽팔렸지만 기분은 괜찮다.
"노래 참 못 부르네요."
불러준 성의를 봐서라도 그냥 고맙다는 말만 하면 아무래도 편찮나 보다.
"에이씨..."
"고마워요. 오늘 동엽씨 덕에 오랜만에 생일 축가도 들어보고 기분 참 좋네요."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하숙집 동네로 돌아 왔다. 학원을 빼먹었지만 오늘은 다른 날 보다 기억에 많이 남는 일을 한 것 같다.
하숙집으로 그녀와 함께 들어섰다. 마침 마루에 나와있던 학생 한 녀석과 마주쳤다. 꼬아보는 투가 맘에 안든다.
"누나 오늘 참 예쁜 모양으로 외출하셨네요."
"그래, 오늘 저녁 못 차려 준 것은 미안하다."
나는 그 둘이 말하는 틈을 타 그냥 내 방으로 들어 가려고 했다.
"형하고 누나하고 어떻게 같이 들어와요?"
"만났지 임마."
그렇게 말하고 그냥 방으로 들어 서려 했는데 그녀가 뒤에서 소리쳤다.
"동엽씨 오늘 고마워요."
뭘 그렇게 꼬아 봐 임마. 나와있던 녀석의 눈초리가 아까 보다 더 맘에 안들었다.
방에 들어서 옷을 갈아 입고 누웠다. 오늘 학원을 빼먹었기 때문에 뭔가 불안해야 할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해야 할 일도 분명 있을텐데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그냥 누웠다. 오늘 일을 생각 좀 하다가 그냥 히죽거렸다. 천정의 형광등 불 빛이 오늘은 왜 저렇게 곱냐.
잠에서 깨어 보니 천정이 아직도 하얗다. 창밖이 밝아 오고 있다. 그냥 히죽거리다 잠이 들었었나 보다.
불을 끄고 다시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내 꿈꾸는 생활에 기분 좋은 것이 하나 스몄다. 만약에 잘 되면 내 그려지지 않던 미래가 너무나 핑크 빛일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좋아진다. 그래도 아직은 너무 많은 꿈을 꾸기에는 이른 것 같다.
누워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한숨이 나오다가 또 히죽 웃게 되다가 마음에 변화가 많이 생기기는 하지만 오늘 아침이 참 좋다.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그녀가 지금 아침을 차리나 보다. 괜히 할 일도 없으면서 나가 보았다. 싱크대에 앞에서 그녀가 쌀을 씻고 있다.
"어, 왠일이에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냥 일찍 일어 났어요."
그녀가 밝은 표정이다. 식탁에 앉아 보았다.
"거기 앉아 있을려구요?"
"왜요. 싫어요?"
"싫긴요."
"물 한컵만 줘요. 아우웅."
이 시간에 하품 하는 것이 얼마만이냐. 오늘 하품은 귀한 것이다. 그녀가 내 모습을 귀엽게 쳐다 보더니 쌀을 씻다 말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손수 따라 주었다. 공주에게 물받아 먹으니까 느낌이 참 묘하네. 컵을 잡은 그녀의 손이 아름답다. 확 한번 잡아 볼까 싶다. 아침부터 맞긴 싫다.
"할 일 없어요?"
"네."
"아침에 콩나물국이 참 좋겠죠?"
"괜찮겠네요."
내 그말과 동시에 그녀가 아직 다듬지 않은 콩나물 한 접시를 내 앞에 가져다 주었다. 쩝.
아침을 그녀와 함께 했다. 그녀는 밥을 짓고 나는 콩나물을 다듬고. 싫지 않은 아침 풍경이다.
오랜만에 학생들과 같이 아침을 먹었다. 어제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냈던 녀석이 하숙집 그녀와 데이트 했다고 날 놀리다 그녀한테 얻어 터졌다.
"형한테 놀렸는데 누나가 왜 그래요?"
"데이트 좀 하면 어떻니?"
"그래 임마 데이트 좀 하면 어때."
"어제 그게 무슨 데이트에요."
허허 여자들의 심리는 참 오묘한 것 같다. 밥을 먹고 있는데 주인 아줌마가 나오셨다. 모습이 괜찮아 보이신다.
"요즘 우리 딸래미 음식 솜씨가 좀 어떻니?"
"많이 좋아 졌어요."
"괜찮아요."
"어머님 따라 갈려면 많이 멀었어요."
나말고는 다들 좋은 대답을 해 주었다. 주인 아줌마는 학생들을 보며 포근한 눈빛을 지으시고는 끊인 국을 한 번 맛 보시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 가셨다.
흠 다시 예전으로 돌아 온 모습이다. 밥을 먹고 나서 방으로 들어 오다 하숙집 풍경을 한 번 돌아 보았다. 제사가 끼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변화가 있었던 분위기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모습이다.

14편
몇 일을 보냈다. 학원 생활도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의 생일 이후 내 하숙 생활에도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쾅,쾅 거리며 노크하는 그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노라면 계속 놀리는 투의 말씀들. 그래도 괜찮다. 살 만하다. 안주해서는 안되겠지만 분명 좋은 기억으로 남을 만한 생활들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무얼할까? 하숙집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이나 할까? 야구장에 그녈 데리고 가면 괜찮을 것 같다. 예쁘게 차려 입은 그녀의 모습과 나란히 야구 경기를 보면 야구 경기가 정말 신날 것도 같다. 비록 좋아하는 팀은 다르지만 그녀와 아웅다웅하는게 이제는 좋다. 참 내가 사준 옷을 그녀가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럴까?
아침에 눈을 떠 이불 맡에 앉아 오늘을 생각했다. 아직 쾅,쾅 되는 노크가 없다. 시계는 열시를 거의 가리키고 있었다. 쾅,쾅 거릴 때가 되었는데.
"쾅,쾅."
그녀도 양반은 못 되겠다.
"나가요."
추리닝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나를 위 아래로 쳐다 보는 그녀의 시선이 오늘은 다른날과 좀 다르다. 내 밥은 식탁위에 차려져 있었다. 밥그릇이 하나 뿐이다.
"나영씨는 식사 했어요?"
"네."
허, 좀 아쉽다. 아침에 그녀와 마주하며 밥 먹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아침을 즐겁게 해주는 활력소였는데 오늘은 나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뭐 그녀가 같은 집에 있는데 또 모르지 내 옆에 청아하게 커피잔을 들고 있을지.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럼요."
"아무리 집에 있어도 외모에 신경 좀 쓰세요."
"왜요?"
"내가 편해요?"
"네?"
"아니에요."
그녀가 오늘 진짜 날 보는 시선이 다르다. 무슨 일이 있나.
"참 나영씨."
그녀가 주방에서 남은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요?"
"오늘 시간 있어요?"
"그건 왜요?"
"아니 할 일 없으면 야구나 보러 가자구요. 오늘 마침 잠실에서 오비랑 엘지가 경기를 하데요."
"시간 없어요. 오늘 약속이 있네요."
"그래요? 그럼 뭐."
요즘은 어디론가 혼자 나가던 외출도 잘 안하고 집에만 있는 여자가 오늘같이 필요로 할 때는 꼭 약속이 잡혀 있냐. 튕기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빨리 드세요."
"빨리 먹고 있잖아요."
그녀가 설거지를 끝마치고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굼뜨게 밥 먹고 있는 나에게 빨리 먹으라 재촉을 했다. 진짜 약속이 있나보다.
"나 조금 있다 나가 봐야 되요."
"내가 먹은 건 내가 설거지 할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나 내 방에 들어 가도 되요?"
"그러세요."
쩝, 그녀가 방으로 들어 가 버렸다. 오늘 뭐 할까? 하기야 뭐 보통때 보다 몇 시간 더 집에 있으면 되는 것인데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배부른 짓이다. 재미없는 비디오나 빌려서 내 구성 실력이나 배양해야 겠다.
밥을 다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왔다. 아주 공주가 되어서 나왔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절로 떠 올랐다.
'이년이 어딜 가는데 이렇게 차려 입고 나오는 겨?'
옷이 좀 낯이 익었는데 못 보던 것이었다.
"어디 가세요?"
"음."
그녀가 내 말을 듣고는 자기 옷 맵시를 내려 본다. 저 태도는 자기 모양새가 어떤지부터 물어 달라는 표현이겠지.
"참 예쁘네요. 옷이 참 잘 어울려요."
"좋아 보여요?"
"못 보던 옷이네요."
"참내, 저러니 여자 친구가 없지."
"왜요?"
"이거 동엽씨가 사준 거에요."
그래 이상하게 못 보던 옷인데 낯이 익다 싶었다. 잘 사주었네. 근데 저걸 입고 어딜 가는겨.
"어디 가는데요?"
"안 가르쳐 줄래요."
"일찍 들어 오는 거에요?"
"그건 모르죠."
"남자 만나러 가요?"
"내가 남자 만나러 간다면 동엽씨 기분 나쁠까요?"
"뭐 별로 나쁠 것은 없지만 내가 사준 옷을 입고 나가니까..."
"흠, 갔다와서 봅시다. 나 나가 봐야 겠어요."
그녀가 구두를 신는 뒷모습을 고무장갑을 낀 채 바라 보고 섰었다. 설버라. 그녀 성격에 남자 만나러 가면 내 물었을 때 당연히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친구 만나러 가는 가 보다. 그래 내가 그 옷 사주었다고 자랑이나 하고 오시오. 하하.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찝찝했던 기분이 풀린다.
"잘 다녀와요."
그녀가 한 번 뒤돌아 보더니 암 말도 안하고 그냥 나가 버렸다. 쩝.
설거지를 끝내 놓고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오늘따라 내 방 공간이 너무 커 보인다. 허전해서 그런가?
할 일이 구체적으로 떠 오르지 않는다. 발가락으로 티비 리모콘을 눌러 보지만 마땅히 관심 둘만한 프로가 없었다. 그래 진짜 잼없는 비디오나 빌려서 분석이나 해보자. 머리를 대충 손 보고 지금 입고 있는 차림 그대로 방을 나왔다. 주인 아줌마가 마루에 나와 계셨다. 많이 좋아 진 모습이다.
"어머님 나오셨어요?"
"어 동엽이 총각."
"나영씨는 어딜 가던데요."
"어? 그래. 아침은 차려 주고 나가던?"
"네."
"그래."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그래."
아줌마의 표정에도 뭔가 오늘은 다른 게 있어 보였다. 눈을 위로 떠 아줌마와 눈을 한 번 마주친 다음 밖으로 나왔다.
야 햇살이 보석 빛이다. 호호, 글 쓴다고 이렇게 비유하면 안되지. 놀기 참 좋은 날씨다. 백수 티 나나?
거리 풍경이 밝다. 토요일은 일요일이란 미래가 있기 때문에 밝은 것이다. 내 요즘 생활이 밝은 편이다. 일요일 같은 미래가 분명 있을 것 같다. 오늘 예쁜 모습의 그녀가 떠 올라 내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가볍다.
졸라 재미없는 비데오는 값이 싸서 좋다. 몽타쥬 기법이란 무엇일까? 변증법 이론에서 나온 것이라 했는데. 세르게이 에이진타인의 전함 포템킨이란 영화를 빌렸다. 이게 내 글쓰는데 도움이 될까 싶다. 비데오 테잎을 추리닝 허리춤에 꼽고 제법 신나는 걸음걸이로 집으로 향했다. 담배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숙집으로 들어 왔다. 마루에 주인 아줌마와 눈에 익지 않은 아줌마 한 분이 또 계셨다. 알지 못했지만 인사는 했다. 저 아줌마가 왜 날 아래 위로 한 번 훝었을까?
방으로 바로 들어 가려다 물이 필요 했길래 냉장고 문 쪽으로 발 걸음을 옮겼었다. 가까운 식탁에 주인 아줌마와 낯선 아줌마가 앉아 있다. 주인 아줌마가 괜히 내 눈치를 살폈다. 그것에 아랑 곳 없이 낯선 아줌마는 내가 입장하면서 중단 되었다 싶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었다. 내가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은 아니지만 물을 컵에 따르다가 듣기 싫은 얘기를 들었다.
"혹시 저 총각을..."
"아이,"
"저 총각 보다는 오늘 선 보는 남자가 훨씬 낫지."
주인 아줌마가 날 쳐다 보았다. 선이라는 말 때문에 오늘 그녀가 외출하던 모습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기분이 팍 나빠졌다. 더욱이 저 총각이라는 말은 날 보고 하는 소리였으리라.
천천한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 오다 내 예상이 맞았음을 알고 조금 슬펐다. 아니 많이 슬펐다.
"오늘 나영이가 선보러 나간 거 잘한거야. 내 그 총각 꼭 나영이 소개 시켜 주고 싶더라니까. 언니 몸도 편찮은데 나영이 빨리 시집보내야지. 하기야 지금도 좀 늦은 편이지만."
주인 아줌마는 아무 말 없다. 그래 주인 아줌마가 고맙긴 하다. 내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봐서 아줌마의 마음에 내가 조금 스며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내 기뻐해야 할 일이지. 저 아줌마는 근데 뭐여? 꼭 나 들어라고 하는 소리같다. 내가 꼭 나영씨를 넘보는 놈처럼 느껴졌나 보다. 그런 적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방으로 들어 왔지만 기분 한 번 억울하다. 방문 옆에 걸린 거울속에 담긴 내 모습이 상상되어진 오늘 그녀와 선보는 남자와 상대가 되지 않을 듯한 초라한 모습이다. 아침에 그녀가 날 다른 날과 다른 시선으로 본 게 못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오늘은 여전히 좋다. 햇살 한 번 꽃같다. 아이씨 글쓴다고 그러지 말라니까 진짜. 그래 햇살 한 번 속 뒤집어 지게 만든다.
담배를 문 채 비데오 테잎을 넣었다. 세르게이 패 죽이고 싶다. 뭔가 날 몰두 하게 만들란 말이다. 비데오를 틀어 놓고 자꾸 그녀 생각만 하고 있다. 그녀 생각을 하다가 배신감도 느꼈다. 최소한 선보러 나갈때 내가 사준 옷은 입고 나가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 그런 식으로 놀아라 이뇬아.
이불위에서 뒹굴었다. 햇살은 여전히 속을 뒤집어 지게 만든다. 으이씨, 으이씨 그러다 비데오 때문인지 날씨 탓인지 그냥 잠이 들었다.
꿈에서 아주 잘나게 되는 나를 보았다. 우리 하숙집 그녀가 쳐다 보기 민망할 정도로 잘나게 되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배를 긁다 일어 나 보니 속을 뒤집게 하던 햇살은 창너머로 넘어가 있었다. 보기 좋은 깊은 오후가 되었다. 아까 가져온 컵에는 물이 없었다. 담배를 얼마나 피웠는지 목이 아팠다. 시계를 보니 한 세시간 잔 것 같다. 목을 한 번 돌려 보고는 물을 뜨러 밖으로 나갔다. 조용한 하숙집 실내다.
아무도 없다. 그녀는 어떤 남정네 앞에서 갖은 내숭을 부리며 히히덕 거리고 있겠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도 없다. 씨. 기분이 많이 나빠졌다.
"으이씨. 이년은 물도 안끓여 놓고 어디로 선보러 간겨?"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에서 나왔다.
"저보고 그런거에요?"
어? 왜 그녀가 내 뒤에 있대요? 집에서 입는 그 긴치마 차림으로 그녀가 내 뒤에 서 있다. 얼굴에 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욕실에서 나온 것 같다. 왜 이리 빨리 온겨?
15편
"어! 왜 거기 있는 거에요?"
"우리집에 내가 있는게 이상해요?"
"선보러 갔다면서요? 왜이리 일찍 온거에요?"
"제가 선보러 간 걸 어떻게 알았어요?"
"기분 나빠요."
그녀의 새근거리는 표정이 괜히 싫었다. 보통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냉장고에 물도 없고 싫다. 내가 기분 나쁘다고 했는데 그녀는 더 새근거리며 웃는다.
"뭐가 기분 나쁜데요?"
"선보러 갔다면서요."
"제가 선 본게 기분 나쁜 일이에요?"
"그럼 내가 사준 옷을 입고 딴 남자 만나러 갔는데 기분 안 나빠 할 사람 있어요?"
그녀는 진짜 공준가 싶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반격을 한다.
"그것 말고는 기분 나쁜 것 없어요? 남자가 진짜 쪼잔하다."
그 말을 하고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 섰다. 그리고 앞치마를 두르는 모습으로 봐서 저녁을 차릴 모양이다. 저녁 차릴려고 일찍 왔구먼. 또 중국 음식 먹으라 하고 실컷 놀다 오지 그랬어? 저번 처럼 말이다. 참, 저번에는 나하고 나갔을 때지. 잠시 착각.
"선 본 놈이 맘에 들던가요?"
"왜 놈이라고 그래요?"
"여자하고 선 봤어요?"
"아니요. 근사한 남자하고 했어요."
"맘에 들었나 보네요. 잘하면 국수 얻어 먹겠네요."
"맘에 안 들었어요. 아무래도 누구 때문에 눈이 많이 낮아 진 것 같아요. 왜 남자가 참 근사했는데 맘에 안 들었지?"
그녀는 쌀을 씻고 있다. 웃고 있는 표정이 영 건방져 보인다. 방금 웃으며 했던 말도 좀 걸린다. 방으로 들어 가려다 이왕 시작한 거 좀 만 더 하자.
"누구가 누구에요?"
"누군긴요 백수지."
이건 나에 대한 도전이다. 왜 나 때문에 눈이 낮아 진겨. 내가 아무리 백수지만 어디가서 못생겼다 소리는 안 듣는데. 아침부터 외모에 신경을 쓰라는 등 내 마음에 못 질을 하더니만.
"나 말이요?"
"으음."
그녀가 쌀을 씻다 고개를 돌리며 끄덕 거렸다.
내 표정이 지금 어떨까 궁금하다. 얼굴에 열이 나는 것 같다. 그녀가 좋아 지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내가 초라해 보여서 기분이 상했었는데, 그녀가 나 몰래 선 본 것도 기분 나쁜데 내 맘을 몰라주고 저렇게 열받는 소리만 하는 그녀가 몹시 얄미워 보였다. 공주들이 제일 싫어 하는 말을 쓰자.
"나영씨는 뭐 잘났어요? 나도 나영씨 때문에 눈 많이 낮아 진거에요."
"허허."
무슨 여자가 저런 식으로 웃냐? 뭘 봐요? 쌀이나 계속 씻지. 그녀가 날 빤히 쳐다 보고 있다.
"기분 나빠요?"
"별로. 해석을 참 자기 나름데로 잘 하시네요. 저러니 여자 친구가 없지."
"자꾸 여자 친구 없다 놀리지 마요. 그리고 물이 없으니까 좀 끓여 놔요."
그만하자. 괜히 그녀가 선 본 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걸 이런 식으로 표현 해 봤자 나만 손해다. 지가 선을 보던 말던 내가 무슨 상관이냐. 방으로 들어 가려 했다.
"동엽씨."
"왜요."
"나 선 본거 기분 나빴어요?"
"티가 나요?"
"응."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딴 옷 입고 나가요."
"미안해요."
호호 그녀가 미안하다는 말을 다하고 어쩐 일이냐. 말투는 좀 그렇지만 기분이 좋아지네.
"괜찮아요."
"참 내. 쯧쯧."
미안하다고 하고선 참 내?
"왜 혀를 차요?"
"저러니까 여자 친구가 없지. 어떻게 물어 보는 의도를 저렇게 모르냐. 그래요 다음 선 볼때부터는 절대 동엽씨가 사 준 옷 안 입고 갈게요."
뭐여? 또 여자친구 없다고 놀렸다. 지혼자 무슨 말을 저렇게 길게 하냐. 여자 친구 없는게 죄냐? 그냥 무시하고 내 방으로 들어 왔다. 거울을 봤다. 기분 나쁜 티가 났는지 확인 하려고 말이다. 허허, 머리 모양이 이게 뭐냐. 자다가 일어 났을 때는 거울을 한 번 봐야 겠다. 많이 쪽팔려라. 이런 놈하고 같은 집에 있으면 눈이 낮아 질만도 하겠다. 이런 놈은 여자 친구가 없을 만도 하겠다. 날 너무 욕하지 말자.
그녀가 일찍 들어 온 것은 잘한 일이다. 암, 선 본 놈이라면 처음 만났을텐데 어떻게 밤 늦게 까지 같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너무 일찍 들어 왔다. 토요일 저녁은 밥 먹는 놈들도 적은데. 내 밥 줄려고 일찍 들어왔다 생각하지 뭐. 아니다. 그녀가 차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 왜 내가 그 생각은 못했을까?
문을 빼꼼히 열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 밀어 보았다. 그녀가 식탁 한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밥 냄새가 풍긴다. 그녀가 흥얼거리며 다리를 또한 끄덕거리며 앉아 있다가 나를 봤다. 왜 웃는겨. 다시 문을 닫았다. 표정이 차인 표정같진 않다.
토요일 저녁 식사는 그녀와 나랑 주인 아줌마랑 그리고 현철이라는 녀석 이렇게 넷만 있는 식탁에서 했다. 나머지들은 외출을 했다.
"너도 여자 친구 없니?"
그녀가 녀석에게 밥을 퍼주며 말했다. 너도,라는 어감이 영 거슬린다. 불쌍한 놈. 이렇게 날씨 좋은 토요일날 하숙집에 있다니 좀 불쌍하다. 나도 학생때는 말이다, 이정도 날씨의 토요일날은 집에 잘 안 있었어.
"불쌍한 놈. 쯧쯧."
그녀 편을 들어 주며 나보다 더 한 놈도 있다는 식으로 녀석을 보며 혀를 차 주었다.
"형보다는 나아요."
한 대 패버릴려다가 어른이 앞에 계서서 내 참았다. 저녀석 진짜 여자 친구 없나 보다. 새끼 과민 반응 보이고 있어.
아줌마는 조용히 몇 숟갈 뜨시고는 이내 방으로 들어 가셨다. 흠. 저녁 식사때는 그녀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줌마의 표정을 많이 살폈었다. 무슨 얘기가 오고 간 것 같았지만 내 어찌 알 수 있으리.
토요일 밤이 깊었다. 하. 그녀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가 이내 그녀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그녀 생각을 참 많이 한다. 이상하게 그녀가 딴 남자하고 산다는 게 몹시 기분 나쁘다. 이상하게 그녀가 나하고 같이 산다는 생각은 기분을 좋게 한다. 내가 이러는 걸 그녀가 알면 좀 쪽팔리겠다.
밤은 깊어 가는데 잠이 안 온다.
16편
그녀와 같이 산다는 생각은 즐겁다. 공주와 같이 살게 된다면 진짜 공주처럼 살게 해주고 싶다. 그러나 현재 내 처지가 그렇게 해 주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즐거운 생각을 하다가 다시 답답해 졌다. 그녀가 오늘 선 본것이 불안하다.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상태라면 상관이 없겠는데 지금 내게 그녀는 불안한 존재다. 잠이 왜이리 안 오는겨.
너무 많은 생각은 몸에 해롭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지 내 자신도 헷갈리는 지금 너무 앞선 생각은 이제 그만 하자.
베개를 부여 잡고 잠이 들었다.
옅은 꿈속에 그녀가 나타났었다. 뭐 얼마나 같이 살았다고 이런 꿈을 꾸냐? 괜히 슬펐다. 그녀가 하얀 옷을 입고 어떤 남자에게로 가 버렸다. 오늘 선 본놈이 아마 내 꿈 속에 나타난 그 놈하고 닮았을 것 같다. 좀 멋있었다. 나는 뭐가 좋다고 부조금을 내고 결혼식이라고 준비한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었다. 뭐여 씨. 꿈에서 본 그녀의 눈동자가 지워지지 않는다. 날이 샜다. 한 참 샜다.
방문을 열고 빼꼼히 밖을 내다 보았다. 식탁에 아침이 차려져 있고 학생들 몇이 밥을 먹고 있다. 일요일이라 아침이 좀 늦은 편이다. 시계는 아홉시를 넘어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나가려다가 거울을 한 번 봤다. 예상대로 머리 모양이 엉망이다. 오늘은 세수를 하고 밥을 먹어 볼까 싶다.
방문을 열고 나왔다. 주방에 서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씩 한 번 웃어 주고는 바로 욕실로 달렸다. 머리까지 감았다.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이 꽤 잘생겨 보였다. 이만하면 됐어.
욕실을 나왔다. 주방에 서 있던 그녀와 또 눈이 마주쳤따. 또 씩 한 번 웃어 주고는 방으로 들어 왔다. 거울을 보며 갖가지 표정을 짓다가 제일 멋있게 보이는 표정을 간직하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도 기분 나빠요?"
그녀가 대뜸 던진 말이 내 마음을 다치게 했다. 표정을 풀고 식탁 빈자리에 앉았다.
"밥 주세요."
"오늘 어디 나가요?"
"아니요."
"일요일인데 일찍 일어 났네요."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더니 국과 밥을 주었다. 그리고 자기 것도 차려서 내 옆 한 좌석을 차지했다. 맞은 편에 밥을 먹고 있던 녀석이 이상한 눈초리를 건넸다. 우린 맨날 이랬어 짜샤. 어제 선 본 여자니까 뭐 다른 생각은 말어. 그래 어찌 보면 그녀가 나와 많이 친한척 하긴 한다. 내가 좀 무뎌서 못 느껴서 그렇지.
하지만 예전에 어떤 여자가 조금 잘해주면 남자들은 착각을 잘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좀 더 지켜 볼 일이다. 내가 사준 옷을 입고 떡 선보러 간 이 여자를 파악하기가 쉽지가 않다.
"왜 내 옆에 앉아요?"
"자리가 여기 뿐이잖아요."
음, 그렇구나.
"누나 저 밥 다먹었어요. 여기도 자리 있어요."
주먹을 불끈 쥐어 들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참 가소롭다. 저 녀석 덩치를 봐라. 진짜 싸우면 그녀가 한 주먹감이나 되겠냐. 내 옆에서 밥을 먹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솔직히 좀 사랑스럽다. 어제 선 본 놈에게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밥을 다 먹고 일어 섰다. 아직 머리카락이 젖어 있다. 그녀는 자기 방식데로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잘 먹었어요."
"동엽씨, 오늘 진짜 어디 안 나가요?"
"안가요. 왜요?"
"아니에요."
방으로 들어 왔다. 거울을 봤다. 머리 모양이 젖은 채로 귀엽다. 빗질을 해 봤다. 이리 넘겼다, 저리 넘겼다 머리 모양을 변화 시켜 봤다. 내 모양이 별로 달라지지가 않는다. 씩 웃어 보았다. 웃는 표정은 밉지가 않다. 머리도 감았는데 외출이나 해 볼까? 그러나 마땅히 외출할 만 곳이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를 꼬셔서 데이트나 할까? 에이씨 어제 모르는 남자와 선 본 여자랑 오늘 데이트 한다는 것이 꺼림찍 하다. 머리를 괜히 감았다. 마음만 뒤숭숭하다.
이불을 개어 놓고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백수에겐 일요일이 조금 슬프다. 마음은 떠 있는데 몸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일요일은 별 생각없이 보냈는데 오늘은 왜 이럴까. 손이 가렵다.
다시 거울 앞으로 갔다. 추리닝에 와이셔츠가 어울리겠는가?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어 봤다. 씩 웃었다. 넥타이는 그녀가 준 것이다. 허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그런데로 있어 보였다.
"쾅, 쾅."
이런! 문 열지 마요. 하지만 그녀는 문을 열고 말았다. 거울 앞에서 놀던 모습을 그녀에게 바로 들켜버렸다.
"어! 어디 나가요?"
"안 나간다니까요."
"그럼 넥타이는 왜 맸어요?"
"그냥요."
"진짜 안나가요?"
"그럼요."
"나 여기서 비디오 좀 봐도 되죠?"
내가 된다고 대답했냐? 대답하기도 전에 들어 오면서 묻긴 왜 물었냐.
"오늘은 선 보러 안가요?"
"선을 매일 보나요."
그녀가 개어 놓은 이불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제 선 본 남자 보러 안가요?"
"맘에 안든다고 했잖아요. 무슨 비디오 있어요?"
음, 어제 그 놈은 진짜 맘에 안들었나 보다. 당분간 안심이다. 비데오 테잎이라야 어제 빌려 논 전함 포템킨인가 그것 밖에 없다. 재미없다고 짜증 낼 것 같은데 어떡하지.
"전함 포템킨이요. 그리고 되감아야 되요."
"그래요? 동엽씨 커피 마실래요? 그럼 내가 커피 타올 동안 되감아 놓아요."
야이, 내가 대답했냐? 테이프를 되감았다. 재미 없을텐데...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어 커피를 마시며 비데오 시청을 했다. 그녀가 옆에 있어 조금 재밌는가 싶었지만 쏟아지는 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저번에 그녀 어깨에 기대어 잔 적이 있다. 오늘도 그래 볼까? 아예 무릎을 베고 자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상상하다가 잠이 들었다.
"동엽씨 일어나요."
으이씨. 전에는 그녀의 어깨를 기대고 잠이 들었었다. 별 생각 없이 잤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때와 반대 방향으로 쓰러져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 다음에는 상상하지 말고 잠들자.
"재미 있었어요?'
"괜찮았어요."
"무슨 내용이었어요?"
"직접 보세요."
그녀도 잔 거 아녀? 표정이 영 수상쩍다. 다음에도 아주 재미없는 비디오를 빌려 놓고선 한 번 확인해 봐야 겠다. 다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녀와 공유할 수 있는 미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허 괜찮네.
오후 색깔이 참 곱다. 그녀는 시장을 갔다. 티비에서는 프로야구 중계를 하고 있다.
주방 냉장고에는 물이 가득찬 물병이 두개가 있었다. 찬 물 한찬으로 속을 내려 보냈다. 주인 아줌마가 나오셨다. 아줌마도 목이 마르신가 보다.
"나도 한 잔 주게."
"예."
주인 아줌마가 손을 자꾸 주무르신다. 컵을 받아 든 손이 많이 떨렸다.
"어머님. 어디 안 좋으세요?"
"아니. 근데 자꾸 손이 저리고 자주 다리에 쥐가 나네."
"병원 가 보시지 그랬어요."
"오늘 일요일이잖아. 내일 가보지 뭐."
아주머니께서는 다른 손에 쥐고 계시던 주홍 빛 알약을 입에 넣고선 물을 마셨다. 약 색깔 참 곱다.
"많이 편찮으신 것은 아니지요?"
"그래. 걱정 해 주어서 고마워."
방으로 들어 가시는 아주머니의 손이 안스럽게 계속 떨리고 있다.
"쾅, 쾅."
방안에서 야구 중계를 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 소리로 봐서 그녀다. 왜 또 온겨.
"왜요?"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그냥 내 옆에 앉았다.
"야구 중계 봐야죠."
"나영씨 방에도 티비 있잖아요."
"적군과 같이 봐야 재밌죠."
"시장은 봤어요?"
"네."
시소게임으로 진행되던 경기가 그녀가 입장하자 마자 바로 오비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기분이 살 나빠졌다.
"재밌어요?"
"응."
이긴다고 반말이냐.
"어머님은 뭐 하시던가요?"
"주무세요."
"내일 어머님 병원 가시는데 꼭 따라 가세요."
"왜요? 엄마가 내일 병원 간다던가요?"
"아까 봤는데 손을 많이 떠시는게 안 좋으신가봐요."
"정말요?"
밝은 표정이던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어둠이 깔렸다. 그리고서는 바로 일어서 내 방을 나가 버렸다.
주인 아줌마가 다시 안좋아지신건가? 조금 걱정이 되어서, 나는 많은 걱정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야호. 그녀가 나가자 엘지가 경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잘하면 역전도 할 듯 싶다. 뭐야. 정규 방송 관계로 중계를 중단한다고? 에이 엿먹어라 씨.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아까 내 방을 나갈 때 보다는 많이 표정이 밝다.
"어머님은 괜찮으시대요?"
"흠. 내일 정말 병원 가봐야 겠어요. 아직 주무세요."
"약 드시던데. 색깔이 참 곱던데."
"혈압 낮추는 약이에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뭘요. 냄새가 참 좋네요. 오늘 저녁 뭐에요?"
"시장 가니까 꽃게를 팔길래. 오늘 꽃게 찌개 만들어 보려구요."
그녀의 저녁 준비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녀에게 어둔 표정이 베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주인 아줌마 건강이 좋아지셔야 할텐데.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오늘도 저녁 식사를 빠진 녀석들이 두명이나 되었다. 현철이란 녀석은 오늘도 집에 있었구먼. 나만큼 불쌍한 놈. 아니 더 불쌍한 놈. 꽃게가 참 맛있다. 날로 발전하는 그녀의 요리 솜씨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내 방에 그녀가 찾아 오지 않았다. 인버터 스텐드 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서 책을 좀 봤다. 그리고 몇자 적어 봤다. 책은 문장에 관한 것이었지만 적은 글은 내 일기였다.
오늘 내가 그래도 즐거운 삶을 영위하는 것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 꿈 속에 한 여인이 미소 지으며 손 짓 한다. 이렇게 적으면 좀 있어 보이지 않나? 일기는 혼자만의 글인데 나는 꼭 누구에게 보여 줄 글을 짓는 것 같다. 나중에 내 마누라 될 사람은 내 일기를 볼 수가 있겠지. 그래서 우리 하숙집 그녀 이름을 자신있게 쓸 수가 없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밤이 꽤 깊었다. 밤이 밤 다워 지고 있다. 월요일을 기다리며 밤 색깔이 짙어 지고 있다.
"동엽씨."
그녀다. 지금 시각이 자정을 넘겼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했지만 심상치 않다.
"왜요?"
"잠시 나와 보세요."
"무슨 일인데요."
방문을 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있다.
"엄마가 좀 이상해요."
17편
잘때도 저 긴치마를 입고 자는겨?
"어머님이 이상하다니요?"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 번 와 보시겠어요?."
그녀가 바로 나를 잡아 주인 아줌마의 방으로 이끌었다. 밤이 깊었다. 밤이 깊은 만큼 내 마음도 걱정이 된다. 어머님이 어떻게 이상하단 말인가? 그녀가 왜 나를 찾았을까? 내가 뭘 안다고 말이다.
그녀와 같이 주인 아줌마의 방으로 갔다. 주인 아줌마는 앉아 계셨다. 그녀의 걱정스런 표정과는 달리 별로 이상한 점이 눈에 띠지 않는다. 주인 아줌마가 나를 올려다 보셨다. 주인 아줌마의 시선을 받아 그녀를 쳐다 보았다.
"어머님 어디가 안 좋으세요?"
"나영이가 자네를 번거롭게 했구만. 별 일 아닌데."
"엄마! 별 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떻게 아픈지 말해봐요."
"그래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
"저녁 먹은게 체했나? 가슴이 답답해. 그리고 다리에 쥐가 나더니 감각이 없네."
주인 아줌마의 손이 갑자기 심하게 떨렸다.
"병원 가보시겠어요?"
"이 밤에 어디를 가. 나아지겠지. 아!"
주인 아줌마가 말씀 도중에 비명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내셨다. 덜컥 겁이 났다.
"엄마 왜 그래?"
그녀가 놀라 주인 아줌마를 붙잡았다.
"다리에 쥐가 나서 그래. 이젠 괜찮아."
"쥐가 자주 나세요?"
"오늘 유달히 심하네. 쥐나는 것이야 종종 있는 일인데 뭘. 괜찮아."
주인 아줌마는 애써 아픈 표정을 감추시며 괜찮다는 말을 하셨다. 그녀가 주인 아줌마를 부축하고 있다.
"엄마, 다리 주물러 드릴테니까 누워 봐요."
주인 아줌마가 누웠다. 그녀가 다리를 주무린다. 그냥 보고만 있기가 미안해서 그녀의 옆에 앉아 나도 주인 아줌마의 다리를 주물렀다. 주인 아줌마가 천정을 보며 가픈 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내 뱉으신 말 한 마디가 그녀의 얼굴 빛을 하얀 빛으로 바꾸어 버렸다. 처음 보는 그녀의 눈물이다.
"다리 주무르고 있는거니? 아무런 느낌이 없네."
"네? 다리에 느낌이 없다니? 아무 다리나 한 번 들어 봐요."
주인 아줌마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그녀가 바늘을 가져와 찔렀지만 주인 아줌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안되겠어요 동엽씨. 병원 가야 겠어요."
잘못하면 입에서 '지금요?'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 주인 아줌마가 저러신데 내가 그말을 해서는 아니 되었다. 안 아프던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주인 아줌마는 계속 편찮었던 분이다. 그녀가 주인 아줌마를 부축하며 일어 서려고 했다.
"엄마 일어 서 봐요. 지금 병원 가야 겠어요."
"지금 꼭 병원을 가야 되니?"
주인 아줌마는 손을 저었지만 그녀는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다급해서 그랬을까? 그녀가 무식한 행동을 했다. 다리에 감각이 없는 분을 일으켜 세우려 하다니 말이다. 안되겠다.
"나영씨는 나가서 택시나 잡아요. 내가 어머님을 업고 바로 따라 나갈테니까."
"그래 주시겠어요?"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인 아줌마를 업었다. 불꺼진 하숙집 실내가 조용하다. 매정한 놈들. 하지만 아줌마가 뭐 큰일 날 것 같지는 않다. 그녀가 자기 방으로 가서 외투를 하나 걸치고 나왔다. 내가 주인 아줌마를 업고 있는 모습이 불안 했을까. 내 옆에 서서 주인 아줌마를 꼬옥 붙들었다.
"이렇게 같이 나가면 택시는 누가 잡아요. 조심해서 업고 나갈테니까 나영씨는 빨리 택시를 잡아요."
그녀가 나를 지긋히 한 번 쳐다 보고는 바로 뛰쳐 나갔다.
"자네한테 많이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큰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녀는 모범 택시를 잡아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갔다.
그녀가 걸음걸이가 빨랐다. 그녀 따라 나도 달렸다. 아줌마의 신음이 들렸다. 조심했어야 하는데...
응급실로 들어 갔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 침대가 하나 있어 주인 아줌마를 눕혔다. 주인 아줌마의 옆에는 나혼자 뿐이다. 그녀는 병원에 많이 와 봤던 탓인지 바로 의사를 찾으러 갔다. 무슨 병원이 이러냐. 환자가 왔으면 의사가 달려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녀는 젋은 의사를 하나 데리고 나타났다. 의사는 주인 아줌마께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체했는데 그래요? 어머니가 혈압이 높으세요. 계속 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녀가 혈압 얘기를 하자 의사는 지금까지의 표정보다 훨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아주머니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지금은 조금 느낄 수는 있겠는데..."
의사가 주인 아줌마의 다리 이곳 저곳을 만지며 감각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간호사가 한 명 와서 혈압 체크를 했다. 혈압기 참 이상하게 생겼다.
"어디가 안 좋은거에요?"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이다. 의외로 주인 아줌마의 표정은 다소 느긋해 보였다.
"혈압이 상당히 높네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심장쪽이나 혈관 쪽 이상이 있는 것 같은데... "
의사는 그녀에게 애매한 대답을 하고는 간호사를 시켜 주사를 놓게 했다. 그리고 이내 링겔을 주인 아줌마의 손목에다 꼿게 했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 의사가 그녀를 불렀다. 주인 아줌마는 링겔을 꼿고 난 후 얼마 안 있어 잠이 드셨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그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의사의 말을 듣고 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걱정스런 일이 일어 날 것 같지 않은데 그녀의 눈시울이 많이 붉어져 있다.
"아무래도 CT촬영을 해봐야 겠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슨 서약서 같은 것을 그녀에게 적게 했다. 씨티 촬영이라는 것은 많이 들어 봤다. 컴퓨터 단층 촬영. 하하 맞나?.
"CT촬영시 약물을 투여하게 되는데 못 깨어 날수도 있거든요. 아주 확율은 작지만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병원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나 같아도 저런 삭막한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나겠다.씨티 촬영이 그렇게 위험한 것인가? 그녀가 서약서에 싸인을 했다. 의사는 그것을 들고 바로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내가 옆에 있었던 것을 몰랐다.
"동엽씨 여기 와 있었어요?"
목소리가 영 힘이 없다.
"네. 어머님은 잠이 드셨어요."
"고마워요."
"너무 걱정 말아요. 큰일이야 있겠어요?"
"아니에요. 왠지 불안해요. 고혈압 환자들은 갑자기 사망하는 수가 많대요."
"에이 설마."
주인 아줌마 곁으로 돌아 왔다. 내가 없던 사이 주인 아줌마에게 이상한 기계 장치가 되어 있었다. 간호사가 그녀에게 다가와 설명을 했다. 대충 들어보니 기계장치는 혈압과 심장 박동에 관한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새벽 네시 가까이 됐다. 그녀는 주인 아줌마 곁에 앉아 있다. 씨티 촬영은 일곱시나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품이 났다.
"동엽씨는 집에 가세요."
"예?"
"좀 주무시구요. 전 여기 있어야 하니까 동엽씨가 아침에 학생들에게 잘 좀 말해 주세요."
"그건 어렵지 않지만 저 가도 되겠어요?"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내가 있어 봤자 도움 될 일이 없는 듯 하다. 그녀가 만원짜리 한장을 쥐어 주었다. 뿌리치지 못했다. 난 십원짜리 하나 들고 나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날이 밝아 지고 있었다. 아아함. 하품 참 길게 나온다. 나야 뭐 이시간까지 안자고 개겼던 적이 많다. 아하함. 하품 참 염치없이 자꾸 나오네. 배가 고팠다. 남은 돈으로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 사먹었다. 아침에 학생들 밥을 굶기면 이것들이 뭐라 그럴 것 같다. 어머님이 아파서 병원 간 줄 알면 별 말 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 투덜될 것 같다. 현철이라는 놈이 제일 못 미덥다. 그녀가 애맨 소리 들을 것도 같았다. 봉사 한 번 하지뭐. 남은 돈으로 왕창 라면을 샀다.
하숙집에 들어왔다. 나갈때 보다는 실내가 밝다. 하지만 많이 허전하다. 식탁에 앉아 졸았는데 일찍 일어난 학생 하나가 날 깨웠다.
"형! 왜 거기서 자요?"
"아하함. 응,"
별 대답 하지 않고 바로 물을 끓였다. 욕실에서 나오는 녀석을 불러 험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오늘 아침은 라면이다."
"왜요?"
아주 싸가지 없이 대답하는 녀석을 보았다.
"주인 아줌마가 아프셔서 밤에 병원에 가셨어. 나영씨도 거기 있어. 내가 선심으로 라면 끓여 주는 것이니까 불평 말고 먹어. 알았냐?"
"주인 아주머니가 많이 아프세요?"
"많이 아프신 것은 아닐꺼야. 괜찮아 지시겠지."
"큰일이네요. 형도 병원 가셨더랬어요?"
자식이 그래도 정이 있어 보인다.
"응. 물 끓어 가니까 애들 깨워라. 돈이 없던 관계로 머리수보다 라면이 하나 적으니까 빨리 일어 나야 많이 먹는다고 그래."
"근데 왜 형이 라면을 끓여요?"
"내가 사왔으니까."
"아무래도 형 누나한테 관심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녀석이 그 말을 남기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서 하는 행동인가? 좀 헷갈린다. 계란을 몇 개 풀까?
18편
"무슨 월요일 아침부터 라면이에요."
역시 예상한데로 현철이란 녀석이 제일 많이 투덜거렸다. 굶기지 않고 끓여 준 것에 대해 고마워 하지는 못할 망정 씹퉁되는 저녀석, 언제 기회 봐서 어둔 골목으로 끌고 가 조패야 겠다.
커억, 아침에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트림이 나왔다. 그녀가 내 트림 소리를 들을 적 마다 저러니,라는 말을 했었다. 욱! 트림을 참으면 더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줄 그녀는 모르나 보다.
학생들은 다 등교를 했다. 아침이 조용하다. 아무도 없다. 병원에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다. 큰일은 없나 보다. 잠이 쏟아 졌다. 별 걱정이 안되어서 그런지 잠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잤다.
열두시가 지나는 무렵에 눈을 떴다. 하숙집은 쓸쓸하다.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의 모양처럼 말이다. 다른 날도 이 시간 정도면 조용했었지만 오늘은 느낌이 다르다. 쾅,쾅 거리는 노크 소리도 없다. 잠에서 깨어 멍한 상태서 묘한 불안함이 스며 들었다. 그녀는 아직 한숨도 못 잤을 것이다. 병원을 가 봐야 겠다.
날씨가 너무나 곱다. 화창하게 내리는 햇살이 다소 뜨거웠지만 그 모양은 너무나 곱다. 밝은 거리에 밝은 사람들 모습이 좋다. 병원 앞으로 난 길로 푸른 나무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으로 작은 바람에 속삭이고 있다. 응급실로 들어가기 이전 까지의 풍경은 슬픔이 끼여 있지 않았지만 응급실로 들어 서자 마자 그런 풍경들은 사라지고 어둔 흐린날의 하늘 같은 모습으로 내 눈가에 펼쳐 지고 있다.
교통 사고가 났었나 보다. 응급실 내가 소란했다. 피 묻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절뚝거리며 걸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안 아플까? 모습은 상당히 험악하게 망가져 있는데 스스로 수속을 밟는 모습이 많이 신기했다. 참 저사람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줌마를 찾아야 한다. 아줌마의 모습을 찾아 보았지만 새벽에 있던 침대에는 딴 사람이 누워 있었다. 사방을 둘러 보았다. 저기 구석에 혼자 누워 있는 아줌마를 보았다.
아줌마의 모습은 어제 내가 병원으로 업고 갈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병원은 병을 낫으라고 오는 곳인데 아줌마의 모습은 중환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 이런겨? 링겔을 세개나 꼽고 있다. 그리고 의식이 없는 아줌마의 얼굴이 간간히 찌푸려졌다. 89, 44.라는 숫자가 표시되는 기계가 조용히 아줌마 곁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없다. 어디를 간 것일까. 아줌마의 모습이 지금 이런데 그녀는 아줌마를 홀로 남겨 두고 어디를 갔을까? 아줌마 곁에 앉았다. 이십분 가까이 시간이 흘렀을 때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모습도 이상하다. 눈이 퉁퉁 부어 있다. 그리고 많은 눈물을 흘린 것을 짐작케 하는 빨간 눈동자다.
"동엽씨 왔어요?"
"네. 어머님 왜 그래요? 그리고 나영씨 많이 운 것 같은데 무슨 일이에요?"
"아직 어떻게 될 지 몰라요."
"모르다니요? CT 찍었지요?"
"네."
"결과 나왔어요?"
"방금 듣고 왔어요."
그녀가 눈물을 떨구기 시작한다.
"뭐라고 하던가요?"
"나 이제 어떡해요. 엉!"
그녀가 왈칵 울음을 쏟았다. 주위 사람들 아랑곳 없이 눈물을 쏟아 내더니 내게 안기듯 기대어 흑흑 거린다. 어 어, 왜 이러는겨? 갑자기 내게 기대어 오는 그녀 때문에 잠시 당황이 되었었다.
"왜 그래요? 많이 안좋대요?"
"앞으로 삼일이 고비래요."
"네?"
"혈관이 터졌대요. 세겹중 두겹이 찢어 졌어요. 한 겹마저 찢어 지면 울 엄마 죽는대요."
무슨 말이냐? 지금 내 가슴이 뜨겁다. 그녀가 흘리고 있는 눈물 때문이리라. 소리가 내 가슴에 가려서 들리지 않는다. 목이 매였을까? 죽는다는 소리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등을 어루 만져 주었다. 허허, 이 상황에서 나는 약간 허튼 생각을 했었다. 아줌마 때문에 슬퍼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내게 안겨 있는 그녀 때문에 묘한 다른 감정이 생겼었다. 내가 그녀의 연인이 된 기분이다.
"괜찮을거에요."
주인 아줌마가 누워 계신 침대 앞에서 한참을 그녀를 안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울음을 그쳤지만 아주 슬프게 멍한 상태다. 그래도 그녀의 모습이 아까보다는 많이 진정이 된 상태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며 말했다.
"언니가 있다고 했죠?"
"네."
"연락 했어요?"
"안 했어요. 잊고 있었네요."
"어머님 아프시니까 연락 한 번 하세요."
"흠. 그런 걸 챙겨주는 것 보면 여자 친구 있을 만도 하네요."
그녀가 작은 웃음을 웃었다. 지금 저 말을 왜 했을까.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채지만 웃는게 역시 보기 좋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어 주며 나도 자그맣게 웃었다. 아줌마는 다소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갔다 오세요. 하숙집에도 전화 해 보세요. 혹시 누가 있는지."
오늘 학원 가기는 틀린 것 같다. 허허, 지금 그녀 곁에 내가 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의지할 사람이 없는 그녀 곁에 있어 줄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을 맑게 했다.
"네. 혈압 좀 봐주세요. 지금 아주 낮추어 논 상태거든요. 100이상 올라 가면 안된다고 했어요."
"혈압이요?"
"저 기계 앞 숫자 말이에요. 100이상 올라가면 간호사 불러야 돼요."
"네."
아까 89였던 숫자는 지금 87을 가리키고 있다. 내 혈압이 한 120정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87이라면 엄청 낮은 수치다. 고혈압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다시 눈물 몇 방울을 달고 응급실로 돌아 왔다. 들어 오면서 닦아는 내었지만 흔적이 남아 있었다. 괜찮아 보이던 주인 아줌마가 갑자기 왜 저렇게 되었을까?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거의가 슬픈 눈물이다.
"전화 했어요?"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그냥 고개만 끄덕 거렸다.
"동엽씨 학원 안 가세요?"
"오늘 하루 안간다고 많은 지장 있겠어요."
"그래도."
"여기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머님 계속 응급실에 계실거에요? 입원실로 옮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안그래도 말해 놓았어요. 아직 방이 없다고 하네요."
"생각보다 아픈 사람들이 많은가 보네요."
"네."
"어머님 반드시 나을거에요. 낫고 나면 예전보다 분명 좋아지실거구요."
"흠. 고마워요."
"오늘따라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네요."
"아까 혼자서 검사 결과 들을 때 너무 무서웠어요. 지금은 동엽씨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조금 안심이 되네요."
"허허."
"왜 웃어요?"
"그냥요."
그냥 왜 웃었겠냐.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우니까 웃었지. 그건 그렇고 정말 아주머니 좋아 지셔야 할텐데. 응급실 실내가 밖보다 밝아 지면서 불안해져 간다. 응급실이 아까 보다 많이 조용하다. 아줌마를 지켜 보며 저녁 먹을 시각을 훨씬 넘길때 까지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편으로 걱정되고 한편으로 정겹다.

19편
이틀을 학원을 못 나갔다. 오늘도 못 갈 것 같다. 오늘 오전에 주인 아줌마를 입원실로 옮겼다. 여섯 명이 쓰는 중환자실이지만 응급실 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느낌이다. 그녀도 다소 진정이 되었는지 방금 병원에 온지 사흘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입원실에서 필요한 생활도구도 챙기도 하숙생들 식사도 차려 줄 겸 집으로 갔다. 나를 비롯해서 하숙생들 모두가 그녀가 없던 관계로 집에서는 라면이나 중국음식으로 아침 저녁 끼니를 때웠었다.
응급실에 있는 동안 하숙생들이 간간히 찾아 왔었다. 고마운 녀석들이다. 분명 생활에 불편이 많았을 텐데 내색하지 않았었다. 세상이 생각만큼 매정하지는 않은가 보다. 아줌마도 매정하시지 않을 것 같다. 나을것이다. 지금 아줌마 곁에는 나혼자 있다.
아줌마는 정신을 차리셨다. 혈압을 많이 낮추어 놓았기 때문에 힘이 없는 모습이지만 말씀도 간혹 하셨다. 아줌마 침대 옆에 앉아 반쯤 잠이 든 몽롱한 상태였는데 아줌마가 잠에서 깨셨다.
"나영이는?"
"예? 아, 집에 갔어요."
"자네가 대신 있는게야?"
"네."
침을 흘리지 않았나 모르겠다. 아줌마의 모습이 아직 많이 안되어 보이지만 분명 어제, 그제 보다는 나아 보였다.
"자네한테 미안하고 고맙네."
"별말씀을요."
아줌마는 나와 짧은 대화를 하고 난 뒤 다시 잠이 드셨다. 심심하다. 중환자실이라 그런지 조용한 편이다. 하지만 알수 없는 긴장감이 있다.
아줌마는 여전히 잠이 들어 있었고 해는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링겔을 바꿔 놓고 갔다. 이 방에는 여섯 명의 환자가 있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두사람 뿐이다. 저녁 밥이 들어 왔다. 세 명분의 밥이다. 명단을 부르며 배식기를 돌렸다. 아줌마는 호명되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
"꼬로록."
생각해 보니 점심도 먹지 않았다. 움직인 것도 없는데 배가 참 고프다. 잠이 드신 아줌마를 보았다. 병원에 와서 아직 한끼도 드시지 못했다. 야, 마이 배. 분위기 파악 좀 하며 왠만하면 소리는 자제해라.
"꼬로록."
새끼 진짜 말 안듣네.
그녀가 생각보다 늦다. 어머님이 잠이 드신 틈을 타 입원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병원 복도를 걸어 보았다. 아픈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어둡다. 어쩌다 느끼는 학원생활의 어둔 느낌은 쨉도 안된다. 학원 생각이 난다.
그 종석이라는 형에게 전화나 해 볼까? 마침 학원을 파할 시간이다. 전화기를 찾으며 복도를 계속 걸었다. 전화기 앞에 낯익은 여인이 수화기를 붙잡고 짜증 섞인 말을 하고 있다. 앗, 그녀다. 전화기 옆 간이 의자에는 큼직한 가방이 놓여 있다. 그녀가 들고 온 것 같다. 그녀는 내가 자기 옆에 와 있는지를 눈치채지 못했다. 가방이 놓여진 의자 옆에 앉았다.
우와, 돈 참 빨리 떨어진다. 거의 일분에 천원 꼴로 떨어지는 것 같다. 그녀가 전화하고 있는 전화기의 잔여금액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 언니에게 하는 것 같다. 같은게 아니라 맞다.
"딴 얘기는 하지말고 언제 올거냐니까?"
"..."
"얼마나 아픈지 직접 보면 알잖아."
"..."
"진짜 모레는 올거야?"
"..."
"알았어. 만약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기면 언니 다시는 안볼 줄 알아."
그녀의 말투가 상당히 겁나다. 쌈하면 잘 할 것도 같다. 뭐가 답답한지 했던 얘기 하고 또 한다. 외국 나가기가 그렇게 쉬운가. 그녀 언니가 여기 오기가 어려운지 자꾸 어머님 병세를 되묻는 것 같다. 기어이 카드의 잔여금이 제로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어머, 동엽씨."
그녀가 가방을 들여다 나를 보았다. 고개만 끄덕거려 주었다.
"여기 언제부터 있었던 거에요?"
"방금 왔어요. 저도 전화나 할까 해서."
"그래요. 저 전화하는거 들었어요?"
그럼, 소리가 좀 컸지 아마.
"조금요."
"언니하고 통화했었어요."
"대충 그렇게 생각했어요."
"엄마는요?"
"주무세요."
"무슨 일 없었죠? 의사가 무슨 말 하던가요?"
"없어요."
그녀가 가방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래 지금 입원실로 가봤자 별 할 일도 없다. 그녀의 모습이 날 조금 덜 심심하게 했다.
"전화 안 하세요?"
"그냥 안 할래요."
"저녁 안 먹었죠?"
"네."
"미안하네요."
그녀가 가방을 열더니 도시락을 꺼내 놓았다.
"저 줄려고 싸온 거에요?"
"그럼 누굴 줘요?"
알면서 물어 본 거야. 여기서는 먹기가 불편하다. 지나는 사람들도 많다. 어디 괜찮은 곳이 없을래나? 결국 찾은 곳이 병원 비상계단이었다. 간혹 담배 필때 찾아 왔던 곳이다.
"나영씨는 밥 먹었어요?"
"밥이 좀 많아 보이지 않나요? 동엽씨랑 같이 먹으려고 안 먹고 그냥 왔어요."
그녀를 흘깃 쳐다 보았다. 쪼금 감격했다. 그치만 이 정도 나혼자 다 먹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도 싶었다. 계단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사이에 두고 저녁 식사를 했다. 밥상을 마주하고 식사해 본 적은 있지만 그때는 밥그릇이 따로따로 였다. 지금은 하나다. 헤헤. 그녀와 난 이제 같은 밥그릇의 밥을 같이 먹은 사이가 됐다. 젓가락이 부딪칠 때도 있었다. 그 재밌네.
"애들이 뭐라 그러지 않던가요?"
"밥을 보며 감격하던데요."
"걔들도 어머님 걱정 많이 하죠?"
"네."
"좋아지실 거에요. 아까는 말씀도 제법 하셨어요."
"고마워요."
고맙단 말 심심찮게 듣는다. 그 말할때마다 그녀가 내 마음을 조금씩 떼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까. 자꾸 그렇게 말하면 날 책임져야 할텐데...
병원에서 밤을 그녀와 같이 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날 쫓아 냈다. 매정하게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매정한 것이랴. 그래 내일 오전에 내 다시 오리라. 허허, 울 엄마도 아닌데 병원에 오고 싶다. 내 맘에 분명 뭔가 있다.
"그럼 내일 오전에 올게요."
"그래요."
그녀가 내가 온다는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내일 봅시다. 아줌마의 잠든 모습과 날 마중하는 그녀를 뒤로 한채 하숙집으로 돌아 왔다.
20편
학원을 오랫동안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되기 보다는 편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한 게 없으니까 할 일도 없었다. 하숙집에 오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일찍 일어났다. 일찍 잤으니까. 해가 갓 쪄놓은 호빵처럼 하얗다. 어스름이 지는 무렵에 일어 났다.
내 딴에는 착한 일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숙생들 아침에 밥 먹여 보낼려고 내딴에는 정성들여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냉장고에 있는 햄도 구워 대접했다. 그런데,
"이게 밥이에요? 발로 지었어요?"
"귀향하고 싶다. 차라리 나에게 라면을 달라."
아무리 물을 많이 탄 관계로 밥이 죽같이 되었지만 성의를 봐서라도 맛있다 그래주면 어디 덧나냐?
"형! 형도 하숙생이에요. 이런 짓 하지 마세요."
내 저놈들 기억해 놓았다가 나중에 내 잘나게 되면 다 복수하리라. 오늘따라 현철이가 고맙다. 그 녀석이 의외로 투덜거리지 않고 밥을 맛있게 먹었다. 하기야 저 녀석은 차려 주는 밥은 꼭 먹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내 다시 생각하마.
"으이씨. 아침부터 죽을 먹었더니만 속이 뒤집어 지네. 군대에서 이런 밥 주었다간 전쟁났다 진짜."
녀석이 밥그릇 비우고 숟가락을 놓으며 한 말이다. 내 가슴에 비수를 꼿았다. 저 새끼가 제일 나쁜 놈이다. 왜 아침 일찍 일어나 이런 짓을 했을까.
하숙생들은 모두 학교로 떠났다. 그녀가 없었던 관계로 하숙집 마루에 먼지가 많이 내려 앉아 있다. 어제 그녀가 집에 다녀 갔지만 이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을것이다. 내가 쓸고 닦고 한 번 해 볼까?
마루를 쓸면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주인 아줌마가 아프신 와중에 웃음이 나와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왜 이런 짓을 할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집에서는 내 방 이불도 잘 개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루를 쓸고 난 다음 걸레질을 말 시작했을 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네. 거기 양두숙씨 댁 아닌가요?"
"여기 하숙집인데요."
"그래요 하숙집. 거기 나영이 있으면 좀 부탁합니다."
아, 주인 아줌마 성함이 양 두숙이었구나. 그녀의 언니인 듯 하다.
"지금 병원에 있는데요."
"그래요? 입원실 전화 번호 알 수 있을까요?"
에... 기억이 안난다. 기억에 안 나는게 아니고 모르겠다. 어제 입원실로 옮겼었는데 내 어찌 알리.
"잘 모르겠는데요. 하실 말씀 있으면 제가 전해 드릴게요."
"저 나영이 언닌데요. 오늘 출발한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아, 예.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숙생인가요?"
"네."
"혹시 병원에 가 보았나요?"
"네."
"병세가 어떻던가요?"
"아직 안 좋지만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꼭 좀 전해 주세요. 그리고 오전 중으로 나영이 만나게 되면 제게 전화 좀 해 주라고 전해 주세요."
"네."
그녀의 언니가 오늘 올려나 보다. 언니가 오면 나영씨가 좀 편해 지겠구나. 잘 되었네. 오늘 중으로 도착하기는 힘들겠지? 먼 곳이니까. 그녀 언니의 말을 전해 주기 위해서 오전 중으로 병원을 가보아야 겠군. 마루를 반쯤 닦았을까. 전화가 또 왔다.
"여보세요."
"저 나영이에요."
"아 에. 어머님이 괜찮으신가 보네요. 전화까지 다하고."
"아직 그렇죠 뭐."
"아침 드셨어요?"
"병원 매점 가서 대충 먹고 오는 길이에요. 뭐 하세요?"
"마루 닦아요."
"동엽씨가 왜 마루를 닦아요?"
"제가 좀 깔끔한 편이잖아요."
"동엽씰 아주 모르는 사람에게나 그렇게 말하세요. 오디오 장식장에다 팬티 말아 넣어 두는 사람이."
"저 깔끔해요."
"나중에 오실거죠?"
"그럼요."
"그럼 병원에서 뵙죠."
"뭐 부탁할 일 없어요? 뭐 좀 사가지고 갈까요?"
"아니에요. 그냥 몸만 오세요."
"참, 언니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울 언니요?"
"예. 오늘 출발 한데요."
"정말요?"
"네."
"훗, 몇년만에 보는거야."
"보고 싶었어요?"
"그럼요. 친형제인데 안보고 싶었다면 거짓말이겠죠."
"병원에서 봅시다."
"네. 꼭 오세요."
그녀가 어제 자기 언니에게 전화할 때와는 다르게 매우 반가운 어투다. 별일 없이 그녀가 전화를 했다. 말 하는 것으로 봐서 꼭 나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허허, 주인 아줌마가 아프셔서 그녀와 나, 서로의 마음을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주인 아줌마가 가벼운 병이었다면 그녀에 나를 가깝게 해 주려고 아팠다고 할 수도 있을텐데.
마루를 다 닦았다. 깨끗하다. 아침에 밥도 하고 마루도 닦고, 나중에 안되면 가정부로 나서도 될 듯 싶다. 외출 준비 하 듯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하숙집을 나왔다.
주인 아줌마의 병세와 상관 없이 병원 가는 길이 가볍다. 아줌마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와 나란히 있는 날 보시면 기분 좋은 소릴 해 주실 것도 같다. 햇살은 오늘도 맑고 따스하다. 조금 있으면 덥겠지.
엘레베이터가 막 출발한 관계로 기다리기가 싫어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복도 분위기가 어제와 다를 게 없다. 입원실로 들어 섰다. 그녀가 반갑게 웃어 줄 것 같다. 그런데,
주인 아줌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침대에는 분명 양 두숙이라고 적혀 있고, 어제 그녀가 들고 온 가방도 놓여 있지만 주인 아줌마의 모습이 없다. 그녀도 보이지 않는다.

21편

주인 아주머니가 병세가 좋아지셔서 나영씨와 어디 산책이라도 가셨을까? 입원실 침대 앞에 잠시 앉았다. 주위가 어둡다. 입원실 사람들에게 아줌마의 행방을 물어 보았다. 한 시간 정도 전에 의사들이 아줌마에게로 달려 왔었다고 한다. 그녀가 나에게 전화를 한 때와 비슷한 시각이다. 아줌마는 어디로 급히 옮겨지셨고, 그녀는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따라 갔었다 한다. 불안함이 음습했다.
입원실을 나와 간호사에게 물어 보았다. 잘 모른다고 했지만 급하게 실려 갔으면 복도 끝 꺽이는 곳으로 가보라고 했다. 매캐한 약냄새, 꺽이는 곳에서 보이는 수술실이라는 푯말이 겁이 난다. 복도는 끊겨 있었다. 복도를 막고 있는 한짝의 문. 열기가 겁난다.
문을 열었다. 다시 살아난 복도의 한쪽에서 넋이 빠진 모양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눈물로는 모자라 콧물까지 흘린 채로 멍하니 앉아 있다. 아줌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나영씨."
그녀는 내가 온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냥 앉아 있다.
"나영씨."
한번 더 불러 보았다. 나를 올려다 보는 그녀의 모습이 아주 낯설다.
"무슨 일이에요?"
넋이 나갔던 그녀의 표정이 급격히 찌그러지더니 소리나지 않는 울음을 지었다.
"엄... 엄마가 죽었어요."
무슨 소리 하는거야?
"네?"
되물을려고 할 찰나에 그녀가 앉아 있던 맞은 편 수술실의 문이 열였다. 거기서 하얀 붕대에 묶여진 시신하나가 침대에 실려 나왔다. 그녀의 소리 나지 않던 울음이 선명한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양두숙씨 보호자 분께서는 영안실로 가셔서 사후처리를 하십시오."
금방 나온 시신은 하숙집 주인아줌마였다. 그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다. 그녀가 나에게 전화를 했던 때가 한 시간 좀 더 지났을 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어떻게 아줌마의 모습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 이불이나 좀 덮어 주지. 아줌마의 모습은 관에 들어 가기 바로 전의 묶인 모습으로 이동 침대위에 놓여져 있었다. 눈물이 나지는 않지만 잘 모르는 슬픔이 느껴졌다. 그녀는 일어 서다가 땅바닥에 덜썩 주저 앉아 버렸다.
"담요 같은 걸로 덮어 줄 수 없어요?"
침대를 끄는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복도 땅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는 그 사람이 별말없이 침대가 나왔던 방으로 다시 들어가 하얀 담요 하나를 가져와 아주머니를 덮어 주었다.
"보호자는 따라 오셔야 되는데요."
그녀는 엄마를 보지 못한 채 땅바닥에 앉아 흐느끼고 있다. 그녀의 슬픔을 짐작할 수가 없다.
"나영씨."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녀를 일으켜 복도 의자에 앉혔다. 침대 곁에 있는 사람은 그저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일단 영안실로 가야돼요."
"어떻게 된 거에요?"
"저는 의사가 아니라서 잘 모릅니다."
그녀를 복도의자에 앉혀 놓고 침대를 끄는 사람에게 몇 마디 물어 보았다.
"나영씨. 보호자가 따라 가야 한대요."
그녀는 지금 현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상태다. 그녀에게 더 물어 보기가 어려웠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더 어찌 할 지 몰라하는 모습으로 지금 상황을 외면하려 들고 있다.
"나영씨 여기 있을 거에요?"
그녀는 대답없이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시간 없어요. 한 분이라도 따라 오세요."
침대 곁에 있던 사람이 답답했던지 재촉했다.
"제가 따라 갈게요."
그녀의 어깨를 도닥거려 주며 일어 섰다. 그녀가 날 올려다 보았다.
"제가 일단 이 분을 따라 갔다 올테니 입원실로 가 있어요."
주인 아줌마의 침대가 움직였다. 그 사람을 따라 착잡한 심정으로 발걸음 때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가 나를 따라 걷고 있다. 잠시 서서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한 손으로 입을 막아 울음 소리를 참으며 남은 한 손으로 내 허리 옷자락을 잡았다. 주인 아줌마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아무말 없이 걸었다. 그녀가 이제 내 옷자락을 잡고 따라 오고 있다. 일반인들이 다니지 않는 복도를 따라 영안실로 왔다.
"남자분만 오세요."
영안실에 도착하자 그 침대 끌던 사람이 말했다. 영안실 앞쪽 편에는 몇 군데 장례식이 치뤄지고 있었다. 장례식은 어떻게 치룰까? 막막한 생각이 든다. 날 따라온 그녀의 모습을 보니 더 막막하다. 그녀를 영안실 한 쪽편에 앉혀 두고 그 사람을 따라 갔다. 영안실 뒤쪽 철제로 된 문을 따라 들어 갔다.
"좀 잡아 주세요."
주인 아줌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냉동실에 갇히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번호표를 받았다. 아줌마가 갇힌 냉동실 번호표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 들었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장례 준비할 때 까지 임시적으로 이 곳에서 시신을 보관하는 것이라 한다. 어제는 제법 주인 아줌마의 말씀을 들었었다. 그랬던 주인 아줌마의 모습이 내 한손에 들려 있는 번호표로 바뀌었다. 그녀는 이것을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감당하기가 힘들 것 같다.
분주히 뛰어 다녔다. 그녀는 훌쩍 거리다가 내가 다가가면 멍한 표정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묻는 모양새로 바라 보곤 했다. 장례를 어디서 할 지 영안실 관계자가 물었다. 하숙집에서 장례를 치루가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가족이 아니었기에 그 일을 그녀에게 물어야 했다.
"나영씨. 어머님 장례를 어디서 치룰지 묻는데요?"
"집에서 치루어야지요."
그녀는 별 생각없이 대답을 했다. 여전히 멍한 모습이다.
"하숙생들도 있고, 집에서 치루기가 힘들텐데요. 날씨가 더워서 어머님한테도 안 좋을 거에요."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눈이 붉고 머리가 헝컬어진 그녀의 모습이 안스럽다. 그녀가 울먹 거린다.
"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아무 생각이 안 떠올라요."
"일단 여기서 장례를 치루는 것으로 하고, 곧 나영씨 언니가 올테니까 다음 일은 언니가 오시면 상의를 해 보세요. 다른데 연락 할 때는 없어요?"
"잘 모르겠어요. 동엽씨가 좀 해주시겠어요?"
허, 내가 해 줄 수 있는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장례는 일단 영안실에서 하는 것으로 해야 겠다. 그녀 자신이 해야 할 일인데, 내가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럼, 장례는 여기서 모시는 것으로 할게요."
그녀를 두고 이리 저리 또 분주히 뛰어 다녀야 했다. 배가 고프다.
노을이 물들어 갈 무렵 영안실 한 켠에 주인 아줌마의 장례를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하지만 장례식에 필요한 주인 아줌마의 사진도 없었고, 음식도 없었다. 단지 향만 피워둔 채 이곳이 주인 아줌마의 장례장이다라는 표지만 붙었을 뿐이다. 영안실에서 음식은 주문만 하면 대신 해 준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이제 한계가 온 듯 싶다. 참 똑똑해 보이던 그녀가 오늘은 아주 바보가 되어 아직 눈물을 흘리며 장례장 한 쪽에 앉아 멍한 모습으로 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냐?"
주인 아줌마의 부고도 알리고 도움도 청할 겸 하숙집에 전화를 했었다.
"나 현철인데 댁은 누군데 대뜸 반말이요?"
"나 옆방 형이야."
"아, 형이세요. 무슨 일이에요?"
"집에 누구, 누구 있냐?"
"나 말고 한 명 밖에 없어요. 형은 또 누나하고 있죠?"
"슬픈 소식이다."
"뭔데요?"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주인 아줌마가 돌아 가셨다."
"무슨 그런 걸로 장난을 쳐요. 아줌마가 왜 돌아가셔요. 곧 나을 것 같아 보이시던데."
"내가 지금 장난하는 목소리 같냐?"
"진짜에요?"
"그래 임마."
"진짜? 세상에! 누나 불쌍해서 어떡해요?"
"글쎄. 하여간 하숙생들에게 알리고 될 수 있으면 애들 모아서 여기로 좀 와라."
"알았어요. 근데 어디에요?"
"병원 영안실로 와라. 오면 찾을 수 있을거야."
"네."
"그리고 참. 나영씨 언니가 올텐데, 오면 많이 놀라실 거야. 그래도 사실을 알아야 하니까 남아 있을 애 정하고 오면 바로 여기로 연락하라고 해라."
"알았어요."
그녀 곁으로 왔다. 영안실 실내에는 벌써 조명등이 켜졌다. 창 밖이 붉다. 혼자가 되버린 그녀가 지금 내곁에서 슬퍼하고 있다.

22편

시간이 흘러 가고 있다. 그녀는 다소 진정이 된 모습이다. 주인 아줌마는 높은 혈압에 의한 대동맥 파열로 의사들이 손 쓸 겨를도 없이 숨을 거두신 것이라 한다. 사람 목숨이라는 것이 참 질기다고 했는데 주인 아줌마는 너무나 쉽게 돌아 가신 것 같다.
그녀가 가엽다. 내가 뭔가 해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해 줄 것이라고는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 밖에는 없다. 찾아 오는 사람도 없이 차려진 음식도 없이 주인 아줌마의 장례식장에는 그녀와 나, 단 둘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저 집에 좀 다녀 올게요."
오랫동안 아무말 없이 멍한 모습으로 영안실에 앉아 있던 그녀가 눈물을 멈추고 일어섰다. 저녁 무렵이다.
"따라 갈까요?"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여기 좀 지켜 주세요."
"그래요."
등을 돌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불안해 보인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 간 뒤 한 시간이 못 되어서 하숙생들 세명이 찾아 왔다. 모두를 많이 놀란 표정이다. 한참 놀란 표정으로 감정들을 표현하다가 장례 준비가 너무 안된 것 같다며 자기들이 할 일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찾기가 힘들다. 조금 웅성거리던 분위기는 우물쭈물 조용해 지고 말았다.
"음식이라도 준비해야 되지 않나요?"
"무슨 음식을 준비해야 할 지 모르잖아."
"어른이 안 계시니까."
"그냥 영안실에 해주는 음식을 차릴까? 초상 났을 때도 떡하냐?"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 돌아 가셨을 때는 수육을 만들어서 오시는 분들 대접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 음식이라도 우리가 준비하자."
영안실 한 구석에서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하숙생 둘이는 떡을 맞추러 갔고 나는 영안실에 장례에 필요한 음식들을 주문했다. 거 참 매정한 사람들이네. 내가 지금 돈이 없다니까요. 무슨 이런 것도 계약금을 걸어라고 그러냐. 날 따라온 녀석의 지갑을 털어 계약금을 걸었다.
밤이 깊어 간다. 맞춤 떡도 준비 되었고, 기타 다른 음식들도 조금이지만 준비가 되었다. 하숙생들이 분주히 돌아 다녀 제법 장례를 치루는 모양새가 되었다. 웃으면 안되는데 아쉬운 미소가 스몄다. 아줌마가 돌아 가신 걸 알린데가 없으니 찾아 오는 사람이 없다. 밤이 꽤 깊었는데 그녀가 돌아 오지 않는다. 하숙집에 전화를 해 보았으나 아무도 받질 않았다.
향냄새가 이상하다. 애들과 마주 앉아 눈을 돌렸다. 천정도 바라 보고 서로의 표정도 살폈다.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품도 나왔다.
자정 무렵에 그녀가 영안실로 돌아 왔다. 그녀가 들고온 보자기에는 주인 아줌마의 사진과 소복처럼 보이는 하얀 한복이 있었다. 학생들이 고맙게도 집에 돌아 갈 생각을 않고 자리를 지켜 주고 있다.
그녀가 집에 갈 때와는 이 곳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녀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탈의실에서 소복을 갈아 입고 와서는 아줌마의 사진을 향이 피워진 상위에다 올려 놓았다. 주인 아줌마의 사진에는 검은 테두리가 쳐져 있지 않았다.
밤새 그녀는 어머님의 사진이 놓여진 상앞에 앉아 아무말 없었다. 멀뚱히 사진을 보다가 울기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초점없는 시선으로 다른 곳을 주시하기도 했다.
영안실 밖을 나와 담배맛을 보았다. 어제와 다름없는 담배 맛이나 연기의 냄새는 낯설다. 영안실 실내에 피워졌던 향의 연기들 때문이었으리라. 실내에 있기가 따분했던지 하숙생들은 나와 있다.
아줌마는 아줌마였나 보다. 하숙생들은 새벽으로 시간이 많이 흐르자 잠을 쫓기 위해 영안실 밖 가로등 아래에 자리를 마련하고 고스톱을 쳤다. 뭐라 야단 칠 수도 없다. 옆에 앉아 조금 구경도 했다.
"형도 돈 있으면 껴요."
"돈 없어."
"그럼 구경만 해요."
녀석들의 노는 모습이 재밌었다. 그녀와 나는 분명 남남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웃을 수 있다.
한참을 밖에 있다가 들어 왔다. 그녀의 모습은 그대로다. 슬픈 표정 지으며 멍한 모습이다. 그 모습을 그녀의 등 뒤에서 거리를 두고 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해가 뜨는 무렵에 하숙생들은 돌아 갔다. 그녀는 여전히 주인 아줌마의 사진앞에 앉아 있다. 영안실 관계자들이 불러서 나는 좀 바빴다.
그녀에게 음식을 건해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먹어야 되는데... 나는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햇살이 따스해 지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 사람이 너무도 없었다. 아무 말 없는 그녀를 쳐다 보며 영안실에 잡혀 있다 싶게 앉아 있었다. 조금씩 여기 있기가 지겹기 시작한다.
오전 무렵에 그녀의 언니가 왔었다. 조금 시끄러웠었다. 그녀의 언니가 크게 소리내어 울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니에게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많이 원망스런 눈초리를 보내며 묻는 말을 아주 간략하게 답변만 했었다.
"형부는?"
"나 혼자 왔어. 그냥 아픈 줄만 알았지 돌아 가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녀의 언니의 남편 되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싫었는지 그녀는 다시 형부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떨어져 살아서였을까. 그녀의 언니는 그녀처럼 멍한 상태로 있지 않았다. 이곳 저곳 부음을 알렸으며, 영안실 관계자들을 찾아 다니다 나와 인사도 했다. 그녀 언니는 아주 이성적으로 주인 아줌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 들였다. 그녀의 언니가 나에게 와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냥 머쩍은 표정만 지어 주었다. 그녀의 언니의 모습을 보니까 내가 자리를 비워도 되겠다 싶었다. 나는 점심 무렵에 집으로 돌아 왔다.
피곤했던 지라 집에 오자 마자 잠이 들었었다. 학원 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나서 다시 영안실로 가 보았다.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녀의 친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남자도 있다. 그녀가 제법 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섭했다.
저녁은 영안실 구석에서 그녀의 언니가 준 음식으로 때웠다. 그녀의 언니의 눈빛이 많이 붉다. 중간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어제의 내 모습처럼 그녀 언니는 분주히 돌아 다녔다. 그녀는 친구들과 이야기 하고 나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친척들의 격려를 들으며 슬픔을 나누었다. 나는 그녀와 한마디 말도 못해 보고 자정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내가 참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장례 준비를 했었는데 이제 소외된 느낌이다. 쩝 뭘 바라고 했던 일은 아니지만 그녀가 아무말도 없으니까 기분이 좀 그렇다.
하숙집은 주인 아줌마가 돌아 가신 줄이나 알까? 실감나지 않는다. 저 식탁 건너 방에 아줌마의 기침 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하숙생들은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없다.
잠이 오질 않았다. 낮에 자서 그럴까? 오늘 그녀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하숙집은 낯설지 않지만 내 방 천정이 낯설어 보인다.
삼일째다. 오늘은 일찍 영안실로 갔다. 오늘이 마지막날이기 때문이다. 영안실로 가는 길가에 나무 아래서 그녀의 언니와 그녀가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일일까?
그녀의 언니는 중년의 아줌마 같아 보인다. 그녀가 심하게 대드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가 언니에게 대들다가 덜썩 주저 앉더니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달려가서 등이라도 다독거려 주고 싶지만 모른채 영안실로 들어왔다. 영안실 내에는 상복 입은 놈이 있었다. 내 나이 또래 같았는데 보도 듣도 못한 놈이 꼭 상주인양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주는 음식 받아서 멀쭘히 서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주인 아줌마는 영안실 뒤 냉동실안, 그것도 모자라 각이 모질게 난 관에 들어가 있었다. 관에는 언제 들어 갔을까? 그리고 해가 바로 머리위에 떠 있을 무렵에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떠나는 모습만 보고 나는 집으로 돌아 왔으니까.
하숙집은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친척들인가? 친척들이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제법 되는구나.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방에서 잠이나 잘까 했는데 시끄럽다. 오늘 학원을 안간다면 이번주는 아예 한번도 안가는 것이 된다. 학원이나 가자.
"누구세요?"
"일이 있어서 못 나왔어요."
강사 새끼 꼴밉네. 다음달에 작가 한 명 소개 시켜 주고 그가 하는 작업 붙여주려고 했는데 요즘 자주 결석을 했던 관계로 딴 사람 소개 시켜 주기로 했단다. 내가 결석 안하고 착실하게 나왔어도 그런 거 안 시켜 준다는 것을 알기에 별로 섭하지 않다. 그리고 너, 솔직히 아는 작가가 있긴 있냐?

23편
종석이 형이 오랜만에 보았다고 술 한잔 하자고 했지만 뿌리쳤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새끼. 비록 가족은 아니나 하숙집 주인 아줌마가 돌아 가셔서 지금 난 슬프다. 그리고 또 알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나는 지금 술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내 얼굴을 보면 슬픔이 느껴 질 텐데 웃으며 술 먹자는 소리가 나오냐? 내가 언제 여자 사귀는 거 봤냐? 여자 한테 차였으면 카운셀러 해 줄테니까 술값은 니가 내라?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노. 훌쩍 날라서 이단 옆차기를 해줄까 했는데 그걸 배운 적이 없었기에 그냥 무시하는 표정만 지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숙집은 더 소란스러운 분위기다. 나는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열흘 전에도 저 현관문으로 들락 거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이상한 눈빛으로 절 쳐다 보지 마세요. 부끄러버요. 모르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그녀의 언니가 보인다. 하숙생들이 밥상으로 이용하는 식탁을 모르는 사람들이 점령한 채 그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언니와 말씀을 나누다 내가 들어 서자 나에게 어색한 눈길을 주었다. 그냥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쳐 내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의 언니가 그래도 날 봤다고 소란스러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 주었다.
"괜찮습니다."
현철이란 녀석이 조심스럽게 자기 방을 나와 아주 어색한 발걸음을 옮기며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떠 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다시 나와 물 떠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컵에 물을 부으면서 주위를 살펴 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내 방문을 열었다.
불을 켜고 나서 잘못하면 들고 있던 물컵을 떨어 뜨릴 뻔 했다. 그녀가 펴지 않은 이불위에 등이 굽은 새우 모양으로 잠이 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여기 와서 자는겨? 깨워야 되나?
깨우지 않았다. 여자가 있는 방에서 옷 갈아 입기 참 힘들다. 하기야 그녀는 내 빤스 입은 모양 몇 번 봤다.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옷을 갈아 입고는 그녀가 누워 있는 바로 옆에 앉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 눈물이 고여 있다.
밖은 소란 스럽다. 한시간 가까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그녀가 빨리 일어나 나만의 공간을 찾고 싶은 생각이 많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상황이 길어 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녀의 귀를 덮고 있는 머리칼을 용기를 내어 만져 보았다. 귀밑 머리가 참 보기 좋다. 하얀 볼 또한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삼일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 깊이 잠든 것이 틀림 없다. 내가 볼에 뽀뽀를 해도 모를 것이야. 헤헤, 함 해 버릴까? 근데 지금 상황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나 나쁜 놈인가?
"따르릉!"
어랏! 상당히 놀랬다. 쉽게 말해 졸라 놀랬다. 이 시간에 왜 알람이 우는겨? 그리고 어디서 우는겨? 내 방에서 낯선 시계가 알람을 울었다. 그녀의 머리 맡에 소리는 졸라 크지만 작은 알람 시계가 있었다. 지금 시각 열시다. 급히 껐으나 그녀가 눈을 떴다.
"동엽씨 들어 와 있었네요?"
"나 가만히 있었어요."
"네? 언제 왔어요?"
"얼마 안되었어요."
"깨우지 그랬어요."
"알람이 울리네요."
"제가 갖다 놓은 거에요."
"네에. 조금 괜찮아요?"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빨리 잊기로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차분하다. 약간 쉰 목소리지만 주인 아줌마 돌아 가시고 난 뒤로 처음 들어 보는 예전의 그녀 목소리다.
"그래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참 어머님 어디다 모셨어요?"
"네? 몰랐어요? 울 엄마 화장했어요."
뭐라고 답해야 되나? 또 그녀가 울려고 했다. 이럴 때 웃기는 말 하면 욕들어 먹겠지? 아줌마는 그럼 지금은 재가 되어 어딘가에 떠 다니고 있겠구나. 무상하다. 그녀가 굳은 내 표정을 보더니 살포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냥 흙속에 혼자 묻히시는 것 보다 아빠 찾아 다니며 강을 떠다니는게 오히려 낫겠다 싶네요. 오늘 아침에 언니에게 대들었던게 후회도 되요."
"네. 아침에 언니하고 싸웠던 게 그것 때문이었어요?"
"아침에 동엽씨 오는 거 봤었어요. 보여 주기 싫은 모습 많이 보인 것 같아서 고마웠는데 말도 못 걸고."
"괜찮아요."
"미안해요. 동엽씨도 피곤할텐데 나 때문에. 친지들 때문에 잘 만한 곳이 없어서 동엽씨 방에 와서 눈을 좀 붙였어요."
"허허."
그녀는 슬프지만 내색하며 짧게 밝게 웃어 주고 내 방을 나갔다. 개어 놓은 이불위에 그녀의 누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에 머리를 놓고 천정을 보며 어수선한 밖의 상황을 무시한 채 잠을 청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녀에게 내가 곁에 있는게 좋은지 물어 보고 좋다면 계속 있어 줄 수 있는데 그래 봐야 겠다. 잠든 그녀 옆에 앉아 있던 시간이 오늘 하루의 가장 좋은 추억이 되어 떠 오르고 있다. 주인 아줌마가 재로 변하여 영원히 이 하숙집을 떠난 슬픈 하루였지만 내 잠이 드는 얼굴에는 미소가 스미고 있다. 나 진짜 나쁜 놈인가?
하숙집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아줌마가 재로 뿌려진 날 다음날도 계속 되었다. 음식들이 많아서 먹기는 잘 먹었지만 많이 시끄러웠던 관계로 불편했다. 특히나 나는 토요일이었던 관계로 학원도 가지 않았었기에 할 일 없이 공원을 산책하고 뻔히 담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담배 사러 나가야 했다.
저녁 무렵이 되니까 하숙집이 예전 모습을 찾아 가고 있었다. 언니만 빼고는 다른 사람들은 다들 돌아 갔다. 저녁을 먹고 나서 방에 있었는데 그녀와 언니가 또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당장 그렇게 할 필요가 있냐, 나는 그럴 자신 없으니까 언니가 해라, 내가 당분간 알아서 할테니 신경쓰지 말아라. 무엇 때문에 싸우는 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뭔가 안타까운 일이 벌어 질 것 같다. 이 집이 언니 집이야?
그녀의 언니는 일요일날 자기 사는 곳으로 떠났다. 그렇지만 한 달뒤에 다시 온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그때는 좀 더 오래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언니를 문 앞까지만 배웅했다. 어디 이웃에라도 사는 사람인 양. 뱅기 타고 열두시간은 날아가야 되는 곳에 산다고 알고 있는데. 헷갈린다 말이야. 어떤 때는 참 정이 많은 여자로 보이다가 또 어떨 때는 참 매정한 여자로도 보인다. 언니를 배웅하는 모습은 참 매정해 보였다.
어머님이 돌아 가셔서 당분간은 하숙집 밥을 못 먹어 보나 했었는데 일요일 저녁부터 그녀가 하숙생들 식사를 차려 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아직 다소 어둡지만 저녁 식탁의 분위기가 예전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이 새끼는 오늘따라 왜 내 옆에 앉는겨? 그녀는 식탁 건너 편 멀리 떨어져 앉아 있다. 하여튼 우리 하숙집에서 제일 나쁜 놈은 이 새끼여. 현철이라는 새끼. 친한 척 웃지마 새꺄.
월요일은 일찍 일어나 하숙생들과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아줌마가 없어서 허전했지만 그녀가 예전 모습을 찾아 가는게 보기 좋았다. 하숙생들도 애써 아줌마 얘기를 꺼내지 않고 그녀가 슬퍼할 만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해 주었다.
그녀가 예전 모습을 많이 찾아 가고는 있지만 왠일인지 나를 피하는 느낌이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 보인 것 같다,라는 그녀의 말이 상기되어 진다. 내가 그 모습 지워지게 해 주고 싶은 지는 모르나? 다소 어색한 모습으로 나를 본다.
수요일 오후였다. 아줌마가 돌아 가신지 딱 일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유월달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
학원을 가려는데 그녀가 아주 어렵게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얼버무려 버렸었다. 혹시 날 사랑한다고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다음에 할게요.라며 돌아 서는 그녀의 모습이 기대되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하다. 외롭겠지. 혼자가 되었으니까. 내가 심심하지 않게 해 주께요. 내 잘나게 되어도 그대 모른 채 하지 않겠
오. 허허.
하숙집을 나왔다. 하숙집에서 큰 길 쪽으로 제법 걸었을 때 현철이란 녀석이 땀을 흘리며 걸어 오는 모습을 보았다. 학교하고 집 아니면 갈 데가 없는 불쌍한 놈.
"벌써 집에 오냐?"
"네."
"운동했냐? 땀이 많이 났네?"
"에구. 학기중에 하숙집 구하기가 힘드네요. 좀 돌아 다녔어요."
"하숙집을 구해? 너 하숙집 바꿀려고?"
이 새끼 나쁜 놈이네. 아줌마 때문에 좀 불편했던 적이 많았다고 바로 하숙집을 바꿔? 잘 됐네. 보기 싫은 놈 나가니까.
"형은 구했어요?"
"내가 왜 하숙집을 구해? 나는 하숙집 안 옮길거야."
"누나가 형에게는 말 안했어요?"
"뭘?"
"하숙 이번 달 까지만 하고 안 할거라고 그러던데요. 하숙방 구하라고 말 안했어요? 나한테는 미안하다면서 이달 하숙비를 돌려 주던데요."
"뭐야? 나한테는 아무말 없었는데..."
"곧 형한테도 말 할거에요. 내 대충 보니까 집을 아예 팔아 버릴려나 봐요."
"그래?"
"학원 가시나 보네요?"
"그래."
내 시야가 흐려지고 있다. 내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다. 주인 아줌마가 돌아 가셨을 때도 이 만큼 답답하지는 않았다.
24편

이상하게 학원 분위기가 어색했다. 세상에 없는 하숙집 주인 아줌마의 모습이 자주 연상 되었었다. 차갑게 스미는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학원을 파한 시간까지 낮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이 하지쯤 되나 보다. 어두워 지는 거리에서 어쩌면 하숙집을 바꿔야 한다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무겁다. 하숙집을 바꾸는 것은 그녀와 헤어진다는 것을 뜻함이다. 왠지 오늘 하숙집에 일찍 돌아가기가 싫다. 뭔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그녀에게서 들을 것 같으니까.
"오늘은 한 잔 해야지."
종석이 형이 또 술 마시자 한다. 오늘 그의 녀자가 안 보인다. 요즘 꽤 못 본 것 같다.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잘 됐다 싶다.
"그럽시다."
"진짜?"
"주영씨는 안 보이네요?"
"걔? 시집갈 준비 한대."
"벌써 그런 사이까지 되었어요?"
"우리집 말고 다른 시집. 학원 안 다닐거래."
꼬시게 잘 됐다. 알고 봤더니 여자에게 차인 것은 자네였구만. 카운셀러 해 줄테니까 오늘 술값은 니가 내라.
"그래요? 그런 얘기는 어디 앉아서 얘기 합시다. 어디 가실래요?"
"포장마차 가지 뭐."
술 먹으러 가는 두 사람의 표정은 어두워 지고 있는 거리의 표정을 닮았다. 포장 마차에는 아직 사람들이 없다. 이제 갓 문을 연 포장마차 안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참! 그 나이 든 사람이 말 참 많이 하네. 나도 좀 하자.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면 말이야. 적어도 그와 지냈던 시간 만큼은 잊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잊어 가면서 그가 그리울 것이고, 그리워 하는 시간도 같이 지내는 시간이니까 또 잊는데 시간이 필요 하고. 그래도 잊혀 질거야 응? 사람이란 잘 잊고 사는 동물이니까. 근데 어쩌다 또 생각이 날 것이고, 생각이 나면 생각이 났던 시간 만큼 또 잊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이 사람 지금 뭔 말하는거여? 주절주절 혼자서 잘 씨불이네.
"본론이 뭔대요?"
"한마디로 사랑했던 사람은 못 잊는다는 거지. 그녀가 보고 싶어."
간단하게 말하면 될 것 가지고. 무슨 얘기 하나 했네. 중년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질질 짜는 모습은 보기 역겹는데. 종석이 형아의 인상이 아주 더럽다. 일그러진 표정 하나 하나에 무언가 그리움 하나씩 스며 있어 보인다.
"주영씨가 왜 갑자기 시집 간다고 그러던가요?"
"힘들대. 그래서 시집이나 간대."
"결혼이 무슨 힘드면 하는 건가?"
"그건 그 사람한테 물어 봐."
"상대는 누군대요?"
"몰라. 지금은 없는대 곧 생길거래."
"그런게 어딨어요. 형이 못살게 굴어서 도망간 것은 아닌가요?"
"뭘 차여. 내가 좋긴 한데 요즘 자기 생활이 힘들대. 내 미래가 불확실 하잖아. 미래가 보이면 지금 힘든 것이 잘 못 느껴지지만 그렇지 못할 땐 자꾸 꺽이게 되거든. 그녀는 포기하는 인상이야."
"뭘 포기해요?"
"몰라. 나야 뭐 사귀기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않아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해도 그녀도 꿈이 있었을 텐데..."
"뭐가 힘들다고 그러는데요?"
"생각해 봐라. 그녀도 이제 얼마 안 있어 서른이다. 여자 나이 서른 지나면 옆에서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달라지는 줄 아니? 모든 게 힘들거야."
"그래도 그 동안 여기에 투자한게 아깝지 않대요?"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 보세요."
종석이 형의 넋두리를 제법 들어 준 것 같다. 내가 술값은 한 것 같다. 술 값 나보고 내라고 그러면 배웠던지 안 배웠던지 이단 옆차기 하고 만다. 나이 서른 즈음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앞으로 남은 서른을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고민일테지. 어떻게 살까 응? 어렵게 느껴진다고 말이야 소중한 걸 포기하고 그러진 말아햐 할텐데. 그래 저 놈은 그 주영씨에게 소중한 놈이 아닐것 같다. 서로 외로워서 만났었겠지 뭐.
"어려울 때 누군가 때문에 그 생활에 기분 좋은 미소가 자주 맺혔다면 그 사람은 자기에게 뭐가 되나요?"
"미소."
뭐야? 좀 성의있게 답하면 안되냐?
"그 사람이 내게 무슨 존재인가 아직 잘 파악이 안되는데요."
"헤어져 보면 알지. 쉽게 잊혀 지면 아무것도 아닌거고, 안 잊혀 지고 점점 그리워 지면 뭔가 있는 것이겠지."
"뭐가 있는데요?"
"자네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걸 나에게 물어보나? 니한테 물어 보세요."
"우리 앞으로 잘 될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졸라 분했다. 뒤에 몇 마디 물어 본 것 대답해 준 걸로 조언을 해주었으니 나보고 술 값을 내라고 했다. 내가 자네 이야기 들어 준 게 훨씬 맞잖아. 나는 돈 없오. 표정으로 벌써 일어나 있지도 않은 먼 산을 바라 보는 종석이 형의 눈빛에 그리움이 있어 보인다. 이번까지만 봐준다. 하지만 술 값 계산하면서 돈이 나가는 모습이 날 가슴 아프게 했다. 이단 옆차기 시험을 무척이나 해 보고 싶었으나 조국 때문에 참았다.
'우리나라 경로 사상이 쫌만 더 퇴색했어도 오늘 넌 죽었어 새꺄! 넌 경장사상이 강한 조국에 감사해야 돼.'
하숙집에는 열한시를 훨씬 넘어서 들어 갔다. 마루에는 아무도 없다. 주방 식탁은 치워져 있었고 어디에도 내 밥의 흔적은 없다. 다른 날 같으면 그냥 별 생각없이 다행이다하며 방으로 들어 갈 터인데, 오늘 현철이가 한 말 때문에 몹시 열을 받았다.
"쾅! 쾅!"
너도 함 당해 봐라. 그녀의 방 문앞에서 심하게 노크 한 번 했다가 문고리를 홱 돌렸다. 어라 돌아가네. 방안이 깜깜하다. 벌써 자나? 기척도 없다. 술도 먹었는데 불 못 켤소냐. 그녀가 어딜 갔을까? 아무도 없다.
"동엽씨 이 방이에요. 근데 숙녀 방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열어도 되는 거에요?"
등 뒤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주인 아줌마의 방문을 반쯤 열고 그녀가 서 있다.
"그 방에 계셨어요?"
"엄마 짐정리도 좀 할겸. 내일부터는 이 방을 쓸거에요."
"곧 나갈거면서..."
"흠, 내 방 노크는 왜 했어요?"
"바...밥."
"밥 없어요."
"하숙 그만 둘거라더니 맞긴 맞나 보네요."
"네."
"나도 하숙집 구해야 되겠네요."
"그래야 겠지요. 밥 안드셨다면 라면이라도 끓여 드려요?"
"됐어요. 술 먹어서 머리가 아픈 관계로 그냥 자겠습니다. 잘 자세요. 안녕."
방으로 그냥 들어 와 버렸다. 하숙 그만둔다는 말과 나 나가야 된다는 말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그녀 때문에 마음이 서글퍼 온다. 내가 뭘 바라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고 자책하지만 그래도 내가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친 가족처럼 돌봤다고 생각하는데 나영이 너 참 날 섭하게 많이 한다. 에이 씨, 잠이나 자자.
25편
술 기운으로 깜박 졸았으나 옅은 잠이었다. 잠에서 깨고 나니 속이 쓰렸다. 깜깜한 내 방의 모습이 그 동안 이 공간에서의 거억들을 아련하게 떠 오르게 한다. 내일은 나도 다른 하숙집을 구해야 하는구나. 아직 그 일로 그녀와 많은 말 오고 가지는 않았지만 이 하숙집을 떠나야 된다는 것은 정해 진 것 같다. 속이 쓰린 관계로 화장실 좀 갔다 와야 겠다. 시간은 새벽 두시를 넘어 섰다. 오늘은 글이나 써 볼까? 일단 화장실 갔다 와서 생각하자. 마루로 나왔다. 불이 꺼진 마루위로 뚜렷하게 그어진 불 빛. 주인 아줌마의 조금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나오는 불 빛이다. 그녀가 불을 꺼지 않고 나갔나 보다. 불 꺼줄까? 그러지 뭐.
아낙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방 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그녀가 자기 방으로 돌아 가지 않고 아직 주인 아줌마의 방에 있었다. 어머님이 쓰시던 물건들을 정리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그리고 한쪽에 앉아서 그녀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모른 척 조금 지켜 보았다. 아직 잊기가 힘들겠지. 참 가여워 보인다. 아직 출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따져 보면 지금 고아다. 저런 그녀를 두고 하숙집을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하지만 내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나? 그녀가 나가라고 하니까 떠나는 것이지.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내 방으로 돌아 왔다. 뭔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방에 들어와 누웠다. 한참 생각을 해 보니까 화장실 가려고 나갔다가 화장실을 안가고 들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다시 나가야지.
"동엽씨 아직 안 잤어요?"
그녀가 주인 아줌마의 방을 나오다가 나를 봤다. 주방의 불이 켜졌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을 흘린 모습은 아니다. 아까 흐느끼던 모습은 감추어져 있었다.
"자다가 일어 났어요."
"왜요?"
"속이 쓰려서요. 배도 좀 고프고. 나영씨는 왜 안 잤어요?"
"그냥."
아까 우는 모습 봤는데 말 하지 말아야 겠다. 그녀가 주방 식탁에 앉았다.
"안 잘거에요?"
"잠이 안 오네요."
"잠 안 와요? 나도 안 오는데."
"그럼 여기 앉으세요. 배 고프면 라면 하나 끓여 드릴까요?"
"새벽에 라면 먹으면 얼굴 부어요. 그리고 쫓아 낸다고 친절해 할 필요 없어요."
"기분 나쁜 듯이 얘기 하네. 그럼 커피나 한 잔 할래요?"
그럼 기분 좋겠냐. 쫓겨 나는 기분인데.
"에이. 그럼 한 잔 주세요."
내가 식탁에 앉자 마자 그녀는 일어 서 버렸다. 새벽에 그녀와 커피 타임도 가져 본다. 헤, 아쉬운 로멘틱이다. 그녀가 커피를 끓여 내 옆에 앉았다. 하숙집 실내는 조용했다. 바깥이 조용한 만큼 실내에서 들리는 그녀의 말소리는 뚜렷하게 감정까지 들린다.
"동엽씨."
나긋하게 부르는 음성이다.
"왜요?"
별 시원찮게 대답하는 음성이다.
"하숙집 옮기게 된 것 미안해요."
"그것보다 딴 놈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던 것이 좀 화가 났어요."
"애들 한테도 그제 말했어요. 동엽씨에게도 어제 말하려고 했었는데 미안하고 또 그런 말 할 용기가 잘 서지 않았어요."
"언제까지 방 구해서 나가면 되나요?"
"너무 그렇게 따지 듯 묻지 마세요. 그러면 내가 슬퍼져요."
이런 씨, 니가 슬픈 것만 따지냐. 나도 나가는 것이 슬퍼.
"이번 달 말까지는 나가야 되겠죠?"
"네. 언니가 칠월 초순 경에 형부랑 한국에 오는데 그때까지 하숙생들 비우려구요."
"집 팔거에요?"
"네. 집 팔면 반은 언니 몫이고 반은 내 몫이겠죠."
"아, 그렇게 되는구나. 그럼 나영씨는 어디서 살 건데요?"
"뭐 오피스텔이나 작은 전셋집 하나 구해야 되겠네요."
"계속 하숙 칠 생각은 없어요?"
"제가 그걸 계속 할 수 있을까요?"
"힘들겠구나. 참, 발령은 났어요?"
"아직이요. 그래도 내년엔 자리가 날 것으로 믿어요."
"나영씨?"
"왜요."
"나 이 하숙집 나가게 되면 아무래도 잊혀 지겠죠?"
"그 대답하기 전에 나는 잊혀 질까요?"
그녀가 커피잔을 세운 채 날 빤히 쳐다 본다. 씨, 내가 먼저 물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시간이 흘러 봐야 알지."
"그럼 저도 시간이 흘러 봐야 알겠지요. 그 대답 밖에는 못하나? 동엽씬 아무래도 중매로 결혼하는 수 밖에 없겠다."
요즘 한 동안 안 놀린다 했더니 기어이 또 놀리는 구나. 너도 뭐 내 맘 아프게 하는 걸로 봐서 빨리 가긴 힘들 것 같다.
"나도 맘만 먹으면 연애 할 수 있어요. 결혼 누가 빨리 하나 두고 봅시다."
"좋을데로 하세요."
내 표정이 우스운가? 아주 비장스럽게 말했는데 그녀는 피식 웃는 모습을 보였다. 좀 못마땅했지만 아까 흐느끼던 표정 보다는 보기 좋다.
"내 지금 처지 때문에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분명 나 좋아하는 사람 어디 있을거에요."
"훗훗.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래요 분명 있을 거에요."
어랏? 따져야 되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까 할 말이 없어진다. 미소 짓는 저 표정을 잊을 수가 있을까? 오 개월 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헤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많이 아쉽다.
"나중에 집을 대충 어디 쯤 구할 거에요?"
"왜요, 놀러 오게요?"
"그것보다 궁금하잖아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멀리 안 갈거에요. 나중에 학교 발령이 나면 그 근처로 다시 이사할까도 생각 중이에요. 기회되면 가르쳐 드릴게요. 동엽씨는 어디 하숙집을 구할 건데요?"
"오늘 구해 봐야지요. 이번에는 되도록 학원 근처에서 구할까 싶네요."
"좋은 하숙집 구하세요. 참, 잠깐만요."
그녀가 자기 방으로 급히 들어 갔다가 하얀 봉투를 하나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내게 주었다.
"이게 뭐에요?"
"이번 달 하숙비에요."
"이걸 왜? 나는 월초에 들어 와서 이번 한 달 다 살고 나가는 것인데."
"그래도 자의로 나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받으세요."
이러면 미안한데. 그리고 이 돈이 꼭 그녀와 내 관계가 하숙집 주인과 하숙생이라는 아주 계산적이고 단순한 관계일 뿐이라고 판을 박는 느낌이다.
"이 돈 받기 싫은데요."
"왜요. 하숙 그만 두면서 제일 미안했던 사람이 동엽씨에요. 받으세요."
"싫어요. 돈이라는게 좀 삭막해 보이지 않아요?"
"뭐가요? 받으세요."
"다 살고 나가는데 왜 내가 이 돈을 받아요?"
돈을 받기 싫었다. 받으면 안된다는 필이 팍 왔다.
"내 성의라니까요. 돈이라고 생각지 말고 받으면 되잖아요."
"싫어요. 동정심인가요?"
"뭐에요? 싫으면 관둬요. 동엽씬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없는거에요."
씨, 또 놀렸다. 그리고 조금 화가 난 어투다.
"무슨! 거기서 그 말이 왜 나와요?"
나도 되받아쳤다.
"내가 이 돈 드리는 것이 동정심으로 보였나요? 제 처지가 지금 누구 동정할 처지로 보여요?"
어쭈. 조금 더 화난 목소리다. 무섭다. 내가 뭘 잘 못한 것이여? 내 맘을 조금만 알아 봐라. 그런 말 못할 거다.
"그럼 그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하세요. 내가 그 돈을 받으면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중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뭔데요?"
"하여튼 내 마음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내가 초라한 존재 밖에는 안 될 것 같아서 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영씨하고 고작 하숙비로 연관되어진 존재만은 아니고 싶다 뭐 이런 뜻이라는 겁니다."
그녀가 내 모습을 찬찬히 바라 본다.
"훗. 그래요?"
그녀가 한번 피식 웃고는 돈 봉투를 들고 일어 선다. 폼새가 방에 들어 갈 모양이다.
"자게요?"
"네. 동엽씨 좋은 꿈 꾸세요."
그녀가 그냥 방에 들어가 버렸다. 많이 삐쳤나? 받을 걸 그랬나? 내가 아무리 지금 백수지만 그 정도의 돈 때문에 내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 이거야. 저 돈을 받았으면 서글펐을 것이다. 야, 이 나영. 솔직히 너 보면서 이 하숙집에 계속 있고 싶은데, 그래서 꼭 쫓겨 나가는 기분인데, 돈까지 받았다면 진짜 쫓겨 난 것 아니냐. 그녀가 날 한 번 더 섭하게 했다. 삐쳤으면 안되는데. 좋은 기분으로 헤어져야 하는데... 컵은 씻어 놓고 가야 할 것 아냐. 컵을 씻어 놓고 방으로 들어 왔다. 뭔가 꺼림찍 하다.
우쒸, 또 화장실 못 갔다. 갔다 올까? 이제 배도 쓰리지 않다. 그냥 자자.
26편
노크 소리를 듣지 않고 눈을 떴다. 시간은 열시를 넘긴 오전이다. 그녀가 오늘은 날 깨우지 않았다. 주방으로 나갔더니 그녀가 식탁에 앉아 생활 정보지를 살펴 보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내 밥과 그녀의 밥이 차려져 있다. 이상하게 그 모습이 슬퍼 보인다. 오늘은 서둘러 하숙집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 동엽씨, 생각보다 일찍 일어 났네요."
"네."
그녀가 생활 정보지를 내려 놓고 싱크대 앞으로 갔다. 그리고 렌지의 불을 켰다. 나 이 하숙집 떠날 때 많이 속상해 하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아침에 나 일어나는 것에 맞추어 이렇게 밥 차려 주는 하숙집을 또 구할 수 있을까?
속이 아직 쓰린 관계로 밥 맛이 별로 없었지만 성의를 다해서 공기를 다 비웠다. 그녀는 아직 반도 비우지 못했다. 멀뚱히 나를 바라 본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내가 먹은 밥 공기를 싱크대에 갖다 놓고 방으로 들어 왔다. 나갈 준비를 하고 나왔다. 그릇이 치워진 식탁에 그녀가 여전히 앉아 있다.
"오늘은 일찍 나가네요?"
"하숙집 구해야 지요."
"오늘 바로 구하게요?"
"오늘 바로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서둘러 구해야지요. 전 다른 하숙생들 보다 짐도 많은데."
"섭하게 왜 그래요?"
"뭘요?"
"구하면 알려 주세요."
"그러지요. 나 나갑니다."
"동엽씨 혹시 갖고 싶은 것 있어요?"
"그건 왜요?"
"되묻지 말고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 봐요."
"일억이요."
"네?"
"돈 일억이요. 작은 집이나 하나 사서 하숙집 옮겨 다닐 필요 없게요."
아무말 못하고 나를 바라 보는 그녀를 뒤로 하고 하숙집을 나왔다. 괜히 심술이 나서 그녀에게 투정을 부린 것 같다.
학원 근처는 하숙 치는 곳이 없었다. 하숙방을 구하려고 여러 군데 돌아 다녔지만 마땅하지가 않았다. 꼭 하숙이어야 하나? 어짜피 내 생활 패턴이 하숙 밥 얻어 먹기 힘들 것 같았다. 자취도 고려해 보자. 이리 저리 돌아다닌 끝에 학원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맘에 드는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예전부터 꿈꾸어 왔던 그런 방이다. 삼층 가정집의 옥탑방. 신기하게 십자 나무 창살로 된 창이 있었다. 방으로 들어 가는 입구는 작은 입식 주방이었는데 요즘은 보기 드문 백열등 조명이 있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옥탑방이라 그런지 벽지가 새어 들어온 비들에 의해 번져 있다. 주인 아저씨가 새로 도배를 해 준다 했지만 거절했다. 맘에 든다.
"보증금 삼백만원에 월 이십만원이라구요? 좀 비싼데..."
"보증금 백만원 정도는 빼 줄수 있어."
"언제쯤 이사 올 수 있나요?"
"도배할 필요 없다면 내일 당장도 올 수 있지 뭐. 어짜피 비어 있는 방인데."
"그럼 계약 할게요. 내일 이사 와도 된다고 했죠?"
"그래. 오늘 선수금으로 십만원 걸어."
"그러지요."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빨리 방을 구했다. 하숙이 아닌 자취생활도 해 보는구나. 기쁘다. 변화는 삶의 활력소다. 옥상에서 바라 보는 서울 하늘이 참 좁아 보인다. 이 정도 하늘 아래서 성공 못하겠냐.
어랏! 학원 갈 시간이 다 되었네. 아저씨 내일 봐요. 아저씨 혹시 시집 안간 나만한 딸 없나요? 내일 은근 슬쩍 물어 봐야 겠다. 옥상에 굴러 다니는 폐가구들이 보인다. 뜯어 졌지만 그런데로 앉을 만한 소파가 두개 보였다. 이 옥상에서 저거 깔고 여자랑 마주 앉아 차 한잔 들이키면 참 분위기 있겠다. 딸이 있어야 하는데...
종석이 형에게 집들이 거하게 해 준다는 조건을 붙이고 내일 이삿짐 옮기는 것 도와 달라고 했다. 물론 긍정의 답을 받았다. 나쁜놈. 집들이 할 때는 소주는 안 먹는다고?
짐 정리 할 것은 별로 없지만 부피가 큰 가전 제품이 몇개 있다. 오디오 세트는 분리해야 하고, 컴퓨터도 선을 뽑아 정리해야 한다. 집에 빨리 가자.
하숙집에 들어 서니 그녀가 내 오전에 집 나갈때 본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있다. 그녀의 밥과 내 밥이 놓여 있다. 또 그 모양이 슬퍼 보인다.
"동엽씨 왔어요?"
"네."
"씻고 식사하러 바로 오세요."
"알았어요."
방으로 들어 왔다. 정들었던 방이다. 내일이면 잊혀져 가겠지. 너무 성급하게 방을 구했나? 하지만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 어수선한 느낌들은 빨리 지워야 한다. 대충 옷을 갈아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내 방 보다는 낯익지 않지만, 그려 나 별로 안 씻는다. 욕실의 느낌도 포근했다. 이것도 잊혀 지겠구만.
그녀와 나란히 앉아 아마 이 하숙집에서는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저녁식사를 했다. 마지막이라서 천천히 먹었다.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기도 했다. 그녀는 여전히 공주처럼 밥을 먹고 있다. 괜한 미소가 맺힌다. 오늘 내 하숙집을 구한다고 했으나 그녀는 그에 대한 말이 없었다. 이 하숙집 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와 보조를 맞추어 식사를 끝냈다.
"동엽씨."
"왜요."
"동엽씨가 저번에 나 옷 사준 적 있잖아요."
"네. 있어요."
"나도 동엽씨 옷이나 한 벌 맞추어 드릴까요?"
"왜요?"
"뭐가 왜요에요. 어짜피 동엽씨 드릴려고 했던 돈이 굳었으니까, 그 돈으로 옷이나 한 벌 맞추어 드릴려구요."
"나영씨?"
"응."
내가 너보다 두살 많아 임마. 왜 반말이여.
"돈 얘기 자꾸 하지 마요. 그러니까 나영씨가 남자 친구가 없는거에요."
"갑자기 그건 무슨 말?"
무슨 말이냐구? 그냥 좋아서 옷 한 벌 사준다고 그랬으면 내 즐거운 맘으로 받았을 거다. 내 그 돈 받으면 진짜 쫓겨나는 기분이 들 것 같다고 누누히 말했는데. 아니다 말은 안했구나. 하여튼 별로 달갑지 않다.
"그냥 나영씨 요긴한데 쓰세요."
"그러지 말고 내일 같이 옷이나 사러 가요."
내일 이사해야 돼.
"됐어요."
그녀가 삐쳤나? 침울한 모습을 짓는다.
"그럼 목사이즈 하고 허리 사이즈 말해봐요."
"목 둘레는 삼십육센티 정도 되구요. 허리는 31인치에요."
내가 왜 친절하게 대답했을까? 그녀의 표정이 좀 무서워서.
"무슨 색깔 좋아해요?"
"짙은 색이요."
"범위가 너무 넓다."
"좋아하는 색 없어요."
"알았어요."
"참,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이요?"
"아닙니다. 나 이제 들어 갈래요."
"후식으로 커피 한 잔 할래요?"
"됐습니다."
그녀가 좀 무안해 하며 밥그릇을 만지작 거렸다. 내가 좀 쌀쌀하지?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내 속이 지금 상해 있오. 좀 답답하기도 하고.
방으로 들어 와 가전 제품부터 정리를 했다. 오디오에다 누가 빤스 구겨 넣어 놓은겨? 내가 그랬구나. 티비 밑에다 양말은 왜 받쳐 놓았을까? 이해가 안되네. 천원짜리도 한 장 주웠다. 이황 선생님의 얼굴이 많이 상해 계셨다. 죄송합니다. VTR을 만지작 거리다 그녀와의 좋은 기억이 떠 올랐다. 좋은 기억이 떠 올랐는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왜 뜨거워 진겨?
가전 제품들을 모두 한 쪽으로 모았다. 내일은 박스를 좀 구해야 겠다. 나머지는 뭐 챙길 것도 없다. 옷하고 이불 뿐인데 저것들은 내일 챙겨도 시간 충분하겠다. 짐들이 한 쪽으로 치워진 내 방의 표정은 왠지 어둡다. 이불을 깔고 누웠다. 천정에 하숙집 주인 아줌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좀 원망 스럽다. 그녀를 혼자 두고 뭐가 급해 돌아 가시다니. 덩달아 나까지 쫓겨나게 만들고 말이야. 하숙집 주인 아줌마가 웃으신다. 그 옆에 나와 아웅다웅하던 그녀의 밝은 모습도 그려진다. 내 지금 힘든 시기에 좋은 미소를 주었던 모습들이다. 하하, 허전하다. 허전한 웃음을 머금고 잠이 들었다.
"쾅,쾅!"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직감했다. 마지막 노크 소리라는 것을, 그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린다. 뭔가에 급히 놀라는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 났다.
"왜요?"
"밥 먹어요."
"조금 있다 나갈게요."
그녀와 같이 하는 식사는 어제가 마지막이었다. 오늘 식탁엔 내 밥 뿐이다. 그녀는 하필이면 오늘 외출을 하려나 보다. 칫, 조금 더울텐데... 내가 사준 옷을 입고 어디 나갈 모양새다.
"나영씨 어디 가요?"
"오늘 좀 바빠요. 동사무소도 가봐야하고, 부동산 중개소에도 가봐야 하고, 음 그리고 또 살게 있네요."
"그래요?"
"동엽씨 같이 갈래요?"
"내가 왜 가요. 저도 오늘 바빠요."
"그럼 나중에 딴 말은 하지 말아요."
내가 뭐 자네하고 같이 못나가서 안달난 사람도 아니고 딴 말을 왜 하냐.
"알았어요. 내 밥 먹고 다 치워 놓을 테니까 나 신경쓰지 말고 나갔다 와요."
"그럼 갔다와서 봅시다."
"그럽시다."
그녀가 날 빤히 한 번 쳐다 봤다. 나도 쳐다 봤다. 오래 기억하려고... 그녀는 공주가 맞나 보다. 내가 눈싸움에서 졌다. 그녀가 외출을 하고 난 뒤 밥을 먹으면서 내가 오늘 이사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것을 알았다. 왜 이러냐 이 화상아. 그녀가 일찍 올까? 나 이사나가기 전에는 들어 와야 할텐데.
술 먹는다고 참 일찌기도 전화를 했다. 종석이 형이 우리 하숙집 위치를 물어 보는 전화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왔다. 벌써 근처까지 왔댄다. 좀 일이 꼬인다.
종석이 형이 말한 위치로 가서 그를 데리고 하숙집으로 왔다.
"야, 하숙집 아담하다. 네 방은 어디야?"
"저기에요."
"그건 그렇고 뭐 먹을 것 없냐?"
"물이나 마셔요. 우리 하숙집 주인 아가씨 겁나요."
"하숙집 주인이 아가씨야? 그런데 하숙집을 왜 옮겨?"
"하숙 그만 둔다니까 옮기는 거죠."
그가 물 한컵 마시고는 내 방으로 갔다.
"문고리 고장 났는데."
"그것 때문에 고생 좀 했지요."
거기도 추억이 묻어 있었구나. 아쉬운 웃음이 나왔다. 나도 방으로 들어 갔다. 장년 둘이 있는데 짐 옮기는데 별로 시간이 걸릴 것 같지가 않다.
"차는 불렀냐?"
"아직이요."
"자세가 안되어 있구만. 빨리 불러."
"조금 있다 부르면 안될까요?"
"너 보기는 이래도 생각보다 시간 많이 걸린다. 학원 갈 시간까지 맞출려면 서둘러야 돼."
"그럼 뭐. 내 전화하고 올게요."
"그래. 난 대충 옷가지들 정리 해 줄게."
"고마워요."
이삿짐 용역 업체에 작은 트럭 하나를 주문했다. 금방 온단다. 이사 비수기에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바로 보내 준다고 한다. 잘못하면 그녀를 보지 못하고 갈 수도 있겠다. 방으로 들어 왔다.
"야, 이거 나주라."
종석이 형이 옷가지들을 정리 하다가 새빨간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목에다 걸어 보며 의기 양양하게 그걸 자기 달랜다. 그녀가 준 넥타이다. 뭐여? 진짜 이단 옆차기 해 주고 싶다. 바로 가 그걸 빼었다. 하! 넥타이를 보니까 또 마음이 무겁다. 그녀는 지금 여기에 없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그녀가 내 이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더 무거울 것 같다. 넥타이를 바지 호주머니에다 접어 넣었다.
"이건 미소가 준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넘보지 말아요."
"그럼 딴 거라도 죠."
이거 알고 봤더니 완전히 빈대잖아. 어제 오대오 장식장에서 찾아 낸 빤스를 던져 주었다. 험한 표정 짓지 마요. 그것도 빨고 나면 입을 만 할거에요.
이삿짐 트럭이 삼십분도 지나지 않아 집앞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하숙집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 바로 가기 힘들것 같다. 그래도 일단 짐들을 실었다. 종석이 형이 힘쓰는 일에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 큰 텔레비젼을 혼자서 거뜬히 옮겼다. 짐을 차에 싣는데 걸린 시간은 이십분이나 될려나?
금방 끝마쳤다. 빈 공간이 되어 버린 내 방이 지금 울고 있다. 그래서 달래 주어야 했다. 빗자루로 얼굴을 쓸어 주고 걸레로 자국들을 닦아 주었다. 야, 깨끗하다. 밖에서는 나 빨리 나오라고 경적을 울리고 있다. 하숙집을 둘러 보았다. 아, 지금 바로 못가는데... 누구라도 와야 내 떠남을 알릴 것 아닌가.
"아저씨, 담배 한대 피세요. 별로 안 바쁘잖아요."
밖으로 나와 담배로 일단 시간을 지연 시켰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빨리 안 갈거에요?"
"아저씨 조금만 있다가 갑시다. 지금 점심시간이라서 차도 막힐텐데."
"그럼 담배 한가피 더 줘 봐요."
짐을 실은 트럭 앞에서 십분 정도 더 서 있었다. 때 마침 집하고 학교 밖에는 갈데가 없는 불쌍한 놈의 모습이 보였다. 약간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나를 본다.
"현철이 너 때 마침 잘 왔다."
"형 이사가요?"
"응."
"빨리 가네요."
"그렇게 되었다."
"어디로 가요?"
"그건 내 나중에 전화 할게. 그 보다 나영이 누나한테 내 말 못하고 떠난 것 미안하다고 전해 주라. 내 전화한다 그래."
"알았어요. 그래도 이렇게 급하게 떠나는 걸 보니까 허전하네요."
"그래 임마. 너도 다른 하숙집에서 잘 살아라."
"네. 형도 잘 사세요. 누나한테는 내 잘 이야기 해 줄게요. 근데 왜 말 못하고 떠나요?"
"그럴일이 있다 했잖아."
"잘 가세요."
저 녀석도 조금 그리워 지겠다. 지금 모습을 보니까 나도 많이 허전하다. 5개월 동안이지만 이 하숙집은 많은 것들과 정이 들게 만들었다. 안녕이다.
"아저씨, 이제 출발 합시다."
"그러지요. 집이 어딘지 잘 말씀해 주셔야 됩니다."
"알았어요. 출발."
드디어 하숙집과의 이별이다. 트럭이 담배 가게를 지날 때쯤 그녀를 스쳐 지나 갔다. 제법 속도가 있었고 내가 이사가는 줄은 모르기에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녀의 한 손에는 옷가방이 들려 있다.
"아저씨 차 좀 세워 주세요."
"왜요?"
"잠깐만 세워봐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이름을 부를려고 했으나 그녀의 걸음걸이가 내 마음과는 다르게 가볍고 밝아 보였다. 왜 그런지 용기가 서지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가 골목길로 사라져 버렸다. 훗.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 하지 뭐.
"아저씨 그냥 갑시다."
허허, 나 하숙집에서 쫓겨 났오. 햇살이 뜨겁게 내리고 있다. 낯선 도로의 배경들이 달아 오른다. 하지만 내 마음은 찹다. 내일부터는 아니 오늘 밤부터는 새로운 생활이다. 잘 살수 있다 아자.
"아자!"
운전 아저씨가 깜짝 놀라 경적을 울리더니 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본다. 종석이 형도. 그녀처럼 피식 웃어 주었다.

27편

낯선 시간들이 지나갔다. 지금 하늘 모습으로 내 느낌이 묘하다. 학원을 파했다. 종석이 형은 이삿 짐 날러 주었던 보답을 받으려는지 의미있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들이 해야지?"
"하지요 뭐. 맥주 드실래요?"
"좋지. 내일 할일이 있는데 소주는 속이 불편하겠지."
맥주가 비싸니까 니가 그러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랴. 근데 내일 토요일이잖아. 무슨 할 일이 있을까?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별이 보이는 서울 하늘 아래 내 자취방이 있다. 아직 그 속에서의 생활은 해보지 않았지만 낭만적일 것 같다. 주인 아저씨가 생각보다 나이가 적었다. 외모상으로는 나만한 딸이 충분히 있을 것 같았는데 딸이라고는 이제 중학생이 하나 있고, 제일 빨리 낳은 자식은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아직 정리하지 않은 짐들로 방안은 어수선했다. 사가지고 온 맥주와 먹을 것들로 옥탑방 앞에 마당처럼 펼쳐진 옥상에서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낡은 소파가 운치가 있다.
다리를 꼬고 허리를 핀 채 소파에 기대어 작은 나라의 왕자모습으로 앉아 종석이 형과 술을 마셨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옥탑에서의 이야기가 멀리 번져 간다.
"야, 분위기 괜찮다."
"이사 잘 온 것 같아요?"
"그래. 여름밤에 앉아 쉬기 딱 좋은 분위기다."
"그렇지요?"
"한잔 해."
"그럽시다."
약간의 취기는 녀석에게 또 희한한 말들을 하게 했다. 높은 곳에 사니까 출세했다. 옥상이니까 유에프오 볼 수도 있겠다. 어린 왕자가 찾아 올 수도 있겠다. 달밤에 체조해도 아무도 뭐라 않겠다. 그리고 그녀가 보고 싶다. 그 그녀가 내 그녀는 아니었지만, 하숙집 그녀를 떠 올리게 했다.
"한번 생각해 봐라."
"뭘요?"
"분명 내 사랑했던 사람이 가까운 어딘가에 살고 있는데 잊혀져 간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누구 말하는 거에요?"
"주영이 말이야."
"그말이에요? 전혀 모순이 아닌데요. 여자야 딴 남자에게 시집가버리면 잊혀지는 것이지."
"그러니까 자네가 여자 친구가 없는거야. 그게 모순이라고 생각되어야 안 잊혀지지. 잊혀지지만 않으면 다시 만나게 되어있어."
뭔 말하는거야. 니가 철학자냐? 어려운 말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 그녀가 내게 자주 하던 말을 자네까지 하면 섭하지. 우리 그녀? 그거 어감이 괜찮다. 잊혀지지 않아도 다시 못보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종석이라는 사람은 모르나 보다.
"그럼 죽은 사람도 안 잊혀 지면 다시 볼 수 있어요?"
"당연하쥐. 나중에 내 죽어서 만나면 되지. 잊혀지지만 않으면 돼.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하자."
"그럽시다."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왠만하면 철학과는 가지마라. 굶기 쉽상이다. 철학? 술 먹으면 다 철학자 된다는 말씀. 물론 장난삼아 별 의미없이 한 말이지만, 내 앞의 종석이라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까 새삼 그 말이 공감되어진다.
맥주로 시작한 집들이는 결국 소주로 끝을 마쳤다. 뭐 세상에다 대고 할 말이 저렇게 많았을까? 술에 못 이긴 종석이 형은 곰팡이 핀 낡은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날씨 따뜻하니까 저렇게 재워도 괜찮을 듯 싶다. 오늘 모기들 포식하겠다.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정리 되지 않은 내 옥탑방을 안식처로 꾸며야 했다. 방은 하숙방보다 훨씬 넓다.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대충 짐들을 배치해도 무리가 따르지 않았다. 창 아래에 글쓰기 위한 컴퓨터와 밥상을 놓은 것 외엔 아무렇게나 짐들을 배치했다. 두 시간 가까이 흐르자 내 방이 안식처로 변했다.
날 찾아 온 손님인데 밖에 재워 둘 수 없어 종석이 형을 깨우러 방을 나왔다. 벌써 모기에게 많이 뜯겼는지 종석이 형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연신 가려운 곳을 긁고 있다.
"형 들어가서 자요."
"괜찮아.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예?"
"잘 할 수 있다니까."
"들어가서 자라니까."
"괜찮아. 괜찮아. 살다보면 그럴때도 있는거야."
정신 없이 내뱉는 말이지만 괜찮다고 그러는데 굳이 깨워서 방에 재울 필요 있나 싶다. 그럼 나는 들어가서 잘테니 형은 거기서 잘 주무세요.
"형 그럼 거기서 주무세요."
"응. 그래. 괜찮아. 괜찮아."
내일 딴 말하기만 해 봐라. 먹던 술병이나 음식들을 대충 치워 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십자 창문 사이로 밤 하늘 빛이 분위기 있게 들어 온다. 좋다. 무언가 그리운 것이 있다면 그걸 회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풍경이다. 그래서 전에 살던 방이 그립다. 그녀는 아직은 내 살던 그 곳에서 잠이 들었겠지. 그녀가 아직 내가 아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
"크러렁!"
언제 들어온겨? 아침에 코 고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옆에 종석이 형이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가 배에 말고 자고 있었다. 거지가 되어도 어디가서 얼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밝아 진 내 방이 낯설다.
문 쪽을 쳐다 보았다. 밖에 아무도 없지만 왠지 노크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괜히 문을 열어 보았다. 낡은 주방이 보인다. 주방 식탁에 그녀가 앉아 있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사용한지 오래 되었는지 주방의 싱크대가 더러워 보였다. 먹을 것도 하나 없다. 다시 자자.
종석이 형이 감고 있던 이불을 빼앗아 잠을 다시 청했다. 그리고 배가 고파 도저히 계속 잠을 잘 수 없을 때까지 잤다. 깨어 보니 오늘 해는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다. 베개도 없이 목을 긁으며 종석이 형은 여전히 잠에서 깰 생각을 안한다. 옥상위의 옥탑방. 종석이 잘도 잔다. 꼬로록 꼬로록. 배 고롱이 울어대도 종석이 잘도 잔다.
"형 일어나요."
"괜찮다니까."
"뭐가 괜찮아요. 일어나서 집에 가야 할 것 아니에요."
"응?"
그가 눈을 떴다. 주위를 살피더니 목을 긁는다. 신기한 곳에라도 온 모양이다. 두리번 거린다.
"정신 차려요."
"여기가 어디야?"
"내 방이요."
"몇시냐?"
"세시 쯤 되었네요."
"날 샌거야. 밝다."
"오후 세시오."
"뭐야? 나 세시에 약속 있는데 큰일났다."
"아직 세시 될려면 십여분 남았어요."
"나 지금 바로 가야겠다."
"안 씻어요?"
"지금 씻는게 문제냐. 그녀가 뭐라 그러겠는데."
"누구요?"
"주영이 말이야."
"오늘 만나기로 했어요?"
"응. 나 갈게."
종석이 형은 허겁지겁 옷차림을 매만지더니 간다는 말만 남기고 횅하니 내 방을 떠나 버렸다. 나쁜놈. 어제 그리움이 뭐 어쩌고 저쩌고 할 때는 꼭 다시 못 볼 사람마냥 말하더니 오늘 약속이 있었어. 에라이 나쁜노마. 혹시 길거리를 걷는데 사람들이 자넬 쳐다보면 머리 모양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머리나 빗고 가지. 아무래도 오늘 주영씨에게 모진 말 들을 것도 같다. 자네 나간 모양새라면 설사 자네 부인이라도 딴사람에게 시집가고 싶겠다.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프다. 차려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지만 하루만에 바로 불편함을 느끼게 될줄이야. 오늘은 밖에 나가 사먹고 내일부터는 직접 해 먹어 보기도 하자. 그녀에게 전화도 해 볼까? 왜 망설여지지 근데.
일요일은 자취 생활을 위한 설레임과 준비로 바쁘게 지나갔다. 백수면서 아직 목돈이 남아 있던 관계로 쇼핑을 했다. 베개를 아주 푹신한 걸로 하나 샀다. 작은 전기 밥솥도 사고, 토스트기도 샀다. 원두 커피 기계도 사고 전기 포트도 샀다. 수저 세트를 예쁜 것으로 하나 샀다. 신혼 부부용인가 보다. 숟가락 젓가락 남,녀 용으로 색을 맞추어 있다. 밥 그릇도 사고 국그릇도 사고 냄비도 샀다. 휴대용 가스렌지도 하나 샀지요. 도마와 칼도 샀다. 옥상에 나와 고기 구워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솥뚜껑도 샀다. 솥뚜껑 산김에 삽겹살도 한근을 샀다. 오늘 하루 옥상을 오르내린 게 수십번은 되는 듯 하다. 물건 하나 사서 정리하다 보면 또 살것이 생기고 했기 때문이다. 식용유, 간장, 된장, 김치, 쌀, 식빵, 쨈, 햄, 달걀, 라면. 등등 먹을 것 산 것을 끝으로 내 자취 생활의 준비는 끝이 났다. 새롭게 시작이다. 아자!
일요일 저녁 어두워 지는 하늘을 친구 삼아 옥상에서 나홀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어제 먹고 남았던 소주도 있었다. 정말 좋다. 소파가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낡아서 신경 쓸 필요 없는 편안함까지 주는 소파도 정말 맘에 든다. 고기까지 맛있네.
혼자서 고기 한 근을 다 구워 먹고 움직이가 불편해서 소파에 기대어 하늘을 보았다. 등따시고 배부르고 또한 편하다. 나영씨 나 오늘 기분 좋오. 그러니까 당신 생각이 나는구료. 그녀에게는 내일 연락해야 겠다.
아침에 먹을 밥을 위해 쌀을 씻었다. 힘들지 않았다. 반찬도 햄이랑 달걀 구워서 김치하고 먹으면 된다. 오늘은 피곤했다. 아직 배는 꺼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일찍 잠들 수가 있었다.
자취 생활이 무리 없이 흐르는 듯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가 왔다. 쌀로 밥해 먹는 것은 삼일을 가지 못했다. 전기 밥솥 괜히 샀다. 아침에 토스트기에서 빵을 구워 먹었다. 저녁은 학원을 마치고 음식점에서 사먹고 왔다. 간혹 라면을 끓여 먹었다. 토스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라면으로 대신했다. 라면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제부터 아침에는 컵라면을 끓여 먹는다. 학원 갈 무렵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 먹고. 저녁은 계속 밖에서 사먹고 들어오고 있다. 주방에 가스렌지와 냄비하나를 제외하고는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 공간만 차지하고 복지부동이다. 남아 있는 간장이랑 식용유가 아깝다. 어제 컵라면 한 박스와 커피 믹스 한 박스를 사왔다. 원두 커피 기계? 딱 두번 사용해 봤다.
오늘 아침은 아예 굶었다. 그래도 어제 저녁 사먹고 들어 온 것이 갈비탕 곱배기라 배는 별로 고픈 줄 모르겠다. 갈비탕도 단골 되면 곱배기가 가능해요. 아침은 그래도 운치가 있다. 오늘 같이 일찍 일어난 일요일 아침이면 더욱 그렇다. 커피 한잔을 들고 낡은 런닝에 추리닝만 걸치고 아직 덥지 않은 아침 태양아래 나 만의 옥상에서 낡은 소파에 앉아 먼 하늘을 쳐다 보는 것은 여전히 내 자취 생활을 탁하지 않게 해주고 있다.
오늘로 하숙집을 떠나 온지 16일이 지났다. 그 동안 학원 생활은 심한 변화가 없었다. 그녀에게 연락한다 하는 것이 미루다 보니 오늘까지 연락을 하지 못했다. 커피와 잘 어울리는 담배를 찾지 못했다. 담배 사러 가는 김에 그녀에게 연락을 해 보자.
담배를 한 보루 사고 나서 근처 공중 전화에서 하숙집으로 전화를 걸어 봤다. 결번이랜다. 뭐야 이거. 쩝. 잃어 버렸다. 나영씨를 말이다.
28편
결번이라는 말을 듣고 문득 느낀 그녀를 잃어 버렸다는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하숙집을 떠나와 지금까지 그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연락을 미루었을까.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이렇게 급하게 집이 비워 질 줄은 몰랐다고 자책해 보지만 많은 아쉬움
이 밀려 온다. 불과 보름이 지났다. 그런데 그녀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그녀의 얼굴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이리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일까. 내 자취방에 들어 와서도 계속 그녀 생각 뿐이다. 가슴 한 구석이 뻥 뚤려 어디론가 달아난 느낌이다. 십자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따라 담배가 녹고 있다. 많은 것들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 연기처럼 말이다. 쉽게 떠올지던 그녀의 얼굴마저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묵었던 하숙방, 주인 아줌마, 하숙집 학생들, 존재했다는 것은 뚜렷이 기억되나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 으앙, 진짜 잃어 버려 잊혀지는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다음날 학원을 가기 전에 하숙집을 찾아가 보았다. 빈 집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 마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전화국에 전화 번호 추적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어디로 간 걸까? 분명 서울 어딘가일텐데... 서울이 우리 고향 크기만 되어도 내 도시 전체를 그녀 찾아 돌아 다녀 볼 수 있을텐데, 서울은 그러기에는 너무 크다. 신문에다 광고를 내어 볼까? 별 생각을 다해 보지만 잃어 버린 느낌이다. 내가, 아니 그녀가 조금만 젊었어도 잃어 버렸다는 느낌이 이처럼 많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로 지내기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없이 잊혀지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경험했었는가. 생각없는 시간따라 사춘기적 첫사랑 소녀의 얼굴은 온데 간데 없고, 대학 들어 가 설레였던 어떤 아가씨의 모습도 그려지지 않는다. 그녀도 그렇게 잊혀 질 것만 같다.
학원을 파하고 종석이 형을 만났었다. 뭐 그리움이니 어쩌고 하더니 요즘 주영씨랑 잘 만나나 보다. 내 얼굴 표정보다는 확연히 밝다.
"오늘은 한 잔 하러 안가냐?"
"그럴 기분 아니에요."
"그녀가 시집을 안 가려나 봐."
"누구요?"
"주영이지 누구긴."
"요즘 만나요?"
"아니."
"그때 집들이 했을 때, 약속이 있다면서 나갔잖아요."
"아, 그때는 멀리서 보고 왔지. 다행히 맘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더라."
"네?"
"내가 어찌해서 주영이가 선보는 시간하고 약속 장소를 알아 냈었잖아."
"그럼 선보는 것 미행하러 갔던 거에요?"
"응."
이건 완전 또라이 아닌가?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로 측은한 미소와 함께 이 녀석 생각보다 순정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어요?"
"보고는 싶는데, 내 처지가 그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 멀리서 보고 왔지."
불쌍한 놈.
"형이 근처에 있던 것을 눈치 채지 못하던가요?"
"나가면서 나에게 인사하고 갔어."
하기야 그때 자네 머리 모양은 사람들 시선을 끌고도 남았겠지.
"형도 선이나 보지 그랬어요?"
"지금 내 처지가 선 볼 처지냐. 그리고 난 연애해서 사랑하는 사람한테 장가 갈거다."
"그러면 주영씨에게 좀 적극적으로 나서 보세요."
"내가 말했잖아. 주영이가 나와 같은 처지가 힘들어서 자기 꿈을 접었는데 내가 접근해서 부담스럽게 하기가 싫어."
좀 바보군. 아니 많이 바보군. 저런 놈이 아직 있었군.
"표정이 그런데로 밝네요?"
"요즘 그녀에게서 간혹 전화가 와. 날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지. 잊지 않고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 하하."
"그러다 진짜 시집 가버리면요?"
"그러면, 음... 모르겠다. 그녀가 행복해 하면 되지 뭐. 근데 요즘 말하는 걸로 봐서 다시 학원을 다닐 것도 같아. 꿈이라는 것이 어렵다고 쉽게 포기되어 지는 것이 아니거든."
"종석씨."
"왜."
"나중에 주영씨 시집가면 내 술한잔 살게요."
"그게 무슨 말이냐."
"바보군요."
지금 내가 자네 걱정 할 때가 아니지만 하는 것 보니까 많이 걱정 된다.
"사랑은 바보처럼 하는 거야. 기교 부리면 안되지. 묵묵히 마음만 주면 되지 암."
자네는 차라리 철학관 운영하는 것이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 저런 우던한 놈이 있을 줄이야. 나중에 주영씨 딴 남자한테 시집가면 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술 한잔 사리다.
삼 일동안 밤마다 그녀 얼굴 그려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졸업하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학교 동기들의 얼굴들도 잘 그려지는데 그녀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잘 그려지지 않는다면 생각도 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내 마음 떠오르는 생각들로 사람을 만든다면 나영이를 열도 더 만들 수 있겠지만 그녀의 기억만 생생하게 떠 오를 뿐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오늘 창문을 들어오는 희미한 밤바람 따라 내 마음을 정리 했다. 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잃어 버렸다고 생각하니까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다. 아무래도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맘을 품고 있었나 보다. 그랬다면 좀 더 잘해 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그녀를 잃어 버린 느낌 만큼 아쉽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내가 왜 감정이 생겨야 하나? 그녀와 같이 살면서 이런 쪼잔한 생각을 했었나 보다. 이 쪼잔한 생각으로 내 마음을 알리지도 못한 채 사랑한 사람을 잃어 버린 나는 바보다. 잠이 안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한편을 적었다. 나도 따지고 보면 글 쓰는 사람이니까 시 쓴것이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유치한 시다. 종석이 형 닮아 가나 보다. 그렇지만 지금 심정으론 이 시 느낌이 좋다. 어짜피 나만 볼 신데 유치하면 어떠냐. 제목만 적어 보자. 나이 서른 쯤에는 단 하나의 이유로 많은 것들을 잊어 갈 것이다.
오늘 밤은 그리움이 주책없이 밀려 와 잠이 쉽게 들지 않을 것 같다. 방 안이 덥다. 낮동안 바로 햇빛을 받은 천정이 아직 식지 않았다. 옥상 바닥이 따뜻했다. 내가 앉은 소파보다 더 낡은 소파를 마주하고 앉았다. 좁다고 생각했던 이 옥상위의 서울 하늘이 오늘은 너무나 넓어 보인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달빛이 웃고 있다. 거기에 그녀가 걸려 있다.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지만 느낌이 거기에 있었다.
금요일 저녁이다. 학원을 파하고 종석이 형의 개떡 사랑 철학을 잠시 듣고 거리로 나섰다가 참으로 크게 웃었다. 그 웃는 내 얼굴 표정이 너무나 아름다웠을 것이다. 내 못 봤지만 그랬을 것이다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해가 다 기울어 어두운 저녁인데 선글라스는 왜 끼고 있냐? 내 어제 그렇게 자네 생각을 했었는데 모자쓰고 선글라스 꼈다고 못 알아 볼 것 같냐. 여긴 왜 왔을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날 분명히 본 것 같은데 왜 돌아서서 가냐. 졸라 뛰어 쫓아갔다. 그리고 반갑게 등을 쳤다.
"나영씨!"
"저, 알아 봤어요?"
잃어 버렸던 것을 찾았다.


29편

선글라스를 내려 깔고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날 쳐다 보는게 무지 귀엽다. 많이 반가와 웃었는데 그 모습이 그녀에게는 낯익지 않은 모습이었나 보다. 그녀는 나처럼 웃지를 않았다. 잊혀 지는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꿈만 같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음."
그녀가 말하기를 머뭇거린다. 상관없다.
"너무 반갑다."
"진짜에요?"
"그럼요. 잊어 버리지나 않을까 얼마나 걱정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갈 때는 말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가 놓고서는."
"네?"
"연락처라도 남겨 놓고 갔어야지 그냥 가면 어떡해요?"
"미안해요. 경향이 없어서."
"며칠동안 경향이 없어서 전화 한 번 없었어요?"
"죄송. 한다 하는 것이 늦어 버렸어요. 내가 어디로 이사한지 궁금했지요?"
"별로."
무안하게스리... 내가 이렇게 반가운 모습 보이면 자네도 좀 반가운 척 웃어봐라. 그녀는 별로 반가운 표정은 아니다.
"여기 근처에 일이 있었나 봐요?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 덜 걱정했을건데."
"우연으로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우연같다.
"참 어디로 이사했던 거에요?"
"내가 이사한 것은 아나 보네."
"네. 집들이 안해요?"
"안해요. 동엽씨는 어디로 이사했어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저 자취해요. 아무래도 하숙해서는 밥 먹을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요."
"자취해요?"
"네."
"제대로 해요?"
"그럼요. 내 자취방 분위기 좋아요."
"대충 상상해 보니까, 음 엉망일 것 같네요."
"진짜 분위기 괜찮은데..."
"동엽씨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그렇게 말하시고 여하튼 저도 만나게 되서 반갑네요."
그게 반가운 표정이냐? 꼭 말하는 투가 가 버릴 것 같다. 내 자취방 구경 시켜 주고 싶은데...
"가시게요?"
"네, 아직 울 언니가 한국에 있어요. 일찍 들어 가봐야 돼요."
"그럼 연락처라도 하나 주시고 가세요."
"아직 전화가 없어요. 음..."
"무슨 할 말 있어요?"
"동엽씨도 연락할 만 한 거 없죠?"
"네."
"기왕이면 통신장비 하나 구비해라. 휴대폰 시대에 어떻게 전화도 없냐."
반말인거 같다? 그래도 반갑기 때문에 참았다.
"나영씨도 없잖아요."
"나는 곧 내 방에 전화가 설치될 거에요. 동엽씨랑 비교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냥 가 버리면 언제 다시 보나? 어디로 이사 간거에요?"
"연락할 맘은 있는거에요?"
"네."
"그런데 왜 이사할때는 간단 말도 없었고 어디로 이사갔단 연락이 없었을까?"
"그때는... 잘 몰라서 그랬어요."
"뭘 몰라서? 우리 집 전화번호 잊어 버렸어요?"
"그건 접어 둡시다. 에...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일요일날 시간 되면 함 만납시다."
"어디서요?"
"시간은 되세요?"
"그럭저럭."
"우리도 이런 후진 동네서 만나지 말고 강남이나 종로 쪽 극장가나 대학로나 남들 자주 가는 곳에서 만납시다."
"나는 그런 곳에 자주 가요."
"그렇습니까? 그럼 어디서 만날까요?"
"음... 우리 영화나 보러 갈까요?"
허허, 나도 여자가 먼저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들어 보네.
"그럽시다. 무슨 영화 볼까요?"
"요즘 무슨 영화가 인기에요?"
"모르는데요."
"누가 백수 아니랄까봐."
"극장 가면 볼 영화 없겠어요? 한시쯤에 서울 극장에서 보실래요?"
"한시쯤 서울 극장이요? 이 번 일요일 말이지요?"
"네."
"그럼 그 때 봅시다. 안녕."
그녀가 깜찍한 인사를 하고는 등을 돌렸다. 참 쉽게 돌아서 버리네. 그래도 다시 만날건데 뭐. 어디로 이사한 지는 결국 가르쳐 주지 않고 가버리는 구나. 쩝.
허허, 나는 히죽 거리며 그녀의 멀어 지는 모습을 보며 섰고, 그녀는 자주 뒤를 돌아 보며 멀어져 갔다. 돌아설때는 쉽게 돌아서더니 가면서 왜 자꾸 뒤돌아 보는 것일까? 헤헤, 기분 좋다.
하마터면 잃어 버릴 뻔한 나영이를 다시 찾았다. 뭔가 그녀와는 인연이 있나 보다. 이렇게 길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가만 그녀가 예전에 울 학원 앞을 한 번 왔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일부러 나 찾으러 왔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말하는 표정으로 봐서는 전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어찌됐던 만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짧은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혀 놓으니까 하숙집 그녀가 대학생처럼도 보인다.
잘 가시오,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가 내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 보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모습을 보니 좀 늙어 보이기도 한다. 진짜 늙어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 그녀의 모습에 비해서 말이다. 헐렁한 남방에 양복바지. 헝컬어진 머리가 내려와 내 눈에 비친다. 턱을 만져 보니 까칠하다. 대충 내 모습이 짐작이 간다. 나도 좀 젊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삼층 옥상까지 단번에 올라갔다.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자취방이 유난히 밝아 보인다. 컵라면 하나 끓여 먹고 오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 신나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물론 노래 제목은 모른다.
노래 리듬 따라 고개를 흔들다 옷을 벗었다. 좀 추한 행동이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떠리. 사각 팬티만을 남겨 놓은 채 욕실로 들어 갔다. 욕실 문이 방안에 있는데 발가 벗고 간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낯을 씻었다. 쉐이브 크림이 없는 관계로 비누 거품을 만들어 얼굴에 묻혔다. 들리는 음악소리 따라 면도를 했다. 영화에서 보니까 분위기 있게 음악 소리에 맞추어 면도 잘만 하던데, 나는 고개 끄덕이면서 면도하다가 피봤다. 좀 따끔거리는게 아팠다. 함부로 따라 할 것이 아닌가 보다. 하지만 내 웃는 얼굴을 바꿀 수는 없었다.
기분이 좋아서 물 한 바가지 뒤집어 썼다. 어제 갈아 입었는데 씨, 앞으로 사흘은 더 입을 수 있는 빤스를 다 버렸다. 물에 젖은 빤스를 벗어 변기 옆에다 패대기쳤다. 기분이 좋아서... 저건 나중에 눈에 띄면 빨지 뭐. 아이 부끄러버라. 다 벗어 버렸네. 거울 보며 포즈 몇번 취하다가 물 또 뒤집어 쓰고 머리도
감고 나왔다.
시원하다. 깨끗한 몸에 깨끗한 속옷을 입고 밖에 나갈때 입는 패션 추리닝을 입었다. 집에서 입는 저 추리닝은 좀 빨아야 겠다. 분위기 있게 담배를 물고 옥상으로 나가 내 소파에 앉았다. 담배 연기가 밤 하늘에 퍼져 간다. 오늘 그 잠시 봤다고 그녀 얼굴이 잘 그려진다. 서울 하늘이 다시 좁아 보였다. 그녀를 다시 만나는데 걸린 시간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흠, 성공할 수 있다. 아자! 아자! 아이씨, 조용히 하면 될 거 아녀.
토요일은 일찍 일어나서 방청소를 했다. 신선한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오랜만에 밥을 앉혔다. 그 또한 신선한 기분 때문이었으리라. 즉석 육개장을 사서 햄조각이랑 달걀이랑 넣어 찌개도 만들었다. 그리고 청소 되어진 깨끗한 내 방에서 나만의 조찬을 즐겼다.
옥상에 나가 정오가 가까워진 태양아래서 이단 옆차기 연습도 했다. 별 짓 다했는데도 시간은 빨리 가지 않았다. 심심하다. 약속 시간은 아직 스무네시간이 남았는데 지금부터 설레인다. 하숙하면서 자주 볼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 느낌이 좋다. 오후에는 미용실을 가 보자. 빨래도 해 볼까?


30편

하루의 해가 지고 있다. 따뜻한 나라에서 내 빨래들이 마르고 있다. 짧게 잘려진 내 머리가 바람에 시원하다. 옥상에서 보는 하늘 따라 늘어선 높은 건물 사이로 해가 수줍게 작별을 하고 있다. 황금 빛이다.
밥상을 펴 놓고 앉았다. 책을 보며 글을 쓰다가 웃었다. 한 줌 미소속에 행복이 숨어 있으리라. 시간에 떠맡긴 무료한 마음이지만 오늘은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느니, 소중한 사람이여 지금 내 모습을 보고 그대도 미소 짓는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으이. 오늘은 하숙집 그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정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단지 다시 만난 반가움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물음표는 아직 존재하고 있지만 오늘 나는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하다.
안개 속을 걷는 사람의 발걸음이 가벼울 수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 자신있게 발걸음을 뗄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마음도 위축되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이 그렇다.
얇은 이불로 배만 덮고 누워 불꺼진 천정을 바라 보았다. 하숙집 그녀가 없었더라면 내 생활이 참 막막했을 거란 생각을 해 보았다. 아직 그녀의 마음을 모르기에 자신은 없지만 내일 그녀에게 넌지시 내 마음을 표현해 봐야겠다. 어떻게 표현해 볼까?
일찍 일어나 맞은 아침은 상쾌했다. 밥솥에 아직 밥이 있다. 마음마저 넉넉하다. 김치 한접시와 달걀 프라이 하나로 반찬은 꾸며져 있지만 아침부터 밥을 먹는다는 것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사소한 것에도 미소를 주자.
밥을 맛있게 먹었다. 어제 머릴 감았는데 오늘 또 머릴 감았다. 사람이 갑자기 변화면 죽을 때가 된것이라는데, 괜히 감았나? 오래 살아야 되는데.
나갈 준비를 마치고 소파 아래서 태양이 바로 쏘아 내리는 직사 광선을 맞으며 담배 한 대 폈다. 지금 나가면 너무 일찍 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야, 극장 앞에 사람들 참 많네. 참 지금 학생들은 방학을 했겠구나. 얼마만이냐. 그녀를 찾아 봤으나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약속 시간까지 한 십여분 남아 있다.
약속 시간이 십여분 지났다. 그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날씨가 덥다. 실내 대기실에 들어가서 혼자 앉아 있기가 싫었다. 그녀가 나타나면 바로 봐야 하는데, 영화 간판 밑 그림자를 친구삼아 앉았다. 그래도 덥다.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이 삼십분도 더 지났다. 그녀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얘가 왜 안 오는겨? 혹시 서울 극장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약속 시간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 같이 살아 봐서 아는데 그녀가 약속을 펑크내고 할 사람은 아니다.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허허, 사람 기다리면서 걱정 해 보는 것은 처음 인 것 같다. 왜 안나타는겨?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조금씩 길어지는 그림자 따라 다리를 뻗었다. 다시 십분 쯤 지났을 때 급히 뛰어오는 아가씨를 보았다. 베이지색 엷은 치마자락이 아름답다. 나 여기 앉아 있오. 뭘 그리 두리번 거리냐. 다행이다. 사고 난 것은 아닌가 보다. 사지 멀쩡하다. 하숙집 그녀가 나타났다. 날 발견 하지 못했다.
"나영씨, 여기에요."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미안한 웃음을 짓고는 다가 왔다. 한 손에는 뭘 들고 있다.
"미안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그럼요."
"네?"
"많이 늦은 거 맞다구요."
이런말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버릇이 됐나보다.
"그렇다고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럼 뭐라고 해요?"
"됐어요."
뭐가 됐다는 거냐? 저건 내가 해야 될 말인데. 그녀의 얼굴에 땀이 가득하다. 손수건이라도 있으면 건네 줄텐데. 내 손이 지금 깨끗한가? 오늘 아침에 머리까지 감긴 손인데 더러울리가 없다.
"땀이 많이 낫네요?"
그녀 얼굴 만져 본 것은 같이 살면서도 처음인 것 같다. 그리 싫어 하는 표정은 아니다.
"그러니까 다시 미안한데요."
"늦은거요?"
"네. 울 언니 오늘 오전에 출국했어요."
"언니가 벌써 갔어요?"
"네. 생각보다 빨리 살던 집이 처분되어서요."
"공항갔다 온거에요?"
"네."
"서운하겠다."
"괜찮아요. 떨어져 살던 시간이 오래되어서 적응이 됐나봐요."
"그럼 이제 혼자네요."
"그렇네요. 하지만 지금은 동엽씨랑 같이 있는데."
"그렇구나. 그 들고 있는 것은 뭐에요?"
"영화 봐야죠?"
묻는 말에 답은 안하냐?
"그래야지요. 뭐 볼래요?"
"아무거나."
서울극장 상영관 여섯게 중에 매진 안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녁 무렵으로 갈 수록 매진율은 더 심했다. 그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볼게 하나도 없네요. 오늘 영화 볼 팔자는 아닌가 보네요."
으이씨, 그렇게 말하면 안돼지. 같이 영화 본다고 내가 얼마나 설레어 했는지 아십니까? 극장이 이거 하나 뿐이냐? 저 건너편에도 극장 있잖아. 너 은근슬쩍 볼 영화 없다는 핑계로 가버리려고 그러지?
"영화 봐야 되는데요."
"꼭 영화 봐야 되요?"
"그럼요. 저 건너 극장에 가 봅시다."
"그럴까요 그럼."
힘드냐? 걸음걸이가 영 시원찮다. 한 시간이나 늦게 와도 나처럼 관대하게 대하는 사람이 많은 줄 아남. 영화 봐야돼. 단성사도 매진이었다. 피카디리? 당연히 매진이었지. 무슨 날인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근데 서울에도 장이 서나?
"동엽씨 오늘 영화 못 보겠다."
"한군데 남았잖아요."
"다른데 갈거에요? 나 오늘 많이 걸었어요. 오늘은 구두 굽도 높아서 발 아파요."
그러고 보니 오늘 나영씨가 다른 날 보다 좀 커 보이긴 한다.
"멀리 안가도 돼요. 피카디리 옆에도 극장이 하나 있네요."
"저긴 이륜데. 그리고 제목도 낯선 영화잖아요."
"어짜피 우리가 뭐 제목보고 영화 보러 왔나요. 영화 보는데 의의가 있지."
내가 왜 영화 보는데 목숨을 거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를 붙잡긴 위해선 영화를 봐야했다.
"그래요. 그럼 저거라도 봅시다."
"표는 내가 살테니까, 나영씨가 먹을 것 사세요."
"알았어요."
공주도 대충 시킨데로 하는구나. 허허.
그 극장은 표가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쌩판 모르고 영화 보기는 처음이다.
옆 극장에서 하는 걸 이 극장에선 예고편으로 내 보내는 구나. 저거 재밌겠다. 헤헤,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있다. 이 여자가 정말, 나도 신발을 벗지 않았는데...
완전 예술 영화였다. 배우들이 하는 말도 영어가 아닌 것 같다. 전함 포템킨과 막상막하다. 그래도 대형화면이라 비디오 보다는 볼만했다. 어깨가 왜이리 무거운겨.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어 있다. 기분좋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것까지는 말이다. 예전에 포템킨 보면서 의심했던 것에 확신이 들었다. 그때도 잤었구만. 그래 잘 자라. 영화 보다 보니까 볼만 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팝콘을 조심스럽게 뺏었다. 내가 팝콘을 혼자서 다 먹는 동안 그러니까 영화 끝날때까지 내 어깨는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새근 새근 그녀가 잘도 잔다. 그녀가 잠 깨지 않도록 내 영화 보면서 자세를 바꾸지 않았었다. 그래서 앉은 자세가 좀 불편하기는 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나영씨."
"네!"
뭘 그리 놀라냐.
"영화 끝났어요."
"아, 제가 잠시 졸았네요."
뭘 한시간도 넘게 잤으면서.
"영화 그런데로 괜찮았죠?"
"네."
"무슨 내용인 줄은 알겠어요?"
당연히 말 못하겠지.
"좀 어려운 영화네요."
뭘 어려운 영화야. 보지도 않았으면서.
"일어 납시다."
"그래요."
그냥 일어나면 어떡하냐. 신발은 신어야지. 자네 공주 맞냐? 그 들고 왔던 것도 챙겨야지.
"어제 잠 안 잤어요?"
"네, 거의. 언니가 다음 날 갈 것이라 생각하니까 할 얘기가 많았어요. 밤새 얘기 했네요."
"그랬군요."
"제가 오래 졸았나요?"
"아니요. 오래 잤어요."
잠이 덜 깬 듯한 그녀를 데리고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아까보다 더 더운것 같다. 시원한 냉커피나 팥빙수가 생각난다.
"집에 바로 갈거 아니죠?"
그녀가 날 멀뚱히 쳐다 본다.
"흠, 오늘 동엽씨 집 구경하려고 생각했는데."
"그래요?"
"저녁도 먹어야 하잖아요."
"우리 집에 먹을 것 없는데요."
"집 지저분해서 보여주기 민망할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리죠?"
"아이, 우리집 분위기 있고 좋아요."
"여기서 돈 쓰지 말고 동엽씨 집에 가서 놀아요."
"안 바빠요?"
"백수가 뭐가 바쁘겠어요."
오호라, 이제야 자기도 백순걸 인정하는구나.
"나영씨는 백수아니라면서요."
"어쩔수 없이 지금은 백수인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네요."
"근데 먹을 것은 진짜 없어요. 저녁은 제 단골이 된 식당에서 먹을래요?"
"그래도 되구요."
"그럼 갑시다. 그집 갈비탕 맛있어요. 내가 사줄게요."
"고마워요. 동엽씨 집에 간 김에 방 청소도 좀 해주고 와야 겠다."
"내 방 진짜 깨끗하다니까 왜 못 믿지?"
"같이 살아봐서 그 말을 못 믿겠네요."
같이 살아 봤다는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31편

흔들리는 버스타고 집으로 왔다. 아직 그녀는 공주였다. 빈자리가 생기자 나 쳐다보지도 않고 훌쩍 혼자 앉아 버렸다. 지만 다리 아프나.
"아줌마 안녕."
"음 동엽이 총각 왔네. 오늘은 예쁜 아가씨도 있네."
"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동엽씨 벌써 이름까지 알 정도로 단골이 된 거에요?"
"하숙 할때도 간혹 왔었어요. 그러다가 자취하면서 완전히 단골이 됐지요. 뭐 드실래요?"
"갈비탕 먹자면서요."
"그래요? 아줌마 여기 갈비탕 곱배기 하나하구요. 보통 하나요."
"갈비탕도 곱배기가 돼요?"
"그럼 안됩니까?"
나는 곱배기고 자네는 보통인데 왜 나는 이제 다먹어 가는데 자네는 아직 그대로냐? 숟가락을 놓았다.
"동엽씨 왜 안 먹어요?"
"보조 맞출려구요."
"저는 적응이 돼서 괜찮으니까 빨리 드세요."
"싫어요."
그녀의 먹는 모습을 찬찬히 지켜 보았다. 참 귀엽게 먹네. 작은 밥상에서 마주하며 밥 먹은 때가 참 그립다. 씨, 괜히 기다렸다. 다 먹지도 못하면서 보조 맞추라고...
이번엔 그녀가 내 먹는 모습을 찬찬히 지켜 봤다.
"커억."
"여전하군요."
집 근처로 갈 수록 내 방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졌다. 그녀에게 보여 주려 하니까 동네 분위기가 좀 낡은 듯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나를 따라 이집일까, 두리번거리면서 걷고 있다.
"여기에요."
"이집이에요?"
"네. 옥상 옥탑방이 내 방이에요."
"동네 분위기는 그렇게 좋은 줄 모르겠는데요."
"올라 가 보실래요?"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요."
"혹시 저녁시간이고 외간 남자 혼자 사는 방에 홀로 간다는 것이 좀 꺼림찍 하진 않은가요?"
"그건 동엽씨 모르는 사람에게나 물으시고, 올라 갑시다."
몇 개월이나 살았다고 졸라 아는 척이야. 날 그렇게 잘 알면 좋아한다던지, 아니면 사랑한다던지 말해 주면 내 마음도 안 헷갈릴 것 아닌가. 내 마음은 굳어지는 것 같다. 자네를 사랑하는 것이 맞다는 쪽으로.
"그래 올라갑시다."
"옥상이 좀 지져분하네요."
"분위기 있어 보이지 않아요? 저 소파에 앉아 하늘 쳐다 보면 얼마나 분위기 있는데요. 여자라도 마주 앉혀 놓으면 진짜 분위기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여자라도?"
뭘 째려 보냐.
"쩝, 방에 들어가 보실래요?"
"그래요."
방에 들어가자니까 부엌은 왜 둘러 보냐. 다행히 오늘 청소를 했던 관계로 깨끗해 보였다. 근데 싱크대 한쪽으로 쌓여진 컵라면들이 그녀에게 뭐라 말할 빌미를 제공할 것 같다. 맞구나.
"대충 짐작한데로 식생활에선 문제가 많아 보이네요."
니가 무슨 사감이냐. 그녀가 싱크대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고는 먼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안 들어 가요?"
"들어 가요."
"방은 생각보다 깨끗하네요. 오늘 청소 했죠?"
"원래 깨끗해요. 그냥 앉아야 겠네요. 방석이 없어요."
"상관 없어요. 방안이 좀 삭막해 보인다. 화분이라도 하나 갖다 주어야 겠네."
참내, 완전 니 방처럼 말한다. 그녀가 방안을 둘러보면서 앉았다.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은 방 구석으로 밀어 버린다.
"커피는 있는데 드실래요?"
"한잔 끓여 와 봐요."
커피 포트에 물을 올리고 컵을 가져다 그녀에게 주었다.
"이게 다에요?"
"여기 커피 믹스 하나. 물 드릴테니까 타서 드세요."
"푸후후."
"왜 웃어요?"
"원두커피기계는 왜 산거에요?"
그것도 봤냐?
"간혹 원두커피도 끓여 마셔요."
"동엽씨 자취한 지 이제 한달 다 되어 가죠?"
"네."
"조금 더 지나면 내가 많이 그리워 지겠다."
벌써 그리웠었는데.
"네?"
"내가 해 주던 밥이 조금 있으면 그리워 지겠어요."
"나영씨도 자취하죠?"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어디서 해요?"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동엽씨 같으면 걸어서도 갈 수 있을 걸요."
"진짜에요?"
"네."
"이 근처에요?."
진짜 반가운 대답이다. 별로 멀지 않은 곳에 그녀가 살고 있다면 자주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
"구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나중에 가르쳐 줄테니까 자주 놀러 오세요. 밥 먹고 싶으면 내 차려 줄테니까 오세요."
얘가 왜이리 친절하게 내 마음을 뺏어가냐. 내 오전에 마음 먹었던 걸 그냥 말해 버릴까?
"나영씨."
"왜요"
"저 있잖아요."
"말 하세요."
"그 있잖습니까."
"뭐가요?"
"나영씨는 시집 언제 갈거에요?"
담에 말하자. 서두를 필요 없다.(서두르면 작가가 곤란하다.)
"내년에는 가야 겠지요. 나는 결혼은 꼭 할거에요."
"내년에요?"
"네."
그말에 마음이 좀 무거워 졌다. 빨리 가면 안되는데...
"사귀는 사람이 있나 보네."
"동엽씨, 저하고 같이 있을때 제가 누구 사귀던가요?"
"아니요. 그럼 사귀는 사람도 없이 내년에 시집 갈 생각하고 있는거에요?"
"네. 내년에 꼭 갈거에요. 혼자서 오래 살 자신이 없어요. 마땅한 사람 생기겠죠 뭐."
"맘데로 가세요 그럼."
좀 안심이 된다. 살다보면 적응 돼. 누가 공주 아니랄까봐. 니가 내년에 가나 안가나 내 두고 볼거다. 헤헤, 못 갈 것 같어. 아니다 못가라.
"나영씨."
"왜요?"
"커피 들고 잠깐만 나와 봐요. 방이 덥잖아요."
"아까 본 소파에 앉으려구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여자라도 마주 앉혀 놓으면 좋다고 했잖아요. 저도 여자가 맞거든요."
"분위기 괜찮아요 진짜."
"알았어요. 그럼 나가요."
허허, 그 소파의 여자 주인공은 하숙집 그녀 였구나. 그때 종석이 형을 괜히 앉혔다.
"동엽씬 구두 신고 나가요."
"왜요?"
"제가 슬리퍼 신고 나갈게요. 구두가 새로 산것이라 좀 아프네요."
"새로 산거에요?"
"몰랐죠?"
대충 여자들 자기 새로 산 물건 자랑하는 방법을 알겠다. 저런식으로 자랑하는구나.
그녀를 마주하며 커피를 마셨다. 밤하늘이 느긋하게 깔리고 있다. 날 보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꾸밈없는 미소가 맺힌다. 자주 이랬으면 좋겠다.
"동엽씨 나 너무 늦으면 안돼요."
"아직 많이 늦은 시간은 아닌데..."
그래 좀더 있다가지 왜 벌써 가려 하나.
"지금 간다는 말이 아니고, 온 김에 방 청소라도 해 주고 가야지. 내가 그래도 동엽씨 하숙하던 집 주인 딸이었잖아요. 나 어려울때 도와 준 것도 있고."
"방 깨끗하잖아요."
"동엽씨 보기엔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앉아서 얘기나 좀 더 하고 가면 좋겠구만.
그녀가 방을 썰고 닦았다. 옷차림이 청소하는데 맞는 옷차림이 아닌데, 안그래도 밝은 색이라 더러워 지면 어쩌려고... 욕실은 그냥 놔 두세요. 나만 쓰는 것이라 좀 그런데. 그녀가 기어이 팔을 걷어 부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동엽씨."
"왜요?"
그녀가 욕실로 들어 간지 채 몇 분 지나지 않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손을 뻗혔다.
"이거 동엽씨 꺼 맞죠?"
에구 쪽팔려라. 그녀의 손가락에 들려 있는 것은 물에 젖은 내 빤스였다. 어제 빨래 하면서 저걸 왜 발견 못했을까? 무슨 여자가 남자 팬티를 아무 꺼림낌 없이 들고 난리냐.
"그...그거 제꺼 맞긴 한데요. 제발 그냥 놔 두세요."
"오디오 장식장도 모자라서 이젠 변기 구석이에요?"
"제발 그냥 놔두세요."
"봤는데 어떻게 그냥 둬요. 빨아야지. 수건도 빨아야 겠어요. 더 빨것 있으면 가져와요."
차라리 외면하자.
어제 걸었던 빨래들은 이미 다 말라 있었다. 그녀가 빨아 준 내 빤스랑 수건들을 어제 걸어 논 빨래 들 사이에 걸었다. 그녀는 지금 빨래했던 손이랑 얼굴을 씻고 있다.
"다 걸었어요?"
"네."
"빨래는 자주 하세요. 아니면 제게 들고 오던지. 우리집에는 세탁기가 있으니까."
"알았어요."
세수하고 나온 그녀의 얼굴이 화사하다. 화장한 얼굴보다 더 친숙한 얼굴이다. 하숙집에서는 늘 저 얼굴이었으니까.
"나 이제 가 볼게요."
"나영씨 집이 어딘지 알겸 데려다 줄게요."
"그러세요."
"그럼 지금 같이 나갑시다."
"네."
"참, 아까 들고온 가방은 안 가져 가요?"
"아, 그거 동엽씨 거에요."
"네?"
"동엽씨 가던 날 샀던 옷인데요. 맘에 안 들어도 할 수 없어요. 이제 바꾸기도 어려워요."
"진짜 제 옷 샀던거에요?"
"나중에 와서 입어 보세요."
같이 살때는 잘 몰랐는데 애인이라도 이렇게 잘해 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 지금 많이 감격해 하고 있오.

32편

가는 길 낡은 가로등 따라 그녀가 말없이 웃었다. 너도 내가 좋긴 하지? 말 잘못 했다가 이 좋은 느낌 깨버리면 가슴 아플 것 같다. 20분 가량 그녀와 길을 걸었다. 그녀집 가는 길이다. 제법 크고 높은 건물 앞에서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건물에는 **오피스텔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랏! 오피스텔이네. 나영씨 사는데가 여기에요?"
"네. 동엽씨처럼 자취방인 줄 알았어요?"
"그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하숙집 판 중도금으로 구했어요. 전세에요."
"몇호에요?"
"안들어 가 보실래요?"
"몇 혼지만 가르쳐 주세요. 시간이 늦었어요. 가 봐야지요."
"405호실이에요."
"음, 405호. 알겠습니다."
"진짜 가시게요?"
"자주 놀러 올게요. 그래도 되지요?"
"그럼요. 하루 이틀 같이 산 처지도 아닌데."
"그럼 잘 들어 가세요. 전 갑니다."
"안녕."
그녀가 손을 흔든다. 허허, 나도 이틀 전 그녀처럼 자주 뒤를 돌아다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가졌다. 그녀도 나를 보고 서 있다.
히히, 걸으면서 그녀가 떠오를 때마다 히죽거렸다. 뭘봐 쨔샤. 나만 히죽거리는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와 비슷한 놈을 만났었다. 문닫힌 만화방 앞을 서성거리며 거기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나처럼 히죽거리는 백수같은 놈을 보았다. 웃긴 만화책을 봤나? 아니면 자네도 기쁜일이 있냐? 많이 기뻐해라.
룰루 랄라, 삼층 계단을 숨도 안쉬고 뛰어 올라갔다. 다 올라와서 발을 헛디딘 관계로 넘어졌다. 많이 아팠다. 달이 내 모습을 보며 놀리 듯 웃고 있다. 손에 잡히는 곳에 있다면 잡아서 한대 패 줄텐데 너무 높다. 그럼 달에 걸려 떠오르는 그녀도 높이 있는 것인가? 하기야 나는 삼층인데 그녀는 사층에 사니까 분명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훗, 내 미래가 조금만 더 밝아도 내 마음이 그녀따라 밝을텐데 아쉽다.
요즘 학원 생활엔 그다지 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몇 달이나 했다고 바로 결과를 바라겠는가. 더 노력을 해야 하지만 희망이 보이면 좋지 않은가.
그녀가 청소해 주고 간 내 옥탑방, 구석에 놓여진 탐스런 종이가방. 그녀가 놓고간 옷가방을 열어 보았다. 여름 셔츠 하나와 면바지가 들어 있다. 그리고 엽서 한장. 혹시 나를 기쁘게 하는 좋은 말이 있을까 읽어 보았지만 단 하나의 시 뿐이다. 그것도 그녀의 시가 아닌 이은미라는 사람의 시다. 이은미가 누구여? 가수 이은미 그 사람인가? 일단 시는 나중에 음미해 보고 옷을 입어 보자.
오늘 더움으로 인하여 땀이 많이 베인 내 옷들을 터프하게 벗어 던졌다. 음악을 틀어 놓고 부드럽게 벗는건데 잘못했다. 단추가 하나 떨어졌다. 단추 쯤이야 나도 달 수 있다. 음, 옷이 날개다. 단정한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 내 모습이 지금 반듯하다. 허허, 그녀가 주었기 때문에 이 옷이 너무 맘에 든다.
제목 좋다. 사랑입니까. 모르겠는데요. 엽서에 적힌 시의 제목은 '사랑입니까'였다. 이걸 나에게 물어 보면 안돼지.
당신 앞에 서면
나는 한 송이 이름없는 들꽃입니다.
밤돋아 피었다간 다투어 지는 꽃.
채 묻어나지도 못할 때깔로 피어선
지레 내일이 두려워지는
그대로의 작은 들꽃입니다.
가지는 안개에 싸였습니다.
움츠러진 이파리엔 벌써부터
밤 서리가 분분합니다.
시선을 기다리는 꽃잎은
말없이 고개만 떨구우고
가득 물 오른 뿌리에는
어느 새 열매가 그립습니다.
하, 달빛도 부끄러운 오늘은
제게도 사랑이 있음입니까.
이렇듯 하야니 온몸이 부서짐은
달빛 속에 선 까닭입니까.
당신 앞에 선 까닭입니까.
이해가 될 것도 같지만 조금 어려운 시다. 하지만 마지막 연은 맘에 든다. 당신 앞에 선 까닭입니까. 내 마음을 이해 해주는 단어다. 근데 왜 슬퍼지냐. 백수가 당신앞에 서 봤자 초라해지기 밖에 더하겠냐. 그녀가 주었던지 말던지 시가 내 처지때문에 슬퍼졌다.
그래 나는 이름없는 들꽃 같다. 함부로 사랑할 수 없는. 백수는 좋아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나이가 연애만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삶은 현실인데 말이다. 외로운 그녀 처지에 그리운 감상에 빠질만도 하다. 나는 시선만 기다리는 들꽃이 맞나 보다. 그녀곁에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녀가 말한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면 말이다. 백수인 나는 빠져야 되는구나.
갑자기 설버서 마음따라 울었다. 그녀가 사준 옷을 입고 그녀가 닦아 준 방바닥에 앉아 꺼이 꺼이 울어 버렸다.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녀는 한 줌 미소만 지어주고 떠나 버릴 것 같다. 그리고 그 미소가 좋아 나는 허허 웃겠지. 나는 초라한 들꽃이고 자기는 달이라 이거지. 그렇구만. 에이씨, 오늘 시집 언제 가냐는 말은 왜 물어가지고 스스로 초라하게 만드냐. 이 시가 그러니까 좋은 사람 두고 말 못하는 나를 묘사한 것 같아 너무 슬프다.
달빛이 부끄러워 밖에 나가지 못하고, 그녀가 사준 옷을 고이 접어 머리맡에 놓아 두고는 불을 껐다. 어둔 방을 장식하는 빨간 담뱃불과 밤안개처럼 번져가는 연기불로 삼분을 발악한 뒤에 잠이 들었다.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예전에 한 번 꾼적이 있는 꿈이다. 그녀가 결혼하는 식장에 가서 부조금 내고 밥 얻어 먹는 꿈. 첫번째 꿈에서 깨었을 때보다 훨씬 슬펐다.
내년에 내 나이 진짜 서른이다. 그녀가 내년에 결혼을 한다고 했지? 십자 창문 사이로 해 어스름이 밝아 온다. 나이 서른쯤에 내 사랑한 사람의 결혼식장에서 해 어스름이 밝아 오는 창을 멍한 눈으로 주시하며 혼자 가슴 아파했던 기억을 웃으며 지우자.
근데 왜 이딴 생각을 하는거야. 어제 그녀를 잘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이 왜 이딴 거냔 말이다. 성격 그 이상하네.배가 고파서 그렇나?
"커억!"
컵라면 하나 끓여 먹었다. 아직 여섯시도 안됐다. 너무 일찍 일어 났다. 다시 자야겠다.
"쾅! 쾅!"
이게 왠 소리냐. 참 낯익은 소리다. 그녀는 아닐테고 주인 집 아저씬가? 오랜만에 방문 과격하게 노크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계 바늘은 아홉시를 조금 너머 가리키고 있다.
"누구세요?"
"저에요."
"에?"
"저라구요."
"나영씨?"
"네."
뭐여 이거. 아침부터 그녀가 왠일일까? 후다닥 추리닝을 입고 문을 열었다.
"나영씨 아침부터 왠일이에요?"
그녀는 스테인레스 남비를 들고 웃고 있다. 그리고 하숙집에서 처럼 내 의사하는 상관없이 내 방을 떡하니 들어와 버린다. 조금 황당하다. 내가 지금 정신을 못차리는 상태가 당연할 것이다.
"아침 먹으려고 왔어요. 어제 보니까 아침에는 컵라면 먹는 것 같아서요. 이렇게 자주는 못해요. 오늘은 동엽씨 집 알게된 첫 날 아침이라 특별히 찌개 재료를 만들어 왔어요. 고맙죠?"
"고맙긴 한데..."
"밥은 있어요?"
"해야 될걸요 아마."
"그럼 밥은 동엽씨가 하세요. 나는 찌개를 끓일테니까."
"밥하는 것은 문제가 안되는데 이러면 제가 부담스러운데..."
나를 보던 그녀의 시선이 주방쪽으로 돌려지더니 걸음을 옮겼다.
"걱정마세요. 내일은 안 올거에요."
자기 주방인양 싱크대 앞에 서서 냄비에 물을 붓고는 가스렌지에 그것을 올려 놓는다.
"거기 쌀 좀 주세요."
"어디 있는데요?"
"싱크대 안쪽 검은 비닐 봉지에 있어요."
"얼마큼 드릴까요?"
"알아서 주세요."
그녀가 라면 끓여 먹는 대접에다 쌀을 담아 주었다.
"쌀 씻어야 되지 않아요?"
"욕실 가서 씻을게요. 여하튼 고마워요."
"고마운 줄 알면 됐어요."
아직 정신이 멍하다.
쌀을 씻어 방안에 있는 전기 밥솥에다 넣었다. 쪼그려 앉아 밥통에서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김을 보고 정신을 차리는 중이다. 그녀는 주방에서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다.
"동엽씨 밥상은 어디 있어요?"
"방에 있어요."
밥상은 책상겸용으로 쓰는 좋은 것이 있지. 밥상위에 놓여진 것들을 치워 방 중앙에 놓았다. 뭘까 이거? 아이씨, 모르겠다. 아침부터 그녀를 보게 되어 기분 좋다.
"동엽씨 냉장고도 있네요?"
"그거 제것 아니에요. 제 들어오기 전부터 있던 거에요."
"김치 있어요?"
"네. 냉장고 젤 밑에 보면 뜯지 않은 봉지 김치가 하나 있을 거에요."
"달걀도 있네요."
"그건 먹어도 되는거에요. 우유는 손대지 마세요. 빵두요. 다 유통기한 지난 것이니까."
그녀가 달걀 프라이와 김치를 밥상위에다 갖다 놓고는 후다닥 다시 주방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후다닥 밥그릇을 두개 갖다 놓았다. 왜 혼자 사는데 밥그릇이 두개가 있을까? 그녀가 냄새 좋은 찌개를 가져와 내려 놓고는 밥통을 보며 쪼그려 앉아 있는 내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보인다.
"어느게 동엽씨 숟가락이에요?"
"남자것처럼 보이는 거 있잖아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 여자꺼에요?"
"네."
"여자 것을 왜 샀는데요?"
"사고 싶어서 산게 아니라 셋트로 팔길래."
"그럼 이거 사용한 사람 있어요?"
"없어요."
"밥 아직 안됐어요?"
"뜸 들이는 중이에요."
그녀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에 다소 당황이 되었으나 오랜만에 그녀와 마주하며 작은 밥상에서 밥을 먹어 보는 것이 너무 좋다.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오늘 아침은 느낌 좋은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다.
자주 보던 모습이다. 젓가락을 물고 천천히 반찬을 주시하며 입을 오므리는 모습. 내가 퍼준 밥이 좀 많아 보인다.
"먹읍시다."
"그럽시다."
많이 늘었네. 찌개가 참 맛있다. 그녀의 음식 솜씨가 한달새에 눈부시게 발전했을리 없다. 자취하면서 내 입맛이 많이 낮아진 탓일거다. 아이씨, 또 천천히 먹잖아. 기다려 줄까 말까? 에이 그냥 먹어 버리자.
그녀가 채 반도 먹기전에 밥 한공기를 비웠다. 새벽에 컵라면을 끓여 먹었지만 입맛이 땡겼다. 찌개에 고기가 들었던 관계로 트림이 나오려 했다. 그녀는 나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식사를 하고 있다. 앉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커어억."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 보았다. 나를 무뚝뚝하게 한 번 쳐다 봤다. 씩 웃어 주었다.
"이왕이면 트림은 하지 말아요. 그래도 많이 발전 했네요."
"물 떠다 드릴까요?"
"그래 주세요."
그녀도 밥을 다 먹었다. 상당한 양이었을텐데 밥 한공기를 다 비웠다. 남은 찌개는 학원 갔다 와서 라면 사리 넣어 다시 먹어야 겠다. 호호호 오늘 밤 밥값도 굳겠네 하하.
"동엽씨. 입가심하게 커피 한잔 끓여 주세요."
"그리지요 뭐."
컵하고 커피믹스 하나 갖다 주고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물 끓는 소리가 듣기 좋다.
"동엽씨 저 옷 입어 봤나 보네요."
그녀가 어제 고이 접어 놓은 옷을 본 모양이다. 그녀의 컵에다 물을 부어 주며 답을 했다.
"잘 어울리던데요. 고마워요."
"그 소리는 한달전에 들었어야 했어요."
내가 소리 없이 하숙방을 나갔던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참, 그 속에 있던 시도 잘 읽어 보았어요. 근데 하필이면 내용이 그런걸로 했을까요?"
"내용이 어때서요?"
"내용이, 음, 꼭 내 처지를 비난하는 것 같아서요."
"네? 어떻게 해석을 했기에..."
"어제 그 시 읽고 나서 달이 부끄러워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니까요."
"엥? 달이 왜 부끄러워요?"
말할까 말까. 뭐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지. 그래 마땅한 사람 나타나기 까지는 내 마음 약간은 표현해도 되겠지 뭐.
"그 달에, 응... 나영씨가 걸려 있거든요. 내가 좀 초라하게 느껴져서."
"걱정된다. 그러지 마요 동엽씨."
"걱정은 무슨..."
"흠, 해석을 자기 처지에 맞추어 읽어 버렸군요. 됐어요."
"잘해 주어서 고마워요. 덕분에 훌륭한 아침을 먹었습니다."
"훗."
그녀가 컵에 입을 대려다 피식 웃는다. 더 훌륭한 아침도 만들 수 있다는 의민가?
"왜 웃는데요?"
"고맙다는 말은 오히려 제가 해야 돼요."
"그건 왜요? 애써 찌개 만들어 예까지 온 것은 나영씨에요."
그녀가 벽에 기대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은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눈빛이 참 고왔다. 다소 슬프게도 보였고.
"동엽씨."
"네."
"나 아침에 이렇게 온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었어요."
"무슨 말인데요?"
"혼자서 아침을 먹으려니까 눈물이 쏟아졌어요. 오늘 아침 처음으로 혼자 맞이하는 아침이었어요. 하숙집 학생들도, 언니도 가버린 혼자서 맞는 아침이었거든요.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막막했어요. 그래서 동엽씨에게 왔어요."
그녀의 가라앉은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아프다. 그랬구나. 에구 맞구나. 대충 어제 느꼈던 설움들 맞구나.
"이봐요 나영씨."
"네."
"자꾸 감상적으로 되지 마세요. 자꾸 그러면 더 힘들어져요. 내일부터는 꾹 참고 혼자서 아침 먹어봐요. 빨리 적응해야지요."
그녀가 두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 보았다. 꼭 째려 보는 것 같다.
"나 집에 갈래요."
"데려다 드릴까요?"
"혼자서 갈 수 있어요."


33편

조금만 더 놀다가지, 느끼지 못했던 오전의 허전함이다. 천정이 뜨거워져 오고 있다. 그녀는 내 기분을 아쉽게 만드는 표정을 하고는 내 배웅을 거절한 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설거지를 끝내고 밥상은 다시 책상이 되었다. 아직 이론 책을 보며 글 쓰는 공부를 해야하는 초보구성 작가단계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전문 작가 이상의 이야기들이 있다. 어찌보면 하숙집 그녀의 삶이 글 쓰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정네가 있었으니 바로 동엽이라 했다. 이렇게 적어 볼까? 너무 삼류 같나?
문학적 예술성은 배고픔과 고독에서 온다. 지금 나는 고독하지만 배는 졸라 부르다. 내가 무슨 예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배 고픈데 글을 쓸 수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고독해도 딴 생각 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녀 생각이 자주 난다. 아침에 찾아 온 그녀가 돌아간 지금 안타갑다.
천정이 뜨거워 지는 만큼 내 눈꺼풀은 무거워 지고 있다. 십자 창문 바깥의 풍경들이 녹고 있다. 모두 녹일 것 같은 졸라 더운 여름날이다.
한 주가 시작 되었다. 학원을 가는 시간이 내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학원 내가 속한 방 사람들은 아직 눈망울이 초롱하다. 작가가 된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또는 취미로 글쓰기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변화가 별로 없지만 차분한 것이 안정된 느낌이다. 종석이 형은 내 이사하기 전달에 반을 옮겼었다. 그 반이 오늘 떠들썩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 오늘 종석이 형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오면서 많이도 망설였다. 그녀의 오피스텔을 찾아 가 보고 싶은 맘 때문이었다. 근데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떼어지지 않았다. 오피스텔 쪽으로 가는 길만 쳐다보다 그냥 돌아섰다.
집에 와 아침에 계획한데로 찌개라면을 끓여 먹었다. 배 부르니까 기분이 좋다. 희미한 달빛이 초라하게 고운 옥상 소파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웠다. 생활이 단조로운 것 같다. 자취하기 시작하면서 늘 이런 생활이었는데 오늘은 내 생활이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 되어진다.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누군가 보고 싶으면 그가 없을 때의 생활이 단조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까 학원 마치고 그녀 오피스텔을 갔었으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을, 내일 아침에도 그녀가 올까?
컴퓨터를 켜 놓고 나중에 내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는 데 무리가 없을 때, 그때 쓰기 위한 동기를 제공하기 위해 지금 내 마음에 구상되어진 것들을 타이핑 해 보았다. 이런 것도 드라마로 제작할 수 있을까? 그럼 당연하쥐. 시청율을 올리려면 예전에 종석이랑 주영이가 얘기했던 것처럼 여성 시청자들을 겨냥한 멜로물이여야 한다. 벌써 시청율을 생각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볼 만 할 것 같다. 암, 이 내용 충분히 드라마로 제작 될 수 있다. 제목은 신데렐라라고 하자. 남자 신데렐라. 세상 물정 모르는 백수가 졸라 잘난 여자와 우여곡절 끝에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쿠쿠, 남자 주인공 이름은 신동엽이고 여자 주인공 이름은 이나영이다. 세상에 신동엽이가 나만 있나? 그리고 이나영이라는 이름이 하숙집 그녀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다. 그래도 혹시 진짜 드라마로 제작되어 그녀가 그걸 보게 되면 조금 부끄럽겠다. 그래서 주인공 이름을 조금 수정했다. 신돈엽, 이나연으로. 이러면 아마 모를것이다.
글은 안쓰고 컴퓨터 모니터만 밝혀 둔 채, 그 앞에 누워서 신돈엽이하고 이나연이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상상을 하며 배시시 웃었다. 워드 프로세서의 커서가 깜박 거리며 차라리 컴퓨터를 꺼라, 그러며 투정을 부리고 있다. 커서야 미안, 조금만 더 상상하다가 움직여 줄게. 상상하다 웃음을 간직한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오늘 아침도 잠에서 깬 시간이 일찍다. 여덟시도 안됐다. 오늘 아침은 컵라면을 먹어야 되나? 그녀가 왔으면 좋겠다. 십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반가운 사람의 소식이 있을 거라는 모양으로 환하다.
"쾅, 쾅."
그년가? 그녀였으면 정말 좋겠다.
"누구세요."
"총각, 나 아랫집 아저씨."
김 팍 새 버린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저 아저씨 잠도 없나.
"무슨 일인데요?"
"전기세 나왔어."
이런 새벽에 전기세를 받으러 왔단 말여. 세상 참 삭막하다. 문을 열어 주었다.
"얼만데요?"
"오만 팔천원 나왔는데, 예전부터 이 방에선 20퍼센트를 내기로 했어. 불만 없지?"
"불만은 없는데요. 그게 얼만대요?"
"모르지. 빨리 계산해서 죠."
아이씨, 계산해놓고 와야 될 거 아냐. 오만 팔천원의 이십퍼센트면 얼마냐. 오만에 이십퍼센트는 만원이고 팔천원에 이십퍼센트는? 쫌 어렵다. 천... 천 팔백? 아이씨, 졸라 어렵네.
"아저씨 계산기 없어요?"
"안 가져 왔는데."
"대충 만 천원 정도 되는데요?"
"그럼 만 천원만 죠."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 하숙할 때는 전기세 달라는 소리는 안했는데 생각지 않았던 돈이 나가니까 억울했다. 컴퓨터가 아직 켜져 있다. 켜져 있는 컴퓨터로 계산해 보았다. 오만 팔천원의 이십퍼센트는 만천육백원이었다. 사발면 하나 값을 앉은 자리에서 벌었다.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아주 사소한 것에 기분 나빠 했다가 기분 좋아해 하는 것 같다.
열시 까지 방문을 주시한 채 아침을 먹지 않았다. 방문을 주시한 채 아침을 먹기를 꺼려 했던 것은 당연히 그녀가 혹시 올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의 열기를 식힐 겸 찬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사 준 옷을 입고 학원으로 출발했다. 아침, 점심을 모두 컵라면으로 때웠다. 속이 좀 쓰리다. 그 속쓰림은 학원을 파하고 최고조에 달했다.
종석이 형을 만났었다.
"어! 오늘은 엄청 깔끔하다."
"원래 제가 깔끔하잖습니까? 옷이 잘 어울려 보여요?"
"그래, 잘하면 이십대로 봐줄 수 있겠다."
"저 이십대 맞는데요."
"보통때는 안그래 보였어."
"어제는 안 보이시대요?"
"하하!"
종석이 그가 대답은 하지 않고 크게 웃었다.
"왜 웃어요?"
"나, 다음 달부터 M방송국 작가 아카데미 전문 코스 밟게 됐다."
"네?"
"내가 이번에 그 방송국 시나리오 공모전에 입상을 했잖아. 그 수상 경력 때문에 중급자 코스도 아니고, 바로 전문 코스로 건너 뛰어 버린 거 아니겠냐."
"진짜요?"
"응. 잘하면 내년에는 방송국 작가 공채에 도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제 시나리오를 썼대요?"
"틈틈히 썼지."
허! 이 녀석은 그래도 할 것 다하고 개떡 사랑 읊고 다녔었네. 근데 시나리오 쓸 만한 내용이 이 녀석 주위에 있었을까? 내 속이 지금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무슨 내용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요?"
"내용? 그냥 내 일상적인 얘기야."
"그러니까 무슨 일상적인 내용인데요?"
"어, 내용을 설명하자면 작가의 꿈을 쫓는 한 여성의 좌절과 그리고 그 곁에서 그 여자가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순수한 남자의 헌신적 사랑을 심리적, 시간적으로 심층적으로 엮었지."
무슨 말이야 이거. 여자는 주영씨를 생각한 것 같다. 근데 너 차였잖아. 심리적으로 엮었어? 심리적은 무슨, 개떡사랑철학 주절 주절 썼겠지. 어떻게 입상이 되었을까?
"상금은 없어요?"
"얼마 안돼지만 곧 받아."
"잔치 안 해요?"
"나중에."
"그럼 이 학원은 안나오겠네요."
"그래. 그래도 종종 찾아 올게."
"그래요. 축하해요."
나도 공모를 해 볼까? 하지만 아직 시나리오 쓰는 형식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예전에 강사가 아무 글이나 공모해 보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진짜 나도 공모를 해 볼까? 너무 서둘지는 말자.
같은 계단에 있던 사람이 날 버려두고 웃으며 몇 계단 올라 가 버렸다. 축하는 해 주었지만 내 자신이 초라하다.
"한 잔 할래?"
"가 볼 데가 있어서요. 상금타면 한잔 합시다."
"그래. 그때는 내가 살게."
"잘 되길 빌게요."
"고마워. 너도 잘 될거야."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자취방으로 들어 왔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옷차림이 멋있는 미남이다. 그렇지만 그것 뿐인 것 같다. 옷을 벗어 단아하게 옷걸이에다 걸었다. 내 처지와 가장 비슷한 놈이, 별로 생각나던 사람은 아니지만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쓸쓸하다. 그래도 잘되서 떠나는 것이니 축하해 주어야 된다. 흠, 속이 졸라 쓰리다. 이제 내 처지와 비슷한 사람은 나영씨 밖에 없구나. 근데 언제 하숙집 그녀가 나하고 비슷한 처지가 되었나. 그 또 이상하네. 오늘은 내가 딴 날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지고 있는데, 그녀가 내 처지와 비슷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진다. 어찌보면 내 처지보다 못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낮아지지는 않는다.
종석이 형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자극에 컴을 켜고 몇자 쳐 보았지만 또 배시시 웃고만 말았다. 그래, 하숙집 그녀가 가까운 곳에 있다. 내일은 그녀를 찾아가 보아야 겠다.


34편

종석이 형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자극에 컴을 켜고 몇자 쳐 보았지만 또 배시시 웃고만 말았다. 그래, 하숙집 그녀가 가까운 곳에 있다. 내일은 그녀를 찾아가 보아야 겠다.
학원을 마치고 그녀의 오피스텔을 찾아가 보았다. 오피스텔의 수위가 날 못마땅하게 쳐다 보아서 어색했지만 꿋꿋하게 엘레베이터를 기다렸다. 잡상인 아니란 말이여.
405호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없다. 서울에 장이 서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오늘도 장날인가 보다. 날을 잘못 잡았다.
혹시나 그녀가 곧 돌아오지 않을까 해서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기다려 보았다. 가지고 있던 담배가 여러 가피 남았었더라면 좀 더 오래 기다렸을텐데, 세 가피 뿐이어서 기다린 시간이 그리 길지가 못했다.
십분마다 한대씩 폈다고 치면 30분 정도 기다렸나 보다. 오늘만 날이냐, 오피스텔이 울산바위처럼 금강산 가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오지 뭐. 자주 뒤를 돌아 보며 오피스텔을 떠났다. 못 보고 오니까 더 보고 싶었다.
며칠을 그녀 생각만 하고 오피스텔에는 가지 못했다. 그녀도 내 옥탑방을 찾아 오지 않았다. 목요일은 그 전날 오피스텔을 찾아 갔었기 때문에 이틀 연속 가기가 쑥스러웠다. 그녀야 내가 왔다 간 것을 모르겠지만 수위 새끼가 날 봤기 때문에 혹시 뭐라 그럴까 두려웠다.
금요일날 못 간 것은 삼일 연속해서 계속 그녀 집을 찾아가야지 마음 먹은 내 자신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불확실함에 대한 자기 방어심리다. 그리고 금요일날 그녀를 봤다면 막막한 토요일날 다시 보기가 민망했다. 애인 사이도 아닌데 날마다 만날수가 있나. 흑흑 그렇지만 이번주 들어서 매일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냥 하숙할 때처럼 매일 그녀를 만났으면 좋겠다.
토요일이다. 아침부터 할 일이 없다. 날씨는 엄청 더울 것 같다. 오랜만에 방청소를 했다. 그녀가 청소해 주고 난 후, 딱 일주일만이다. 방 청소를 하고 다소 깨끗해진 방바닥에 앉았다. 그녀가 준 셔츠를 입고 패션 추리닝을 입었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 그래, 절대 뻔뻔한 짓이 아니다. 그녀가 분명 밥 먹으러 오라고 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각오를 다졌다.
'가자. 그녀에게 당당하게 먹을 게 떨어져서 밥 얻어 먹으러 왔다고 말을 하자. '
혹시나 따지는 그녀 성격에 검사를 할까봐. 남아 있던 컵라면이랑, 쌀을 나만이 알수 있는 곳에다 숨겼다. 어디냐구? 옥상위에 널려 있던 폐가구 속이다. 그리고 숟가락 하나랑 밥그릇 하나를 챙겨서 신나게 옥상을 내려 왔다. 오늘도 없으면 어쩌지? 설마 오전부터 어딜 가겠냐.
"아저씨, 어디 가요?"
저번에 수상쩍은 눈초리가 심상찮더니 결국은 묻는구나. 엘레베이터가 내려오기만 기다리는데 수위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405호 가는데요."
어린 아이의 눈망울로 아주 선량하게 대답을 했다.
"405호는 왜 가는데요?"
"405호가 거기 있느니까요."
말장난 하는게 아닌데 그랬다. 수위의 눈초리가 무섭다.
"거기 잠깐만 있어 봐요."
수위가 날 수위실 앞에다 잡아 두었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는게 그녀에게 날 확인하려나 보다.
오피스텔에도 인터폰이 있구만.
"그녀가 있대요?"
"누구라고 말해 줘요?"
"동엽이라 그러면 알거에요."
수위새끼 나한테는 졸라 퉁명하게 말하면서 수화기에 대고는 엄청 친절하게 대답한다. 내 자취하는 집에도 수위를 하나 쓰자고 주인 아저씨한테 건의해 봐야 겠다.
나 이 건물 옥탑방에 사는 신 동엽이라는 사람이여.
아, 그러세요. 저 이번에 이 건물 수위로 내정된 아무갭니다. 가장 높은 곳에 사시는 동엽씨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그 괜찮을 거 같다.
"올라가 봐요. 그 밥그릇은 뭐에요?"
"내 밥그릇인데요."
호주머니에 숟가락도 있는데 그것도 봤다면 물어 보겠지. 물론 내 밥 숟가락이라고 대답을 해 주겠지.
엘레베이터를 내리자 마자 나영씨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여기에요."
아주 밝은 얼굴이다. 날 보고 저런 표정 지을 줄 알았으면 어제, 그제도 오는 건데 그랬다. 안 덥냐 그런데. 하숙집에서 늘 보던 긴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하하, 안녕."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의 오피스텔은 자그마하고 아름다웠다. 티비에서 자주 보던 전형적인 원룸 오피스텔의 모습이다. 꽃 병도 있고, 화분도 있고, 침대도 있네. 자그마한 탁자도 있다. 싱크대도 좋아 보인다.
"참 빨리도 오시네요."
"아, 아침에 일찍 깬 바람에."
"그말이 아니라 여기 가르쳐 준 날로부터 일주일만에 왔다는 말이에요."
"아, 일주일만에... 가까우니까 빨리 찾게 되었어요."
"동엽씨 고등학교 때 국어 못했어요? 그런 국어 실력으로 어떻게 글을 쓴다고 그럴까."
뭐야, 들어서자 마자 날 놀려? 밝은 표정이라 참는다.
"집이 아담하고 좋네요."
"그래도 예전 하숙치던 그 집이 늘 그리워요. 동엽씨 밥 먹으러 온 거죠?"
"어떻게 알았어요? 나영씨는 아침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어요. 예전에 하숙 쳤었는데 아무리 집을 줄였지만 동엽씨 밥 퍼줄 밥그릇 없을라고 그걸 들고 왔어요? 하여튼 잘 왔어요."
숟가락도 가져 왔는데 보여줄까 말까.
"제법 늦은 시간인데 아직 아침을 안 드셨군요."
"동엽씨가 올 것 같아서,라고 말하면 믿어 주실래요?"
믿어 줄까, 말까. 말이라도 기분이 좋은 답이다. 그녀가 싱크대 앞으로 갔다. 작은 식탁의 의자에 가 앉아 보았다. 그녀가 아침 준비를 하는 동안 다시 오피스텔 내부를 찬찬히 둘러 보았다.
제법 꾸민 흔적이 보인다. 탁자 위에는 보지 못했던 그녀의 가족 사진이 있다. 아버님이 잘 생기셨네. 하숙집 아줌마의 모습도 새롭다. 느끼지 못했었는데 그녀의 언니가 지금 그녀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짧은 머리가 바로 고등학생이란게 표가 나는 남자도 하나 있다. 그녀의 오빤가 보다.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혼자다. 그녀의 뒤모습을 바라 보며 가여운 생각을 해 본다. 그녀가 중학생 정도의 나이때 찍은 사진인 것 같다. 좀 신기하다. 사진 속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고 바로 그 소녀가 그녀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바지는 맘에 안들었나 봐요?"
그녀가 뜨거운 콩나물국을 퍼다 주며 말했다. 날씨가 더워도 국은 항상 뜨겁구나.
"네? 맘에 들던데요. 왜요?"
"셔츠는 그런데로 잘 어울리네요."
"예."
"동엽씨가 오늘도 안 왔더라면 저 며칠 동안 더 못 봤을거에요."
"왜요?"
"오늘 오후에 어딜 가거든요."
"어딜 가는데요?"
"갈때가 있어요."
"언제 오는데요?"
"삼일뒤나 사일 뒤에 올거예요."
"멀리 가요?"
"그렇게 멀진 않아요.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앞으로는 친 오빠처럼 대해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에?"
"뭘 그리 놀라세요?"
당연히 놀라지. 남자 얘기가 나왔는데. 시집이라도 가려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겁지 당연히.
"친 오빠처럼이라면, 시집가는 것하고 연관이 있나요?"
"없다고는 말 못하겠죠."
씨, 대답을 애매하게 하냐. 시집 가면 안되는데, 지금 처지로서는 붙잡고 싶어도 명분이 없다.
"오늘 갈 거에요?"
"네, 오후에 출발할까 생각중이에요. 수요일 쯤 전화해 보세요. 그때 아마 나한테 먹을 것이 많지 않을까 싶네요. 아 맞다. 저 전화 설치했어요."
이 여자가 진짜. 혼자서 삼일동안 어딜 간다는 말이냐.
"번호가 몇 번이래요?"
"765-0865(혹시 같은 번호 소지자는 그러려니 하세요. 그냥 대충 만든 번호니까. 실은 내 피시에스도 뭐뭐뭐에 0865인데.)에요. 나중에 다시 메모해서 줄게요."
그것도 내가 못 외울것 같냐. 405호도 외었었는데.
그녀가 밥을 퍼와 나와 마주 앉았다. 다음부터는 밥그릇 안 가져 와도 되겠다. 하숙할 때의 내 밥그릇과 무척 닮은 밥그릇이 내가 들고 갔던 것 보다 좋았다.
밥을 다 먹고 그녀가 설거지 하는 동안 그녀의 침대에 가 앉아 보았다. 느낌이 묘하지만 좋은 쪽이다. 여기서 그녀가 잔단 말이지? 쿠쿠. 푹신하다. 나도 한 번 누워 볼까? 눕는 척 하다가 그녀한테 들켰다.
"그거 메트리스 바꿔야 겠어요. 제가 산것이 아니라 여기 있던 거라서 스프링이 많이 느선한 것 같아요. 그런거 같지 않아요?"
내가 언제 침대 생활을 해 봤어야 알지. 아무리 하숙하면서 같이 살았다고 자기 침대에 누워 보는 사람한테 하는 말이 스프링 느선한 것 같지 않나요?
"언제 갈 건데요?"
"내가 간다는 곳이요?"
"네."
"아직 여유 있어요. 쫓아 내지 않을테니까 더 놀다 가세요. 동엽씨 토요일이라 할 일도 없잖아요."
아무리 할 일 없는 것이 맞지만, 그 말은 별로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그녀가 커피를 끓여 주면서 침대 위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괜히 어색했다. 할 수 없이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내려 앉았다.
"바닥이 별로 안 깨끗할텐데, 왜 거기 가서 앉아요?"
"커피 흘릴까봐."
"훗. 동엽씨 방 깨끗해요?"
"오늘 청소하고 왔어요"
"다음에 또 청소 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이런 저런 말들이 오고 갔다. 한동안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나를 내려 보며 이야기 했다. 그게 불편했는지 그녀가 침대위로 올라와 앉으라 말을 했지만, 침대라는 단어와 남,녀라는 단어가 합해지면 왠지 이상한게 연상되어서 피했다. 나중엔 그녀가 내려와 앉았다. 바닥이 더러울텐데...
종석이라는 형이 나보다 빨리 잘 나가게 되서 배 졸라 아프다는 얘기도 하고, 현철이랑 그 밖의 하숙생들과 간혹 연락을 한다는 얘기도 듣고, 뭐 일상 얘기지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녀의 모습이 시간을 가렸기 때문이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시계를 보는 투가 곧 나가 봐야 될 시간인 것 같다. 저 차림으로 나가지는 못할 것이고, 하숙집 처럼 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없어야 씻고, 옷도 갈아 입을 것 같다.
"저 가 볼게요."
"오늘 내 일만 없어도 어디 놀러 갈 수도 있는건데."
"근데 진짜 어디 가는데요?"
"서글픈 일이라서 말하기 싫어요."
서글픈 일? 시집가는 일이 서글픈 일은 아니지. 다행이다.
"잘 다녀 오세요. 그럼 나는 이제 갈랍니다."
"참, 동엽씨. 물어 볼게 있어요."
"뭔데요?"
일어서려다 다시 앉았다.
"저 번에 내가 옷가방에 넣어 준 시 있잖아요."
"네."
"음. 그 시가 자신의 처지를 비난한다고 그랬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네?"
"내가 왜 달이에요? 혹시."
"혹시 뭐요."
"아니에요. 내가 왜 달인데요?"
음, 친오빠처럼 대해야 될 놈을 만난다고 그랬지? 대충 나도 자네를 좋아한다는 것을 조금은 알려야 하지 않겠냐 싶다.
"모르겠어요. 하여튼 그때 시는 좋아하는 사람에 비해서 초라해 보이는 내 자신에 대한 시 같아서 별로 였어요."
그녀가 내 집에 가는 걸 뚜렷한 시선으로 방해 하고 있다.
"그걸 내가 보냈다는 것은 생각 못해 봤어요?"
"거거 나영씨가 보낸 것 아니에요?"
"일부러 그러는 거에요? 진짜 우둔한 거에요?"
"뭐가요?"
"아니에요."
"저 갑니다. 잘 다녀 오세요."
"잠깐만요 동엽씨."
"왜요."
"전화번호 적어 가야죠."
"외웠어요. 765에 공팔육오."
"음, 한가지만 더 물어 봐도 될까요?"
"물어 보세요."
"동엽씨도 절 좋아하나요? 아니에요. 잘 가세요."
야이, 물어 놓고 대답할 시간도 안주고 쫓아 내면 섭하지. 좋아하기야 예전부터 좋아했지. 요즘엔 좀 헷갈리지만. 아무래도 자넬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근데 동엽씨도? 나 말고도 그녈 좋아하는 놈이 있나 보네. 그놈이 누굴까. 그 친오빠처럼 지내야 된 다는 놈이 나영씨 보고 좋아한다고 말했나?
수요일날 꼭 여기 다시 오리라. 그녀 위해 꽃다발을 한 번 사 볼까? 하여튼 마음 뺏기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야 할텐데...
걱정이 하나 생겼구만.

35편

그녀가 생각나 뜨거웠던 일요일은 빠르게 어둠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어제 그녀를 만난다고 너무 설레였었나 보다. 라면과 쌀을 어디 숨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저녁 한 끼만으로 배고픔을 참았다. 밥을 먹으면 바로 배고픔을 면할 수 있지만 그리움은 그렇지 않다. 오늘처럼 그녀가 생각나는 밤이면 왠지 분
위기를 잡고 싶다. 방 안이 너무 더웠다.
하늘을 보았다. 소나기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 하늘은 맑은 것처럼 보인다. 인공적인 도시의 주황빛이 하늘을 탈색시켰지만 그래도 비는 안 오겠다. 옥상 바닥이 불땐 온돌방 바닥 같다. 고풍스럽게 다 떨어져 가는 소파에 최대한 폼을 잡고 앉았다. 그리고 멋있게 담배를 물고... 에이씨, 불을 안가지고 나왔다. 방으로 급히 들어가 라이터를 가지고 나왔다. 아까처럼 소파에 멋있게 앉아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옥상 하늘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움이 커지면 담배 연기처럼 내 마음을 가리고 있던 막연함이 사라질 것도 같다.
월요일도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옥상에서 폼을 잡았었다. 점점 담배연기가 옅어 진다. 그녀가 가까운 곳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왜 더 그리운지 모르겠다. 있을 때 잘하자.
화요일도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옥상에서 폼을 잡았다. 무엇인가 내 앞을 심하게 가리면 이 좋은 담배의 맛도 그냥 쉼호흡과 같아져 버리는구나.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내일은 소낙비라도 내릴 것 같다. 오늘 옥상 바닥은 비닐하우스를 치고 물만 뿌리면 그대로 사우나탕이 될 정도로 뜨겁다. 심심한데 이단 옆차기나 연습 해보고 방에 들어가 바로 잡을 자자. 내일은 그녀가 내 근처로 돌아 올 것이다.
오전에 그녀의 오피스텔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받지를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점심 때 전화 거는 목적으로 식당에 밥 먹으러 갔다. 그녀는 없었다. 덕분에 점심을 먹었다. 냉면이 시원했다. 학원을 가다가 또 전화를 해 보았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를 잊어 두고 어떻게 자취 생활 한 달을 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녀가 돌아 왔다. 하하.
"동엽입니다."
"아, 동엽씨. 저 방금 돌아 왔어요."
"아, 그래요. 잘 맞춰 전화를 했네요. 학원 가는 길에 생각이 나서 전화 해 봤어요."
"잘 했어요. 집에 먹을 것 많이 있거든요. 학원 마치고 오세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전화는 간단하게 하는 편이구만. 빨리 끊으려 했다.
"참 나영씨."
"네?"
"무슨 꽃 좋아해요?"
"왜요? 꽃 사줄려구?"
"네."
"노란 프리지아 하구 빨간 장미하고 하얀 안개꽃이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프리지아가 어떻게 생긴 꽃인지 모른다고 말하면 뭐라 그러겠지? 드레곤 불에 나오는 프리자와 무슨 연관이 있는 꽃인가?
"정말 잘 어울리겠는데요."
"참, 꽃다발로 장식해서 사오지 말고, 그냥 꽃만 사오세요. 화병에다 꼿게요."
"알았습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학원 첫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멀뚱히 있다가 에휴, 수업 한시간 빠진다고 뭐 큰 지장이 있겠냐,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더 설레이며 그녀와의 만남을 지연하는 것은 내 건강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 튀자.
후리지아가 저렇게 생긴 꽃이었구나. 색깔과 향기를 빼면 별로 예쁜 꽃은 아니다.
"얼만큼 드릴까요?"
"제가 꽃에 대해서 잘 모르거든요. 삼만원치 정도를 알아서 섞어 주세요. 참 포장은 할 필요 없습니다."
꽃 집을 나와 신나게 걸었다. 분위기를 잡으면서, 꽃을 든 남자라는 사실에 주위의 시선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내가 한송이 장미처럼 보여 질 것도 같았다. 졸라 큰 장미네 그럼. 꽃을 든 남자 처음 봤어? 생긴것이 꼭 벽에 붙여 놓은 씹다 뱉은 껌같이 생긴 놈이 피식 거리며 나를 지나쳤다. 저 얼굴은 평생가도 여자한테 꽃 선물 한 번 못할 것 같다. 나도 알고 보면 잘난 놈이다.
멀리서 천둥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진짜 비가 오려나 보다. 잘됐네. 지금 내가 우산이 없으니까, 나중에 집에 돌아갈 때 그녀가 날 혼자 보내지는 않을 것 같다. 날 집까지 데려다 주면 또 내가 우산을 쓰고 그녀를 오피스텔에 데려다 주고, 허허, 이런 노가다 생각을 하면서 웃을 정도니 그녀가 내 마음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인 줄 알겠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맞구만. 그것도 아주 많이.
그녀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바로 뛰어 올라 가려다, 오늘은 왠지 내 모습을 점검해 보고 싶었다. 괜찮구만. 정문을 향해서 빠른 걸음을 걸었다. 정문에서 아릿따운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앗, 그녀다.
"나..."
이름을 부르려다 멈찟했다. 그녀와 같이 나오는 정장 입은 사내를 보았기 때문이다. 제법 멋있게 생긴 놈이다. 엘레베이터를 같이 타고 내려온 모르는 사람일까 생각을 했는데, 둘이서 말을 주고 받는다. 괜히 내 모습을 근처의 봉고차 뒤로 숨겼다.
저 새끼는 차도 있었다. 그것도 중형차네. 나이는 별로 안들어 보이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녀석이다. 사내가 오피스텔 앞에 주차 되어 있던 흰색 소나타 앞으로 가더니 문을 열었다. 열었으면 바로 타고 떠나야 할 것 아닌가. 그녀와 말을 주고 받는다. 미소띤 그녀의 얼굴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야이, 저 놈 봐라.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친다. 다독거려 준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예삿 사이가 아닌가 보다. 사내가 말을 몇마디 하니까 그녀가 손짓으로 길을 가리킨다. 고개를 흔들며 사내가 또 뭐라 그러자 그녀가 시계를 봤다. 그리고는 차에 같이 타버린다. 뒷좌석도 아닌 운전자 옆 보조석이다.
뭐야 이거. 순간 들고 있던 꽃을 떨어 뜨려 버렸다. 차는 내가 왔던 반대 방향으로 뒷 전조등의 빨간 불을 선명하게 밝히고는 멀어져 갔다.
멍하다.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해 지면서 서러워 온다. 나는 아까 양복입고 차도 있는 그 사내와 비교가 되지 못할 것 같다. 그녀의 오피스텔까지 들어 왔던 사내라면 분명 보통 사이는 아니다. 나처럼 같이 하숙한 것도 아니고. 친오빠처럼 지내야 된다던 그 사낸가 보다. 친오빠처럼 대하다가 나중에 결혼하려나 보다. 저 새끼가 그랬을 것 같다. 혼자니까 외롭지? 날 친오빠처럼 생각하며 편하게 대해.
오늘 그 사내가 그녀를 차에 태우고 집에 대려다 준 것 같다. 우산쓰고 비 맞고 걷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행동같다. 아까 생각했던 내 설레임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기분 참 묘하다. 허허, 좀 더 일찍 저런 모습이 내게 보여졌다면, 오늘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감히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밉다. 들켜도 꼭 내 마음을 다 뺏아아 놓고 들킨 것 때문에 밉다. 빨리 들켰으면 내 축하해 주었을 텐데. 이제 나는 어떡하라고 진짜 섧다. 마음 더 다치기 전에 빨리 그녀를 잊자. 지금부터 당장 그녀를 잊는 연습을 하자. 차마 잊기 힘들 것 같으니까.
힘없이 돌아서 집으로 걸었다. 내 마음엔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 친다. 어이, 스카이. 지금 영화 찍냐? 아니면 내 비참한 모습을 극대화 하기 위해 놀리는 것이냐? 구름 사이로 번개의 밝은 빛이 왔다 갔다 하더니 이내 천둥질이다. 그리고 자취집으로 반이나 왔을까. 굵은 소낙비가 내렸다.
그래 내려봐바. 나 우산 엄써. 이왕 젖을 거 많은 비에 젖으면 시원하기라도 하지. 그래 마구 내려라. 오늘 내 초라한 마음 씻기워 주면 좋겠다. 몸이 시려 온다. 빗방울이 장난이 아니다. 쫌만 덜 내렸으면 좋겠는데...
옥상을 힘없이 올라 왔다. 옥상은 벌써 곳곳에 물물이 고였다. 더운 김이 안개처럼 퍼져 있다. 뜯어진 소파는 비를 피할 기력이 없나 보다. 내 모습 같은 소파는 비가 와서 그냥 맞아도 더 초라해 질 것이 없다. 내일 보자 소파야.
완전히 젖은 옷들을 욕실에 던져 놓고는 샤워도 하지 않고 젖은 몸을 물기만 닦은채 방으로 인도했다.
이불을 깔고 누웠다. 십자 창문에 빗물 튀기는 소리와 풍경이 너무 낭만적이다. 그래서 슬프다. 머리가 아파 온다. 감기 기운이 도는 것이 비를 너무 맞았나 보다. 갑자기 아파진 마음만큼 몸도 아프다.
불을 켠채 오늘 그녀가 모르는 사내와 같이 있었다는 사실 보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묻기 조차 힘든 내 초라한 신세가 서러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조용히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픈채 잠이 들었다.
아침 창가에 서울 새가 운다. 밝은 햇살이 새 울음 소리와 함께 들어 오고 있다. 날씨가 맑다. 어제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맑다. 눈은 떴지만 일어 나지는 못하겠다. 자취하면서 체력이 많이 약해 졌나 보다. 어제 꼴랑 그 정도의 비를 맞았다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춥다. 배도 고프다. 어제 저녁을 먹지 않았다.
집에 먹을 것도 없다. 졸라 서럽다. 집에 가고 싶다.
"쾅! 쾅!"
터프한 노크소리다. 누군지 묻지도 않고 힘든 몸을 일으켜 세워 문을 열어 주고는 다시 이불속으로 와 누웠다.
"동엽씨. 어제 온다더니 왜 안왔어요?"
따지듯 그녀가 내방으로 들어 선다. 시선을 주기 싫었다.
"그냥요. 왜 왔어요?"
고개를 조심스레 돌려 그녀를 보았다. 문앞에 높은 그녀가 서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먹을 것인가 보다. 냄새가 좋다. 그녀는 특유의 기분 나빠하는 모습으로 이불속에 누워 있는 나를 깔아 보고 있다.
"내가 왔는데 일어 나지도 않아요?"
내가 왜 일어 나야 된다는 말인가.
내가 자기 보고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다시 그녀를 외면하며 고개를 그녀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몸이 아프니까 눈시울이 금방 붉어진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해 봤다. 참 아름다운 모습일 것 같다. 그녀의 결혼식에 가 부조금을 내고 함박 웃음으로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 준다. 그리고 축하객들과 밥을 먹으면서 나 혼자서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영화 속 주인공 같을 것 같다.
"동엽씨 안 일어나요? 어디 아파요?"
먹을 것만 내려놓고 그냥 가라.


36편

"알았어요. 내가 어제 오지 않은 것은 따지지 않을테니까 일어나 봐요."
내가 잘못 한 일이 뭐가 있냐.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어요? 아니면 내가 동엽씨한테 잘못한 거 있어요?"
대답하기 싫다. 기분 나쁜 일이 뭐 있겠냐. 사람 사는 일에 기분 나빠하면 자기만 손해지. 자네가 잘못한 거? 잘못한 것은 있지. 내맘 뺏어 가고 딴 남자 만나는 것. 확 일어나서 어제 그 놈이 누군지 물어 볼까? 내가 그런 걸 왜 물어보냐. 내가 벤댕이 속알 머리도 아니고 우리가 연인 사이도 아닌데. 그리고 말할 기운도 없다.
몸이 추워서 떨리고, 마음이 떨려서 머리가 아프다. 내가 물어도 반응이 없자 그녀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잘 가라, 그래도 먹을 것은 놔두고 가면 좋겠는데. 에구, 그녀가 찾아 오면 반갑기는 하겠지만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제 본 그 사람도 남잔데, 이런 모습 보게 되면 오해하기 쉬울 것이고, 나또한 나중에 비참해 질 것 같다. 에구, 힘 없다. 그래도 맘 단단히 먹고 일어나면 이 정도 아픈 것 쯤이야 털어 버릴 수 있으련만, 마음은 더 아파서 일어 날 수 없다.
그녀가 왔다가 가 버렸다. 그녀가 말을 건넬 때 대답 해 줄 것을... 몸이 아프니까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 말고 아무나 그녀 생각 안나게 해 줄 만한 사람 말이다. 집에 몇 일 동안 내려가 있을까?
"동엽씨, 쌀이 없네요."
어랏, 안갔었네. 내 맘을 잘 모르겠다. 그녀가 아직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반갑다. 바로 내 곁에 지금 그녀가 있는데 왜 자꾸 멀리 그리움 되어 떨어 진 느낌이 드냐.
까 먹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내가 쌀이랑 라면을 숨겨 놓았던 장소가 말이다.
"옥상 마당에 있는 폐가구 밑에 보세요."
내 마음은 그녀가 밥을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나 보다. 그녀가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인가? 솔직히 배가 너무 고프다.
한참만에 그녀가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 비추었다. 그녀는 아직 사랑스런 모습으로 들어 온다.
"아니 이걸 왜 거기다 숨겨놓은 거에요?"
"비상 식량."
그녀가 들어와 전기 밭솥에 쌀을 앉히고, 밥상을 들고 나갔다. 꼭 자기 방인양 지맘데로다. 아직도 하숙집 주인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고맙다. 저런 여자를 어떻게 떠나 보낸다냐. 어제 그 놈이 밉다.
다시 한참만에 그녀가 들고 들어온 밥상에는 반찬이 푸짐했다. 고기 부침개도 있고, 생선도 있다. 제삿집에 갔다 왔나? 밥을 퍼고는 나보고 일어 나라고 명령했다. 맘데로 몸이 일으켜 세워지 않았다. 몸 상태가 안좋긴 안좋나 보다. 그래도 힘을 내어 앉았다. 이불을 한 쪽으로 치우고 밥상 앞으로 기어 갔다.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왜 그래요?"
"몸이 안 좋아서요."
"왜 안좋은데?"
"몸이 안좋은데 이유가 있어야 되나요?"
"에구, 백수가 몸까지 약하면 큰일인데."
그 말이 오늘은 듣기 매우 거북하다. 하지만 따질 힘이 없다. 말 없이 그녀가 퍼준 밥을 한 숟갈 입에 넣었다. 그리고 고기도 함께 넣었다. 맨 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밥을 넘기자 마자 바로 속에서 거부 반응이 올라왔다.
"맛 없어요?"
"아니, 맛있어요."
앉아 있기가 힘들다. 두 숟갈 밥을 넘겼으나 더 이상은 무리다. 배는 고프지만 질긴 고기나 마른 밥을 속에서 완강히 거부했다.
"왜 그래요? 밥에 이상한 것 들었어요?"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밥은 그만 먹을래요."
"먹기 싫다면 뭐. 냉장고에 반찬 될 만한 거 넣어 두었으니까 나중에 밥이랑 드세요 그럼."
좀 삐친 모습이다. 밥상을 치우지도 않았지만 힘이 없어 구석으로 가 누웠다. 그래도 별말 없이 밥상을 치우는 그녀의 모습이 꼭 조강지처 같다. 그녀가 부엌으로 가 있는 동안 치워 놓은 이불을 감싸안고 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잃어 갔다.
그녀가 웃으며 방으로 들어 와 내 모습을 보더니 물었다.
"진짜 어디 아픈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프면 말해요. 나한테 기분 나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죠?"
왜 자꾸 자기한테 기분 나쁜 일이 있지 않을까 의식하냐. 혹시 내가 어제 자네가 같이 있던 사내를 보지나 않았을까 걱정되어서 그러냐? 내가 그 사내를 봤던 말던 별 상관 없잖아.
"아니에요. 집에 안 갈거에요?"
"오늘은 날 대하는 태도가 영 시원찮네요."
"그게 아니라 좀 눕고 싶은데 나영씨가 있으니까 그러지 못해서 하는 소리에요."
"손 좀 씻고 갈게요 그럼."
"그러세요."
그녀가 다소 언짢은 모습으로 욕실로 들어 갔다. 몸이 이제는 저려 온다. 머리도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동엽씨."
욕실 안에서 그녀가 날 불렀다.
"왜요?"
"어제 비 맞았어요?"
"네."
"그래서 못 왔던 거에요?"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난 또. 젖은 옷은 바로 빨아서 말려야 되거든요.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그러던지, 안고 있던 이불을 폈다. 그리고 돌돌말아 누웠다. 앉아 있기가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욕실에서 빨래를 하고 있지만 내 눈은 스르르 감겼다.
"동엽씨."
잠시 잠이 들었었는데 그녀가 깨우는 바람에 일어 났다.
"왜요."
"빨래는 옥상 마당에 널어 놓았구요. 그냥 가려다가 신음 소리가 심상찮아서 깨웠어요."
내가 신음 소리까지 냈단 말인가. 에구, 그녀의 손 느낌은 참 시원했다. 그녀가 내 머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보니까 낯선 여자의 모습과 사랑이란 단어가 겹쳐져 있었다.
"하아."
"열이 대단하네요. 진짜 아프구나.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대충 내 모습 보면 모르겠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지겠지요."
"약 지어 올게요. 그래도 안되면 병원 갑시다. 지금 어떻게 아파요?"
"자고 일어 나면 괜찮아 질 거라니까."
"어떻게 아프냐니까요?"
"그냥 온 몸이 떨리고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 그래 주세요. 참 그리고 맘도 아프다고."
아직 말장난 할 정도의 기력이 남아 있는 걸로 봐서 오늘 지나면 낫을 것 같다.
"그럼 잠시만 누워 있어요. 내가 바로 약 지어 올테니까."
야이, 너무 친절하잖아. 그녀는 약 사러 나가기 전에 수건에 물을 적셔 이마에 올려 주고 가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어제 그 놈한테도 이렇게 친절할까?
다시 멍한 상태로 여러 가지 꿈을 꾸며 누워 있었다.
"똑, 똑."
"에?"
선 잠을 깨고 무심결에 대답을 했다.
"나야 아랫집 아저씨."
대답하기도 힘든데 주인 아저씨가 왜 찾아 왔을까.
"무슨 일인데요."
거의 기다시피 움직여 방문을 열어 주었다.
"수도세 나왔어."
"내일이나 모레 다시 오시면 안되겠어요?"
"왜?"
"제가 지금 몸이 많이 아파서요."
"그래. 그럼 내일 다시 오지. 참 아까 왠 아가씨 내려가던데 동생인가?"
"아니에요."
"그럼 애인인가?"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결혼은 한 처잔가?"
내가 지금 아프다고 말했을텐데 왜 자꾸 묻는겨.
"아까 아저씨가 아가씨라고 했잖아요. 아가씨에요."
"그려? 결혼도 안한 처자가 그냥 아는 사이라고 혼자 사는 사내 방에 와서 빨래도 해주고 그러남? 세상 참 많이 변했네."
빨래 느는 것도 봤나 보네. 저 아저씨가 소문 내면 그녀가 시집가는데 곤란을 겪을 수도 있는데...
"그냥 학교 다닐때 친구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내 친구 중에는 아무도 내 빨래를 해 준 사람이 없는데. 하기야 내 세대는 여자가 친구면 그냥 결혼 했지. 남 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나."
"친구 맞다니까요."
살 열받아서 언성을 좀 높였다.
"아프다더니 거짓말이었구만. 수도세 4000원 내 빨리."
삭막한 아저씨다 진짜. 결국은 돈을 받아 가는 구나. 머리가 더 아픈 것 같다.

37편
"나 이제 내려 가네."
뭔가 내가 느끼기로 불만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아저씨가 등을 돌렸다.
"아저씨."
"너무 변명할 것 없네. 나는 요즘 젊은이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야. 괜찮아. 소문 안낼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날 히죽이 바라보는 아저씨에게 몸이 아팠지만 힘을 내어 실 비웃듯이 말을 뱉었다.
"아저씨, 이 시간에 집에 있으면 백수 아닌가요?"
나이 드신 분에게 잘못 말한 것 같다. 잘하면 한대 맞겠다. 그렇지만 그냥 아까 웃는 모습에서 조금 더 큰 웃음을 더하시고는 아저씨가 그냥 내려 가 버렸다. 백수 맞구만.
아저씨가 내려 가고 얼마 안 있어 그녀가 돌아 왔다. 이상하게 몸은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고 했는데, 백수는 개보다 못한가?
몸이 안좋으니까 별 생각이 다 떠오르네. 여름인데 왜 이리 추운겨?
"동엽씨, 약을 식후에 먹으라고 했거든요. 아침에 밥먹은 양으로는 약 먹기 어렵겠어요."
붉은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 시켰다. 날 생각하는게 너무 고마워서 감격해서 말이다. 하하, 오늘은 내가 눈싸움을 이겼다.
"나영씨, 지금 오버하는 거 아니죠?"
솔직히 같이 하숙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
"밥 못 먹겠어요?"
야이, 그녀가 내 말을 받아 그냥 꿀꺽 삼켜 버렸다. 저거 좋은 버릇은 아닌데... 나중에 좋은데 시집가게 하기 위해서라도 남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매너에 대해 가르쳐 주어야 겠다. 음, 나한테 하는 식으로만 해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겠다. 쿨럭, 이제는 기침소리도 심상찮게 나온다. 약을 먹어야지 안되겠다.
그녀가 간단하게 차려온 밥을 너댓 숟갈 퍼 먹었다. 그리고 밥 먹은 힘으로 조금 앉아 있어 보았다.
"나영씨, 이렇게 오래 나와 있어도 되는거에요?"
"괜찮아요. 내가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고마워요."
말없이 나긋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앉아 있으니 방이 막 움직이는 듯 어지러웠다.
"이제 약 먹으세요."
"그러지요."
그녀가 약 봉지에서 약 한첩을 꺼내 주었다. 한 손에는 물 컵을 들고 있다. 약을 받아 입에다 틀어 넣고는 물을 마셨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 보다가 그녀가 말했다. 웃음 맺힌 그녀의 모습을 보니 금방 낫을 것 같다.
"동엽씨는 약을 먼저 먹고 물을 마시네요."
그럼 물먹고 약 먹나.
"나는 물 먼저 먹고 약을 먹거든요."
그런 식으로도 먹는구나. 신기하다.
아픈 얼굴에 맺힌 미소도 아름다울려나. 고마움의 미소를 지어주고 몸을 이불깔린 곳으로 옮겼다. 마음으로는 그냥 아픈 것 외면하고 자리에 앉아 그녀와 이야기나 했으면 좋겠지만 몸은 자꾸 자리에 누워라 한다.
"나 좀 누울게요."
"푹 좀 주무세요."
자리에 누웠으나 아까 먹은 밥이 소화되지 않고 거북하다. 그래도 누워 있으니 아까 보다는 덜 어지럽다.
"나 잠들면 집에 가세요. 남자 혼자 있는 방에 처녀가 오래 있으면 괜히 애맨 소리 들어요."
"흠, 애맨 소리라도 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네요. 집에 있을 땐 거의 혼자서 말없이 시간을 보네요."
"왜, 친구라도 만나고 그러지."
"친구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또 시집간 친구들은 만나기가 껄끄러워요."
내가 누워 잠들 채비를 하자, 그녀는 저기 창쪽 벽으로 가 몸을 기댄다.
"심심하면 컴퓨터를 가지고 노셔도 되고, 헤드폰도 있으니까 음악도 들으시고 하세요."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자기 몸 걱정이나 하세요."
"진짜 여기 있을거에요?"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그러세요 그럼."
있다 가면 나야 뭐 좋지. 그녀가 곁에 있다는 느낌은 지금 내 생활에서 가장 큰 좋은 느낌이니까.
"동엽씨, 빨리 낫아요.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예?"
그녀는 내가 글쓰기 교본으로 보는 책들 중에 하나를 집어 펼쳐 보고 앉아 있다. 마지막에 한 말은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뱉은 말이었다.
그녀가 옆에 있다는 든든한 생각으로 잠시 잠이 들었으나 이내 속이 거북해서 깨었다. 약까지 먹었는데 몸은 더 안좋아 지는 것 같다. 어깨가 아프고 몸이 저려 추웠다. 그녀는 내가 아까 잠이 들 때 본 모습 그대로 벽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었다. 시간은 점심때가 훨씬 지나 오후의 중간에 와 있었다.
구토 증세가 일어났다. 아무래도 아까 먹은 밥이 소화되지 못한 것 같다. 그녀는 내가 깨어 난지 알아 채지 못했는지 책을 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 났으나 많이 어지러웠다.
"어, 동엽씨 일어 났어요?"
속이 거북해서 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손으로 말시키지 말라는 시늉을 해주고 바로 욕실로 달려갔다.
"욱! 욱!"
임신 한 것도 아닌데 헛구역질 뿐이었다. 냄새가 고약한 신물만 넘어 왔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르는 느낌이다.
"동엽씨 왜 그래요?"
내 욱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욕실로 들어 왔다. 내 붉어진 모습이 비참했는지 그녀의 안색이 많이 놀라는 표정이다. 감기 잘못 걸려도 이런 대접 받으니까 간혹 아파 볼만 하겠다 싶다. 그녀가 내 등을 걱정스레 두드려 주었다. 좀 지저분한 모습이라 보이기 껄끄럽지만 그녀의 행동이 너무 고마울 따름이다.
헛구역질은 오래 계속 되었다. 속은 아주 거북했지만 먹은게 별로 없으니 올라 오는 것도 별로 없었다.
나는 속이 아프기는 해도 이런 헛구역질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어 지는데 그녀는 그렇지 못한가 보다. 내 등을 쳐주면서 울먹거린다.
"동엽씨 괜찮아요? 죽으면 안돼요."
뭐야 씨, 감기 걸려 죽는 사람 봤냐. 그녀의 의외의 말로 헛웃음이 나왔다. 27살이나 먹은 처자가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귀엽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했다.
속이 좀 안정이 되었다. 얼굴을 씯고 밖으로 나올 때 까지 그녀의 표정엔 걱정이 많아 보였다. 뭐가 그렇게 걱정 스럽지? 감기 걸린 사람 처음 봤나?
구토 하던 힘으로 눕지 않고 앉아 있어 보았다. 그녀가 욕실을 나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걱정해 주어서 고맙긴 하지만 조금 어이가 없다.
"허허, 감기 걸려 죽은 사람 봤어요? 왜 그래요."
그녀가 답을 했다. 그 말에 가슴이 아팠다. 생각지 못했던 그녀의 아픔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내 가족들은 별로 아파 보이지 않았으나 이내 세상을 등졌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 곁은 너무 쉽게 떠나 버리더군요."
"그래도. 나 그냥 감기에요. 내일이면 낫을 거에요."
"우리 아빠도 처음엔 몸살 감긴 줄 알고 병원에 갔다가 그 다음날 돌아 가셨어요. 오빠는 교통사고였지만 겉보기는 멀쩡했어요. 뇌수술 받으러 수술실로 들어 갔다가 두 시간이 못되어 숨을 거두었어요. 우리 엄마는 괜찮아 지시는 듯 하다 헛구역질 몇번 하시더니 얼굴이 동엽씨처럼 붉어 졌었어요. 그리고 돌아 가셨어요. 동엽씨 지금 병원 가봐요."
"에?"
그녀의 무거운 음성을 거역하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지금 내게 필요 한 것은 잘먹고 푹자는 것이다. 움직이기가 어려웠으나 병원을 갈 수 밖에 없겠다. 그녀의 눈망울은 거역하지 못하게 옅은 눈물들을 맺고 있다.
어지럽다. 그녀가 나를 부축하고 있기에 더 어지럽다. 비 온 다음날 오후는 무쟈게 더웠다. 얼굴엔 땀이 금방 맺힌다. 그렇지만 몸은 춥다. 그냥 누워 있고 싶은데...
가까운 개인 병원을 제쳐 두고 종합병원의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갔다.아무래도 오늘 저녁엔 앓아 누울 것 같다. 기다리는 시간이 장난이 아니었다. 몸은 더운 땀이 나는 것과는 다르게 추위를 느낀다. 마감 시간안에 진료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내 옆에 그녀가 있다. 그녀는 병원에 기억하기 싫은 추억들이 많을 것이다. 그녀의 손을 잡아 보았다. 내 손이 무척이나 뜨겁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다.
"으아."
주사를 두대나 맞았다. 의사에게 진료 받기전 체온을 재었었는데 39.8도라고 했다. 간호사가 체온이 무척 높다고 말하면서 그녀에게 바깥분이 몸살에 심하게 걸렸으니 몸조리 잘 시키라는 말도 했다. 졸지에 그녀하고 나하고 부부가 되었다.
기분 좋다. 그 간호사가 맘에 들었다. 방금 주사 맞기 전 까지는 말이다. 졸라 아프다.
햇살이 기우는 오후의 거리를 다소 괜찮은 듯 걸어 왔으나 집에 오자마자 다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돌아 갈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이제 괜찮으니까 집에 가세요."
"왜 자꾸 가라고 그래요."
"그럼 여기 계속 있을 거에요?"
"집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여기 있으면 안돼요?"
"진짜 기다리는 사람 없어요?"
어제 그 남자는 뭐여 그럼.
"그럼 누가 있어요."
그녀가 부엌으로 갔다. 밥을 죽으로 만들어 왔다. 아까 맨밥 먹고 토한 걸 보며 생각해 내었나 보다. 먹기가 훨씬 편했다. 속에서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색했다. 내가 숟가락 들 힘도 없을까봐. 그녀가 날 아주 환자 취급하며 밥을 떠 먹여 주었다. 그것이 너무 고마운데, 아직은 어색한 행동처럼 느껴진다. 내 태어나서 감기로 이렇게 중환자 취급 받기는 처음인 것 같다.
"왜 이리 친절한거에요?"
"동엽씨도 나한테 많이 친절했었어요."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다시 얼마간 잠이 들었었다. 깨어나니 창밖이 어두웠다. 그때도 그녀는 내 방 벽에 기대어 책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아까 보다 몸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체온도 많이 내려 간 것 같고 어지러움도 제법 많이 가셨다. 무엇보다 속이 편했다.
"나영씨, 집에 안가요. 정말."
"동엽씨 일어 났어요?"
"네. 지금 몇시에요?"
"아홉시 갓 넘었어요."
"더 늦어지면 집에 가기 곤란할텐데."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될까요?"
"네?"
이 여자가 미쳤나. 어디 외간 남자가 혼자 사는 방에서 자고 간다는 말을 저렇게 쉽게 내 뱉을 수가 있냐. 이 사실을 어제 그 놈이 알아 봐라. 너 당장 차인다.
"동엽씬 그냥 편하게 주무세요. 혼자 있다 안 좋은 일 생기면 어떡해요. 어제 집에 돌아 와서 진짜 내가 혼자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냥 여기 있을게요."
감기 몸살이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근데 남자 만나고 와 놓고선 혼자라고 느낄 건 또 뭐람.
"나영씨. 나도 남자에요."
"누가 뭐래요?"
"꺼림찍 하지 않아요?"
"뭐가요? 둘이서 같이 밤을 지새는 거?"
"네."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안 덮칠테니까 염려말고 주무세요."
야이 씨. 아무리 내가 지금 아프다고 자네가 덮치는 것 정도 막을 힘 없겠냐. 근데 뭔가 거꾸로 된 양상이다.
"이봐요. 나영씨."
"왜요?"
"이러는 거 나영씨 사귀는 남자가 알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오해사기 쉬운데."
"네? 내가 사귀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동엽씨 왜 그래요. 그 말 진짜 속 상하는 말이네요."
다소 반응이 의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요."
"어제 나영씨 오피스텔에서 같이 있던 남자를 봤었거든요."
"어제 우리집에 왔었어요?"
"그렇다고 봐야 되나."
"그런데 왜 그냥 갔어요."
"그 남자 때문에..."
"남자라니?"
"같이 차타고 나가던데..."
"그때 왔었어요? 그땐 동엽씨 학원 마치는 때보다 이른 시간이잖아요."
"한시간 빼먹고 갔었지요."
"그것 때문에 아침에 나한테 차갑게 대한 거에요? 그런 거에요. 풋!"
야이. 갑자기 왜 웃냐. 나는 다소 심각한데.
"사귀는 사람 아닌가요?"
"네? 사촌 오빠에요. 내가 친오빠처럼 지내야 된다고 말한 그 사람이에요. 사촌이지만 사는 곳이 멀어서 거의 못만났던 관계로 잘 모르고 컸었어요. 나 우리 엄마 49제 하는 데 갔다 왔었어요. 이제 진짜 떠나 보낸 거죠. 내가 시집가면 아무래도 우리 부모님 제사 지내는 것 힘들겠지요. 언니가 그 오빠를 우리 부모님 양자로 입적시켰어요. 그냥 제사만 지내주는 양자지만, 그래도 이제 친오빠처럼 생각해야 되요. 날 집까지 태워다 주기는 했지만 돌아 가는 길을 몰라 하더라구요. 동엽씨 올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길래 잠시 길을 가르쳐 주고 왔었지요. 그럼 그걸 보고 그냥 돌아 간 거에요?"
"네."
"왜 돌아 갔는데요."
"사귀는 사람인 줄 알았지."
"동엽씨."
"예."
"나 동엽씨 많이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동엽씨 그런 말 할때마다 헛갈려요. 나 혼자서 이런는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 생각 자네만 하는 것 아니다 뭐. 욱,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뻔 했다. 아니 기분이 좋아서 졸라 웃고 싶은데 참다가 눈물이 맺힌 것이라 하자. 그놈은 그놈이었구만. 그리고 그녀가 날 좋아한다고 직접 입으로 말을 해 주었다. 가슴이 따뜻해 온다. 그렇지만 조금 서글퍼기도 하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말했다.
"나영씨."
"왜요?"
"혹시 나중에 잠 오면 저기 서랍에 얇은 담요 있으니까 깔고 자세요."
"훗, 알았어요."
조용한 밤은 깊어 간다. 날 좋아한다는 내 사랑하는 그녀가 내 방에 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삶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수 있는 것을 나는 지금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가슴이 확트인 느낌이다.
하루 종일 잠을 잔 탓으로 어둑하게 해가 고개 내미는 새벽에 눈을 떴다. 그녀는 벽에 베개도 없이 기대어 얇은 담요만 덮고 잠들어 있다. 깔고 자라고 그랬는데... 화장실에서 차마 소변을 볼 수가 없었다. 소리가 장난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옥상 밖으로 나왔다. 머리가 어지럽지 않고 개운했다. 쌀쌀한 새벽 공기 속에서 춥다기 보다는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예전으로 돌아 와 있었다.
'으, 시원하다.'
옥탑방 벽 구석으로 가 볼일을 보았다. 어떤 무작한 놈이 예까지 올라와 낙서를 해 놓았남. 소변 금지? 어린 놈 글씨가 아니다. 주인 아저씨가 유주얼 서스펙트다.
방으로 돌아 왔다. 세수를 하고 나니 몸이 개운하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깨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다. 머리에 베개를 갖다 받쳐 주었지만 깨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었나 보다. 그녀의 잠든 모습이 곱다.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너무 유혹적으로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나영씨. 나영씨?"
반응이 없다. 손으로 살며시 볼을 찔러 보았다. 역시 깨지 않는다. 허허. 가벼운 입맞춤 정도는 해도 모를거야. 근데 가슴이 왜 떨리냐. 한손으로 벽을 짚고 조용히 얼굴을 갖다 대었다. 뭐 자기도 나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가벼운 입맛춤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어색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마주쳤다. 에그머니나. 영점 일초간이나 입술이 닿았을까. 그녀의 큰 눈동자와 눈이 떡 마주쳐 대치되었다. 심장은 오케스트라의 팀파니 소리처럼 두두둥, 크게 울려퍼지고 있다.
"지금 뭐 하는 거에요."
"나. 아무짓도 안했어요."
그리고 뒤로 자빠졌다.

38편
"아무짓도 안했는데 왜 그렇게 놀래요?"
"아무짓도 안했으니까..."
"일찍 일어 났네요?"
"예."
"몸은 좀 어때요?"
"이제 낫았나 봐요. 어지럽지도 않고, 춥지도 않거든요."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야 될거에요. 이 베개 동엽씨가 받쳐 준거에요?"
"응."
"그럼 아까 베개 받쳐 주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응, 맞아요. 그거야 그거."
"맞긴 뭘 맞아요. 딴 짓 하려고 그랬죠?"
"무슨 딴 짓이요?"
"혹시 키스하려고 그랬던 것 아닌가? 아니, 한 거 아닌가?"
이 여자가 혹시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저러는게 아닌가 싶다. 깨었으면서 잠든 척 일어 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역시 좋아는 하지만 연인까지는 어렵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심히 쪽팔린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좀 더 주무세요."
"왜, 내가 잠들면 또 입맞추려고?"
이 년이 진짜 알고 있었구만. 뽀얗게 웃는 얼굴이 좀 얄밉다. 이 방에 자기하고 나 둘 뿐인 것을 알고서 저렇게 놀릴까? 이제 다섯 시 갓 넘은 새벽인데 내가 열받아, 쪽팔림에 못이겨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근데 내가 덮칠 용기나 있나. 나? 당연히 못 덮치지. 덮칠 정도의 용기가 있으면 벌써 사랑한다 얘길 했지.
"아무짓도 안했다니까 진짜."
몸이 많이 좋아 졌지만 평상시의 몸은 아니었다. 다소 어지럽다. 내가 누웠던 자리로 가 삐친 척 이불을 덮고 돌아 누웠다.
"삐쳤어요?"
"몰라요."
"알았어요. 이제 안 놀릴게. 근데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요?"
이게 진짜 아픈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쪽팔리게끔 왜 자꾸 뭇는거야. 차라리 하고나 들켰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래 했다 쳐라."
"진짜루?"
도대체 무슨 답을 듣고 싶은거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봐라 보았다. 창쪽에서 햇살이 비스듬이 들어 와 그녀 볼에 맺힌다. 허허, 진짜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날 보며 앉아 있는 그녀에게 고개를 흔들고 물었다.
"원하는 대답 해 줄테니까, 했다고 그러면 좋겠어요? 아무짓도 안했다고 말하면 좋겠어요?"
"피, 이제 진짜 아프지 않나 보네."
이게 또 말을 먹네.
"나영씨."
"왜요."
"나도 나영씨 많이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또한 나도 많이 헛갈려요."
"헛갈릴 것도 없나 보다. 약 먹어야죠. 죽 쑤어 올게요."
"아직 이른 시간인데."
"잠도 안 오는데 일찍 일어 나야죠."
그녀는 부엌으로 나갔다. 마음이 좀 후련하다. 아픈 몸이 좋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그녀에게 표현한 것 같아서 후련하다. 근데 반응이 저렇냐.
그녀가 무릎을 팔로 감싼채 내 죽먹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 내가 무슨 구경거린가. 밖은 이제 완연한 아침의 모습으로 환하다. 나중에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면 많이 허전하겠다. 좀 더 아프면 좋겠는데. 꾀병인 척 들어 누울까? 그녀가 정성스레 날 돌 봐 주었는데 빨리 완쾌해야지.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다.
약을 먹고 잠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리 저리 부산하게 부엌으로 욕실로 왔다 갔다 했다. 집에 갈 준비를 하나 보다. 세수를 하고 난 후의 그녀 얼굴이 유난히 뽀얗다.
"가려구요?"
"왜 자꾸 가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아니 집에 가려구 부산하게 움직인 것 같아서요. 누가 가라고 그랬나."
"커피 한 잔 해야죠. 원두 커피 기계 한 번 이용해 볼까나."
"커피가 물기를 많이 먹었을텐데."
"괜찮아요."
"나는 믹스가 더 맛있더라. 나는 그냥 커피 마실래."
"누가 동엽씨 끓여 준댔어요. 동엽씨는 아직 커피 먹으면 안돼요."
"그럼 나는 뭘 먹어요."
"따뜻한 물이나 마셔요."
그녀가 한 손에는 자신의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호호 거리면서 나에게 다른 손에 든 그냥 맹물이 담긴 컵을 건네 주었다. 아침까지 먹고 나니 이제 거의 정상을 찾은 느낌이다.
몸을 벽에 기대인채 앉았다. 그녀는 건너 편 벽에 앉았다. 방이 크지 않아 멀리 있는 느낌은 아니다. 아침에 그녀와 함께 커피, 아니 맹물 한 잔의 여유가 너무나 좋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출근 준비 하느라 바쁘겠지. 백수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다. 회사 다닐 때 보다 하숙하던 때가 훨씬 그리운 이유는 바로 그녀와 같이 했던 아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맛있어요?"
"응, 아침에 원두커피를 마시는 것이 참 좋네요. 저거 쳐박아 놓지 말고 자주 사용해요."
"알았어요."
"아, 좋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아침이네요."
"나두요."
"이때 일어 난 적 있기나 해요?"
야이, 거의 없구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따지지 좀 말아요."
"옛날 기억들이 떠 오르네요. 별로 옛날도 아니구나. 동엽씨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가 육개월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 전인 거 같아요."
"나두요."
그 사이 좀 많은 일들이 일어 났지.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가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
"동엽씨 처음 왔던 날 기억해요?"
"그럼요. 내가 짐 나르는 데, 이것 저것 시키기만 하고 하나도 거들어 주지 않았잖아요."
"그때 말고 하숙집 구하러 왔을때요."
"그때요? 아, 그때 나영씨를 처음 보았구나. 그때는 나영씨가 말도 없이 다소곳이 방을 보여 주었잖아요. 아주 청순하고 가련해 보여서 기필코 이 하숙집에 방을 얻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나 청순하고 가련한 거 맞잖아요."
"작전이었지요. 이사하는 첫날 그 환상이 깨지더군요. 방을 얻었다구, 그러니까 이제 그물안에 들어 온 물고기다 이거지. 이삿짐 나르는 것은 하나도 안 도와주고, 옆에 와서 얼마나 쫑알 되던지. 나는 방 구하러 왔을 때 본 그 여자 동생이나 되는 줄 알았어요. 비데오도 있네. 옷장은 없어요?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거기 보단 여기 놓는게 나을텐데. 기타 등등, 에구 얼마나 말이 많던지."
"이제 한 식구라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랬지. 나도 동엽씨가 방 구하러 왔을 땐 양복 입고 깔끔한 모습이길래 무슨 재원이나 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백수였을 줄이야. 겉 모습만 깔끔하면 뭐하냐. 이불을 깔 줄만 알고 갤 줄을 몰라요. 오디오 장식장에다 팬티를 말아 넣어 두지를 않나. 하숙생 중에서 동엽씨가 제일 안 씻었던 것 같어. 겉모습 깔끔했던 것도 나중에는 포기해 버리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좀 후한 점수를 주고 많이 기대를 했었는데. 내 팔자가 이러려니 했지요."
"아이, 백수 소리 하지 말라니까. 나도 작년까지는 그런데로 재원이었어요."
"짤렸잖아요. 재원이 짤리나."
"짤리기 전에 자진해서 나온 거란 말이에요."
"그거나 거거나."
"나영씨 그거 알아요?"
"뭘요?"
"여자도 남잘 성희롱하면 벌금 문다는 거."
"무슨 말이에요?"
"속옷만 입고 있는 데 문 열고 들어 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죠? 그때마다 고소했으면 나 때돈 벌었을거야 아마."
"누가 속옷만 입고 자래요? 그리고 노크 안하고 들어 간 적은 한번도 없다 뭐."
"그게 노크에요? 일방적 통보지. 그게 노크였구나."
"그게 그렇게 억울했어요? 그러면 동엽씨도 나 속옷만 입고 있을 때 내 방 들어오지 그랬어요?"
"그게 여자 입에서 나올 소리에요?"
"같이 살면서 서로 조심했어야지. 내 잘못 만은 아닌 것 같은데."
"치. 그래도 그 때문에 많이 친해 졌어요. 그지."
"맞아요."
"하기야, 나영씨가 처음 봤을 때 느낀 그런 여자였다면 친해 지기 어려웠을거야. 말없이 다소곳하기만 하면 말 붙이기가 힘들거든요."
"동엽씨가 회사일에 바쁘고, 이해 타산 적인 재원이었다면 나도 편하게 대할 수 없었을 거에요."
"그래, 하숙할 때가 그립네요."
"동엽씨가 정이 많아 좋았어요. 처음엔 잘 몰랐는데, 백수라서 실망도 했는데 자꾸 정이 갔어요."
"아이씨, 자꾸 백수라 그러지 말라니까."
"알았어요. 그래도 동엽씨가 백수였기 때문에 편했어요. 내 처지가 버림 받기 쉬운 처지잖아요. 나는 내세울게 없었어요. 동엽씨가 어찌 보면 참 높아 보였어요. 그래서 그때마다 백수라 놀린거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이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좀 헷갈린다.
"나영씨가 어때서요."
"나 이제 고아잖아요. 아직 발령이 날지 미지수인 백수구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물려 받은 재산이 좀 있긴 하지만 내세울만한 것은 못돼요. 이런 날 좋아 해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네요."
"무슨 말이 그래요. 그럼 나는요? 나는 그런 나영씨가 항상 높아 보여서 내 마음도 정의 내리지 못했었는데."
"동엽씬 좋은 사람이에요. 그 나이면 포기할 수도 있는데 자신의 꿈을 쫓고 있잖아요. 그것도 부모 힘 빌리지 않고 자신이 모은 돈으로 쫓고 있는 거잖아요. 나 보다는 훨씬 낫아요."
"아니라니까요. 난 미래가 불확실해요. 요즘 여자들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 좋아하지 않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나영씬 곧 발령날 거잖아요. 자신의 앞가림은 충분히 할 것이고. 외모도 준수하고, 좋아할 남자들 줄을 섰겠다."
"훗,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자신이 초라해 보이나 보네요. 아까 동엽씨 나에게 입맞춤 하려 할때 나 깨어 있었어요. 모른채 하려다 괜히 죄 짓는 것 같아서 눈을 뜬 것이에요."
"에?"
에구 쪽팔려라. 근데 눈 뜬게 죄지, 왜 모른 척 하려 했던게 죄냐.
"약간의 감정에 의해서 한 순간 어색해지지나 않을까 걱정되더군요. 동엽씨 내가 간호해 준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 난 사랑 같은 감정에 동정심이 포함되어서 그랬던 것이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거나 어색한 느낌이 들거에요."
말은 좀 어렵군. 나보다 들고 있는 컵에다 눈 길을 주는 그녀가 그녀의 말처럼 가엾긴 하다. 동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동정심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이제는 안다.
"아닌데, 나는 내 처지 때문에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랑이란 감정을 애써 부인하곤 했었는데..."
"흠... 처지 탓 하지 말아요."
"사회 생활 해 봐서 그런지 맘데로 안되네요. 나영씨."
"응."
또 반말이야 씨.
"나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 말고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단지 그 사람만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힘들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동엽씨가 좋아요. 나도 내 처지가 어떻던 상관없이 나만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조금 바란다면 우리 부모님 두분 따로 제사 모시는 것은 어렵더라도 결혼 기념일 같은 날을 잡아서 제사도 지내주는 그런 남자가 날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성공하면 충분히 그래 줄 수 있는데..."
"훗, 꼭 성공하세요. 아니 꼭 성공해야 돼요. 나는 내년에는 결혼 할 생각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만으로 27, 29이지. 실제로는 스무 여덟, 서른이잖아요."
"나는 누가 뭐래도 아직 이십대에요."
"알았어요. 근데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렀다 그지."
"조금 그렇네요. 결혼 얘기가 왜 나왔지?"
"자신의 처지 얘기하면서 나온 것 같다."
"그렇네. 하여튼 우린 못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래요. 고마워요."
아침 햇살이 창을 타고 넘어 온다. 내 방이 환하다. 내 아픈 몸도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겠다. 그녀의 수줍게 웃는 모습이 좋다. 아무래도 저 표정을 잊지 못할 것 같다.

39편.

금요일이다. 오늘은 술한잔 할 것이다. 음, 편찮았던 몸이 정상으로 돌아 오고 난 뒤 학원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포기하고 시집이나 갈 것이라고 보이지 않았던 주영씨를 다시 학원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냥 반가웠다. 솔직히 나오나 안 나오나 나는 상관이 없다. 하여간 주영씨 새로 보게 된 기념으로 오늘 한잔 할 것이다.
우리 그녀랑, 나는 서로 좋아 하는 사이가 맞다. 근데 그녀가 내 여자 친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녀와 데이트한 적도 몇 번 없고, 남들처럼 사랑한다
말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요즘들어 어, 그녀에게 장가를 가고 싶다. 말이 좀 이상한가? 그럼 다시 말해서, 나 아팠을 때 그녀와 같이 했던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 그녀와 같이 살고 싶다.
흠, 결혼은 현실이다. 감상적이어서는 견더내기 힘든 생활이 될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이란 퇴색되기 쉬워도 현실은 항상 자신 앞에 있다. 생활이 힘들고 짜증나면 사랑했던 사람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내 지금 생활들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짜증이 많이 날 것이다. 하지만 어제 오늘 그녀와 같이 사는 상상을 하며 히죽 히죽 웃곤했다.
오랜만에 종석이 형이랑, 주영씨와 술자리를 같이 했다. 나를 왜 불렀을까? 둘이서만 이야기 하느라 바쁘다. 내가 그네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알까. 이런게 바로 왕따 당하는 기분이구나.
주영씨가 학원을 나오게 된 것은 종석이 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겠다. 돈이 어디 있어서 그녀의 학원비를 대 주었을까. 둘이서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상한 개떡 사랑철학에 주영씨가 다소 감격을 한다. 술이나 마시자. 그녀 생각이 난다.
벽에 부딪쳤다고 꿈을 포기해 버리는 네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나도 작가의 꿈을 버리고 다시 직장 구해서 장가나 가버린다고 그러면 저 녀석이 학원비 대 줄까. 술이나 마시자. 그녀 생각이 난다. 그녀도 혼자 있으면 외로울텐데...
하여간 저 둘이서 주고 받는 말들 때문에 아니꼬아서 술을 제법 마셨다. 그녀 생각이 난다. 결국 본론은 너네 둘이서 좋아한다는 거 아니냐. 서론만 졸라 길었던 것 같다.
일년만 더해 보고 그래도 안될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깨끗이 포기하고 너 갈길을 가라. 그러면 나도 깨끗이 널 잊겠다. 참말로 내 잊을 수 있는지 두고 볼겨.
나도 그래 볼까? 일년 뒤 그때 내 모양이 이대로라면 내 깨끗이 당신을 잊겠오. 그러니 그때까지 딴 놈한테 시집갈 생각 마시오. 졸라 유치하다 진짜.
"종석씨 집에 가야지."
잠시 비몽사몽 했었다. 종석이랑 주영이랑 그네 둘이서 이야기 하는 틈을 타 테이블에 기대어 잠시 졸았었다. 고개를 들었다.
"아, 이제 집에 가는 거에요?"
"응, 주영이 집에 데려다 주려면 이제 일어나야 겠다."
"아, 우리집은 여기서 가까운데."
"우리집은 여기서 좀 멀거든요. 동엽씨."
여자 목소리다. 아, 이건 주영씨가 하는 말이구나.
"오늘 같이 있어 주어서 고마웠다. 나, 상금 탄 걸로 한 턱 내는 거 오늘 한 것으로 쳐라."
"집에 가는 겁니까? 그럼 가야지요 뭐."
"술을 좀 먹은 거 같은데, 집에 혼자 갈 수 있겠어?"
데려다 주지도 않을 거면서 묻기는 왜 묻냐.
"못 가겠어요. 좀 데려다 줘요."
난처해 하는 두 년,놈을 보았다.
"주영이만 없으면 내 데려다 주겠는데, 미안하지만 혼자서 가라."
그러길래 말 함부로 뱉지 말라니까.
"잘들 가세요. 전 혼자 가겠습니다. 주영씨 다음 주에 봐요."
"네. 잘 가세요."
그래 너네 둘이 가라. 주영씨는 인사말로도 데려다 준다는 말을 안하는 구나. 섧다.
술을 좀 먹었나 보다. 괜히 용기가 생기고, 또 기분이 좋다. 나영씨가 생각이 나서 또한 설레인다. 야이씨, 텔레비젼은 끄고 자야 될 것 아닌가.
"아저씨. 아저씨!."
"예?"
뭘 그리 놀라나. 급히 일어나는 아저씨를 보았다.
"텔레비젼은 끄고 주무세요."
"아, 예."
"그럼 나는 올라 갑니다. 똑바로 하세요."
"아, 예."
"삑."
언제 우리집에 엘레베이터가 있었냐.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수위 새끼는 티비 끄고 자라고 했다고 진짜 티비만 끄고 그대로 또 자 버린다. 지금 몇시나 된겨? 이제 열두시거만 벌써 자냐. 쩝. 근데 우리 집에 수위가 있었나?
"누구세요?"
아이, 열쇠가 왜이리 안 맞는겨. 안에 누가 있네.
"그러는 댁은 누구세요?"
"네?"
"열쇠가 안 맞아서 그러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
"동엽씨에요?"
"아, 나영씨구나. 하하, 오늘 많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문을 조금 열고 그녀가 고개를 내 밀었다.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안녕."
"술 드신 거에요?"
"나는 먹기 싫었는데, 종석이랑 주영이랑 자꾸 먹게 만들잖아요."
"그 사람들이 누군데요?"
"있어요. 나보다 못생긴 놈하고, 나영씨보다 못생긴 년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나저나 나영씬 여기 왠일이에요? 나 보고 싶어서 왔구나. 고마워요."
목이 말랐다. 그래서 눈을 떴다. 어제 내가 술을 많이 마시긴 마셨나 보다. 내가 어제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창밖으로 아침해가 떠 있다. 술을 먹어서 그런지 창밖 풍경이 참 이채롭다. 창도 졸라 큰 거 같다. 목이 마르다. 돌돌 몸을 굴렀다. 어랏! 왜 푹 꺼지는겨.
"아얏!"
이건 또 뭐야. 왜 내 밑에 사람이 있는겨.
"누구시래요?"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에? 물먹으려고. 근데 왜 나영씨가 여기 있는 거에요?"
"이런. 그나저나 좀 비켜 주세요. 무거워요. 설마 이상한 맘 먹고 덮친 것은 아니죠?"
모습을 보니까 좀 그렇다. 앞으로 떨어 졌으면 참 절묘했을 것 같다. 아쉽게 옆으로 구른게 다리만 덮쳤지만. 하여간 심장이 쿵쾅 쿵쾅 뛴다. 급히 뒤로 물러나 놀란 표정으로 벽에 기댔다. 방안 풍경이 낯이 익지만 분명 내 방은 아니다.
"여기가 어디에요?"
"제 오피스텔이잖아요."
"제가 여기 왜 있는데요?"
"생각 안나요?"
"당연히."
"내가 어제 얼마나 난처 했는 줄 알아요?"
"나영씨 그런 차림으로 자요?"
"이게 어때서요?"
"나는 그 긴치마 입고 자는 줄 알았지."
나이 생각을 좀 하지. 오부 리본 달린 흰색 꽃돼지 면 바지와 삐에로가 연상되는 팔없는 이상한 티가 절묘하게 우스운 잠옷이다.
"더워서 그걸 어떻게 입고 자요. 지금 그 이야기 할 때가 아니잖아요."
"내가 술 먹고 여기로 찾아 왔던 가요?"
"응."
"왜 그랬지? 헤헤, 보고 싶기는 했지만 많이 실례를 범했네요."
"알면 다행이네요."
"근데요. 제가 무슨 실수는 안했지요?"
"말을 좀 많이 했던 것을 빼놓고는..."
"나 침대에서 재우고 나영씨는 바닥에서 잔거에요?"
"으응."
"아, 미안하네. 물 좀 주세요."
그녀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물을 떠다 주었다.
"나 시집 못가면 책임 지세요."
그거 참 듣기 좋은 말이네. 아, 시원하다. 여기로 왜 왔을까? 그 참 신기하네. 에고, 집에 가야겠다.
"나영씨. 미안하구요. 저 집에 갈랍니다."
"지금이요? 이제 여섯신데. 지금 나가다 사람들 눈에 띄이면 어쩔려구. 나 다른데 시집 못가게 만들려구 그러지?"
"에? 지금 몇신데요?"
"이제 여섯시에요. 수위는 벌써 깨어서 문을 지키고 있을텐데. 참 어제 수위가 암말 않던가요?"
"그걸 내가 어떻게 기억해요. 아침 먹여 줄래요?"
"참내. 그럼 어제 했던 말이 전부 술기운으로 했던 말이라 이거죠? 괜히 재웠네."
"내가 어제 무슨 말 했는데요?"
"아니에요. 지금 간단하게 아침 밥 먹을래요?"
"차려 주면 고맙죠. 속이 쓰리네요. 어제 내가 술먹고 찾아 왔을 때 겁나지 않던가요?"
"전혀요. 이상하게 별로,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신고를 했을텐데 같이 살아 봐서 그런지 동엽씨는 전혀 부담이 안되네요."
"욕실이 이쪽이죠? 좀 씻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동엽씨, 발 좀 깨끗이 씻고 다녀요."
어, 시원타. 샤워기 틀어 놓고 소변을 했다. 좀 부끄럽다. 세수를 하고 그녀 몰래 그녀 칫솔로 이빨도 닦았다. 수건이 어디 있는겨. 벽에 걸려 있는 장식대의 문을 열어 보았다. 이것은? 같이 살면서도 처음 본 것 같다. 그녀의 브라자와 빤스. 허허, 여기는 그녀만의 욕실이구나. 예전 하숙할때랑은 틀리지 참. 예전의 복수를 해 줄까 하다가 참았다. 그 옆에 놓여 진 수건 하나를 꺼내서 닦았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그런데로 잘 생겨 보인다.
식탁에는 밥이 없었다. 그녀와 마주하며 앉았다.
"아니 이건 빵이잖습니까."
"쌀이 없더라구요."
"요즘 밥 안해 먹어요?"
"나, 요리 학원 다시 나가요. 거기서 먹고 와요."
"아침에는 빵 먹고?"
"네."
"그래도 한국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차려 주는데로 먹어요. 굶기지 않는 걸 고맙게 생각을 해야지."
빵 두조각을 우유랑 같이 먹었다. 속이 좀 느끼하지만 쓰림은 좀 가셨다. 그나저나 내가 어제 무슨 말을 많이 했을까 궁금하다. 술먹으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막 꺼내 놓는다고 하는데...
"내가 어제 무슨 말을 많이 했어요?"
"음, 왜요? 술먹고 한 말이라 본심이 아니라 그럴려구요?"
"그게 아니라, 취중 진담인데 했던 말을 물리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혹 실수를 했나 싶어서요."
"다른말은 별로 안했어요."
"혹시 내가 나영씨를 좋아한다거나, 사...사랑한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던가요?"
"했어요."
"에?"
"나 사랑한다고 말하던데요."
갑자기 얼굴이 팍 붉어져 왔다. 그 말을 했다면 수도 없이 했을거 같다. 큰일이다. 원래 내 마음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 말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 떠벌렸다면 문제 될 수가 있다. 쪽팔리잖아. 근데 내가 그 말 했다는데 그녀는 참 덤덤하게 대답을 한다. 자기도 나처럼 긴가 민가 했다면서...
"아, 그건..."
"그런데로 듣기 좋던데요."
"호...혹시 제가 몇 번이나 그런말 하던가요?"
"딱 한번이요."
어랏. 생각보다 적게 말했네. 다행이다. 그녀를 보며 씩 웃어 주었다.
"음, 솔직히 내가 나영씨를 그 사...사랑하는 게 맞긴 맞죠."
"흠. 나도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어요."
그녀가 뽀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기억에 없는데...
"진짜루? 나는 들은 기억이 없는데. 한 번더 대답해 줄수는 없는지?"
"싫은데요."
"그럼 뭐."
"동엽씨 장가 가고 싶어요?"
"왜요?"
"흠, 어제 그게 설마 프로포즈는 아니겠죠?"
"에?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했다고 그게 무슨 프로포즈에요?"
"그 말은 한 번 했지만 결혼 합시다,라는 말을 잠들 때 까지 계속 했어요. 수십 번이 뭐야. 아마 백번도 넘었을거야. 내가 나중엔 하도 지쳐서 알았어요, 그랬다니까요. 결혼이 뭐 졸라서 하는 것인가?"
"안녕히 계세요."
졸라 쪽팔려서 도망치듯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종석이 형에게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바이다.
"어머니, 댁의 아드님이 뭐 잘 났어요?"
"니가 어때서."
"지금 어머니가 반대하고 그러실 처지가 아니에요. 어머니 아들은 백수라니까요."
"니가 왜 백수야."
"백수 맞아요. 그녀는 선생님이라니까요. 고등학교 선생님. 그녀의 부모님이 계셨다면 내가 퇴짜 당하고 있을거에요."
"근데 부모님 다 돌아가셨다는게 좀..."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그사람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조금만 돌려 생각해 보면 그런말 나오지 않으실거에요."
"그래도. 영 안내킨다. 네 형은 장가갈때 속을 안 썩이더만 너는 왜 그렇냐. 그러고 보니 여자가 나이도 좀 많다."
"우리집에 은주도 시집안가고 있잖아요. 걔하고 나이가 같은데. 어머니가 은주한테 그렇게 말하실수 있겠어요?"
"그래도. 일단 아버지하고 얘기 해 보자."
"어머니!"
"왜, 내 아들아."
"나 사고 쳤단 말입니다. 빨리 장가 가야 돼요."
"뭐!"
사고는 무슨.
강사가 영 못 미더웠었는데 작가를 한 명 소개 시켜 주었어요. 같이 작업한 시나리오가 있는데 공모전에 당선이 되었지요. 예전에 종석이 형이 공모했던 것과는 차원이 틀리죠. 그녀는 올 봄에 진짜 발령이 났었어요. 내가 그랬지요. 꿈 꾸는 것에 희망이 좀 보이길래. 그녀가 첫 월급 타서 한 턱 내는 자리에서 내 말했지요.
"내가 올 겨울에는 방송국에 공채를 내 볼 생각인데요."
"그래서요?"
"나영씨가 그때까지 시집 안갔으면 좋겠어요."
"왜요?"
"내가 요즘은 그런데로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그거하고 나 시집 가지 말라는 말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나영씨가 올해 시집 간다면서요. 내가 공채만 통과하면...어,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시집을 안가고 있으면 나도 어..."
"무슨 말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나영씨하고 같이 살고 싶다 이거지요."
"그게 자신감 생겨서 하는 말이에요?"
"그럼요. 그러니까 딴 남자한테 시집 안가고 있으면..."
"나 동엽씨 그건 싫어요. 내가 동엽씨 말고 딴 남자 사귀는 걸로 보여요?"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런 모진말을 할 수가 있냐."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내가 나영씨 남편이 되고 싶다 이거지요."
"나는 올해 넘기기 싫어요."
그래서 그녀는 내일 결혼을 합니다. 가을 바람이 시원하지요.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추석때 집에 내려 가지를 못했어요. 추석때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간단하게 차례를 지냈지요. 집엔 가족들이 많지만 그녀옆에는 나뿐이더라구요. 그때 그냥 둘이서 합의봤어요. 전에부터 집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 말은 해 놓았지만 우리 어머님이 반대를 하시더라구요. 뭘 믿고 반대를 할까 참 우리 엄마 배짱이 놀랍더군요. 그래서 사고 쳤다고 말했지요. 사고는 무슨, 아직 제대로 키스한번 못해 봤는데, 그녀에게는 비밀입니다. 좀 황당했을거에요. 부모님께 얘기 해 본다는 말만 하고 고향 내려갔다가 올라 와서는 한달안에 결혼하라는 말을 통보 했으니까요. 시월 십칠일입니다. 나는 부조금 안 낼거에요. 하여튼 부조금 안들고 식장 오는 사람들 내 두고 볼겨. 아직 내가 기반이 닦여 지지 않아 다소 불안하지만 그녀가 책임진대요. 서로 힘을 합하면 더 나은 미래가 올 수 있다 그러네요. 나보고 긍정적으로 살래요. 자신감 가지고 말이지요.
전화나 해볼까?
"나에요."
"왜요?"
"뭐해요?"
"그냥 언니랑 이야기 하고 있어요."
"결혼 축하해요."
"동엽씨도요."
"그럼 내일 봅시다."
"그럽시다."
"아, 참. 행복합시다."
"그럽시다."
"아, 그리고 또.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진짜 내일 봅시다."
"그럽시다."

(((((끝입니다.)))))

[출처] 엠파스 카페 (http://cafe.empas.com/)
[원문] 하숙-순정 소설입니다~ (번호있는사람들 / 익명 )

by 여울이 | 2008/12/31 16:56 | 동동아1 | 트랙백 | 덧글(0)

당신을 친구함에있어

당신을 친구함에 있어
http://cafe.empas.com/thwndgks456
당신을 친구로 함에 있어
입을 빌린 그런 화려함이기보다는
가슴으로 넘치는 진실함이고 싶습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서로가 가슴을 적시는
감동적인 말은 아니어도
그 한마디 한마디에
서로가 마음 상해하지 않을
그런 배려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
당신을 친구함에 있어
불꽃처럼 달아오르는 꽃잎이기보다는
계절 내내 변함없는 줄기이고 싶습니다.
화사하게 달아올랐다가
가장 가슴 아프게 지어버리고 마는
봄 한철 그 격정이기보다는
사계절 내내 가슴을 흔드는
그런 여운이고 싶습니다.
당신을 친구함에 있어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물결이기보다는
그 물결을 타고 가라앉는
모래알이고 싶습니다.
남의 말에 동하여
친구를 저버리고 떠나가는
그런 가벼움이기보다는
당신의 말 전부를 다 믿을 수 있는
그런 묵직함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
당신을 친구함에 있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아름다움이기보다는
서로를 그리워하며 존중하고
배려하고 소중함이고 싶습니다.
애써 꾸미고 치장하는
가식의 마음이기보다는
빈손 그대로의 만남일지라도
뜨겁게 가슴속에 회오리 치는
그런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http://cafe.empas.com/thwndgks456

[출처] 엠파스 카페 (http://cafe.empas.com/)
[원문] 당신을 친구함에있어 (54년말띠마을 / dhrcjs8 )

by 여울이 | 2008/12/21 22:14 | 동동아 | 트랙백 | 덧글(0)

사랑하는사람에게

 
 

♧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인가요?♧ 돌고 도는 계절의 문을 여노라면 누군가의 가슴속 그리운 사람이 되어, 들꽃향기 피어나는 그리움의 언덕을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창가를 스치는 바람처럼 가슴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어쩌지 못해 그리워해야만 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도 좋습니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이름이 많으면 많을수록.. 외롭지 않은 생이 될 테니까. 누군가를 그리워만 하다가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 많아도 좋다.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리워해야 할 사람이 많은 만큼.. 만나고픈, 만나야 할 사람도 많기 때문이니 차 한잔의 향기가 창가를 스치는 바람이 길모퉁이의 우체통이.. 당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적은 없었나요? 하늘이 너무 맑아, 하늘이 너무 흐려 울고 웃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그대 누군가 보고 싶다는 말을 일기장에 썼다가, 미련 없이 지워버린 적은 없나요? 한 권의 책을 읽다가 가슴 찡한 감동이 밀려 온 적은 없나요? 살면서 문득문득 가슴 저미게 밀려오는 이 파도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진열대에 장식된 술병을 바라보며 한잔 술에 흠뻑 취하고픈 날.. 메일에 마음을 담아 그대에게 띄우고 싶습니다. 메일을 쓰고싶은 날은 당신향한 그리움으로 가슴 타는 날이기에...♥

[출처] 엠파스 카페 (http://cafe.empas.com/)
[원문] 사랑하는사람에게 (54년말띠마을 / cms0164 )

by 여울이 | 2008/12/20 10:55 | 동동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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